Wednesday, August 31, 2011

제149편 2차 전도여행

제148편 벳새다에서 전도자 훈련 ∥ 제150편 3차 전도여행

149

2 전도여행

 

149:0.1 갈릴리에서 2 대중 전도여행은, 서기 28 10 3 일요일에 시작됐고, 동안 계속되다가, 12 30일에 끝났다. 예수 열두 사도는, 새로 뽑은 117명의 전도자 단체와, 수많은 다른 관심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을 진행했다. 그들은 여행을 통해서, 가다라, 프톨레마이스, 야피아, 다바리따, 므깃도, 에즈릴, 스키토폴리스, 다리키아, 힙보, 가말라, 벳새다_유리아, 그리고 기타 여러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다.
 
149:0.2 일요일 아침에 떠나기 전에, 전도자들에게 목적에 관한 훈시를 말씀해 달라고 안드레 베드로 예수 청했으나, 주님 사양하면서,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수행할 있는 그런 일은 자신의 직무가 아니라고 말씀했다. 충분 토의끝에, 세베대 아들 야고보 훈시를 맡기로 결정했다. 야고보 말이 결론에 이르자, 예수께서 전도자들에게 말씀했다: “너희는 나가서 자신이 맡은 업무를 행하라, 그리고 나중에, 너희가 스스로 자격 있고 신실하다는 것을 보이면, 그때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너희를 임명하겠다.
149:0.3 이번 여행에서는 야고보 요한만이 예수 함께 이동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사도들은 각각 열두 명에 달하는 전도자를 함께 데리고 다녔으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는 동안 그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사도들은, 신자들이 천국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는 즉시 세례를 베풀곤 했다. 예수 동행자는 동안 광범하게 여행했는데, 때로는 하루에 도시를 방문하면서, 전도자들의 활동을 돌아보고, 천국을 건설하려고 애쓰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2 전도여행 전체는 주로, 새로 훈련받은 117명의 전도자 단체에게 실질적 체험을 제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149:0.4 기간 내내 계속해서그리고 예수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 향해 마침내 출발할 때까지, 다윗 세베대 벳새다 있는 아버지 집에서 천국 업무를 위한 상설 본부를 꾸려나갔다. 이곳은 세상에서 예수 업무를 위한 정보 교환소였고, 다윗 팔레스틴 여러 지역과 주변 지역들 사이에 진행했던 심부름꾼 봉사를 위한 교대 장소였다.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 그러나 안드레 승인을 얻어서 행했다. 다윗 급속도로 확대되고 확장되는 천국 업무에서 정보 분야에 40에서 50명의 심부름꾼을 고용했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동안, 다윗 예전의 고기잡이 일에도 시간을 할애하여, 일부나마 경비를 충당했다.
 
 
1. 널리 퍼진 예수의 명성
 
149:1.1 벳새다 야영지가 해산될 무렵에는, 예수 명성, 특히 치유자로서의 명성이, 팔레스틴 지역은 물론 시리아 주변의 모든 지방에 퍼졌다. 그들이 벳새다 떠난 후에도 여러 동안 병자들이 계속 거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어디에 계신지를 다윗에게서 알아낸 후에 주님 찾아가곤 했다. 예수께서는 여행에서, 소위 기적이라고 불리는 치유를,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난당하는 수십 명이, 치유를 추구하도록 자신을 재촉하는 끈질긴 신앙에서 나오는 재건하는 능력의 결과로,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다.
149:1.2 사명을 수행하던 무렵에 --그리고 땅에서 예수 나머지 생애 내내 계속-- 이상하고 설명되지 않는 일련의 치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안의 여행 도중에, 유대지방, 이두메, 갈릴리, 시리아, 두로, 시돈, 요단강 건너편 지방에서 100 이상의 남녀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 이런 무의식 치유의 혜택을 입었고,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수 명성을 더욱 확장시켰다. 그리고 자생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때마다, 혜택을 입은 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직접 지시했음에도, 그들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149:1.3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이런 치유의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전혀 계시되지 않았다. 주님 이런 치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사도들에게 번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다만 번의 경우에, “권능이 나에게서 나간 줄을 내가 안다”고 말씀했을 뿐이다. 한번은, 병든 아이가 그에게 손을 대자, 주님 “생기{生氣} 나에게서 나간 줄을 내가 안다”고 말씀했다.
149:1.4 이런 무의식 치유의 본질에 관해 주님 직접 말씀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제넘은 일인 알지만, 그런 모든 치유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허용될 것이다. 우리가 믿기에, 예수 세상 사역 도중에 일어났던, 이런 외견상 치유 기적 가운데 다수는, 다음 가지의 강력하고 효력 있고 연합된 영향이 공존한 결과였던 같다:
149:1.5 1. 그런 치유가 순수한 육체적 회복보다는 영적 혜택을 갈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끊임없이 치유 받기를 갈망하는 인간 심성에 강하고 우세하고 생생한 신앙이 현존함.
149:1.6 2. 인간의 그런 신앙과 공존하는, 거의 무제한적이고 무시간적인 창조적 치유 능력과 특권을 그의 인격자 안에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육신화하고 자비가_지배하는 하나님 창조주 아들 동정심과 연민이 실존함.
149:1.7 3. 피조물의 신앙과 창조자의 생애와 더불어, 하나님_사람이 아버지 뜻의 의인화된 표현이었다는 또한 주목해야한다. 인간의 필요와 이를 채워주는 신성한 능력이 접촉할 , 아버지께서 다르게 뜻하시지 않으면, 둘이 하나가 됐고, 인간 예수께는 치유가 무의식적으로 발생됐지만, 그의 신성한 본성에게는 즉각 인식됐다. 다수의 이런 치유에 대한 설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알려진 위대한 법칙, 창조주 아들 원하고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뜻하시는 것은 그대로 이뤄진 법칙에서 발견할 수밖에 없다.
149:1.8 우리의 의견은, 그때, 예수께서 몸소 현존하는 앞에서, 당시에 사람의 아들 매우 가깝게 연합돼있던 어떤 창조 세력과 우주 인격체들로 말미암아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심오한 인간 신앙이, 글자 그대로 그리고 정말로 있어야했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주, 자신이 보는 앞에서, 병든 사람이 강렬한 개인 신앙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도록 하셨음이, 기록된 사실대로다.
149:1.9 다른 많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목적으로 치유를 추구했다. 두로 부유한 과부가 시종들과 함께 질병을 치유 받으러 왔었는데, 그에게는 여러 가지 병이 있었으며; 가장 돈을 많이 사람 하나님 권능늘 살 수 있다는 듯이 여자는 갈릴리 지방 여기저기 예수 따라 다니면서 점점 많은 돈을 계속 내밀었다. 그러나 여자는 천국 복음을 번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으며; 여자가 추구한 것은 육신의 질병 치료뿐이었다.
 
 
2. 사람들의 태도
 
149:2.1 예수께서는 사람의 정신을 이해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으며, 그의 교훈이 그가 제시한대로 간직됐더라면, 그에 관한 유일한 해설서가 그의 세상 생애로 인해 제공된 영감 어린 설명일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민족과 종교가 신속하게 천국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예수 교훈을, 특정한 민족종족과 종교가 받아들이기 쉽도록 고치려고 초기 추종자들이 애쓴 것은, 의도는 좋았지만, 모든 다른 민족과 종족과 종교가 그런 교훈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149:2.2 사도 바울, 예수 교훈을 당시의 특정한 집단들이 호감을 갖도록 만들려고 애쓰면서, 지침과 훈계를 주는 많은 편지를 썼다. 예수 복음을 가르쳤던 다른 선생들도 그와 비슷한 일을 했는데, 이런 글들 가운데 일부를, 예수 교훈이 구체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 나중에 함께 수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주님 복음이, 다른 종교보다는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것에 많이 포함돼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예수께서 가르치지 않은 것도 또한 많이 포함하고 있다. 페르시아 신비주의로부터 여러 교훈과 많은 그리스 철학이 초기 그리스도교 들어온 외에도,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149:2.3 1. 그리스도교 속죄 교리가-- 예수께서 아버지 엄격한 공의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신성한 분노를 완화시켜주는 희생양 아들이라는 가르침이-- 설명하다시피, 복음의 가르침을 유대 신학에 직접 연결시키려는 노력. 이런 교훈은, 믿지 않는 유대인 천국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있도록 만들려는 갸륵한 노력에서 나왔다. 유대인 환심을 사려는 이런 노력은 실패했으나, 모든 후세 세대에서 많은 정직한 혼을 혼란시키고 따돌리는 데에는 성공했.
 
149:2.4 2. 주님 초기 추종자들이 저지른 번째 실수, 그리고 모든 후세 세대가 지속적으로 범한 실수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아주 온통 예수라는 인격자 관한 것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예수 인간성에 관한 이런 과잉 강조가 그의 교훈을 애매하게 만들었고, 모든 것이, 유대인, 모하멧 교도, 힌두인, 그리고 동방 다른 종교인들이 예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예수 이름을 지니고 있을 법한 종교에서 예수라는 인격자의 위치를 우리는 과소평가하지 않지만, 그런 배려가 그의 영감 어린 생애를 덮어버리거나, 그의 구원의 메시지, : 하나님 아버지시고 사람이 형제관계라는 것을 대신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149:2.5 예수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공통으로 유지되는 진리를(많은 것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예수 메시지에서 왔음을) 인정하면서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동시에, 차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를 삼가야한다.
 
149:2.6 그런 특이한 시기에, 예수 명성은 주로 치유자로서의 평판에 의거했지만,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영적 도움을 구하려고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일반 사람에게 아주 즉시 직접 호소한 것은 역시 육신의 치유였다. 도덕적으로 예속되고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희생자들이 더욱 예수 찾았으며, 그는 구원되는 길을 변함없이 그들에게 가르쳤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어머니들은 딸을 지도하는 것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다. 어둠 속에 앉아있던 자들이 그에게로 나왔고, 그는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드러냈다. 그의 귀는 언제나 인류의 슬픔을 향해서 열려 있었고, 그의 보살핌을 구하는 자들을 도와줬다.
149:2.7 창조주 자신이 필사자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있었을 , 어떤 별난 일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런 소위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서 예수 접근하려고 해서는 결코  된. 예수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배우고, 기적을 통해서 예수 알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나사렛 예수께서 세상에서 초물질 행동을 실행한 유일한 종교 창시자임에도, 이런 경고는 정당하다.
 
149:2.8 세상에서 미가엘 사명 가운데 가장 놀랍고 혁신적인 부분은, 여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공공장소에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도 아는 하지 않아야했던 시절에, 예수께서는 3 갈릴리 여행과 관련하여 여자들이 감히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따라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말씀을 여자에게 주기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는 율법학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행할 만큼 최고의 용기를 가졌다.
149:2.9 오랜 세월 멸시 당하여 잊혀지고 노예처럼 고된 일을 하던 여자들을, 예수께서는 세대 만에 풀어줬다. 그리고 예수 이름을 주제넘게 취한 종교가, 후일에 여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고귀한 모범을 따를만한 도덕적 용기가 부족했던 것은, 하나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없다.
 
149:2.10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은 예수께서 시대의 미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런 종교적 편견도 없었으며;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사회적 적대감과 비슷한 어떤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선조의 종교에서 좋은 점은 따르는 반면, 미신이나 노예 신분 같은 사람이_만든 전통을 무시하는 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자연의 재난, 뜻밖의 사고, 그리고 기타 재앙은, 신이 내리는 심판이나 섭리 불가사의한 처방이 아니라고, 대담하게 가르쳤다. 의미 없는 예식절차에 노예처럼 헌신하는 것을 비난했고, 물질적인 숭배의 오류를 폭로했다. 그는 사람의 영적 해방을 담대하게 선포했고, 육신을 입은 필사자들은 정말로 그리고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라고 담대하게 가르쳤다.
149:2.11 깨끗한 손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이 진정한 종교의 표시라고 용감하게 선언했을 , 예수께서는 선조의 모든 교훈을 뛰어넘었다. 전통 대신 현실을 존중했고, 허영과 위선이 가득한 모든 겉치레를 부정했다. 그렇지만 두려움 없는 하나님 사람은, 파괴적인 비난을 퍼붓거나, 당시의 종교, 사회, 경제, 정치 관례를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호전적인 혁명가가 아니었으며; 점진적 진화를 주장하는 이였다. 그가, 돼있는 그것을 파기하는 일에 관여한 것은, 오직 그렇게 돼야 뛰어난 것을 동료들에게 동시에 제시할 때뿐이었다.
 
149:2.12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순종을 받았다. 그가 친히 부르신 사람들 가운데 사람만이, 제자가 되라는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능력을 발휘했지만, 독재적이지 않았다. 신뢰를 요구했으나, 아무도 그가 지시하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절대 권위를 행사했지만,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추종자들이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도록 허용했다.
149:2.13 뿌리_깊은 종교적 편견에 빠진 자들, 또는 그의 교훈에서 정치적 위험을 식별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제외하면, 주님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의 독창성과 권위에 감탄했고, 우둔하고 성가신 질문자들에게 인내심으로 대하는 그의 태도에 경탄했다. 그는 자신의 활동 영역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 줬다. 그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만 그를 두려워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매달리기로 작정했던 악과 오류를 뒤집어엎게 돼있는 진리를 그가 옹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만 그를 미워했다.
149:2.14 그는 친구와 모두에게, 강력하고 기묘하게 매혹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사람이, 단지 그의 우아한 말을 듣고 그의 간결한 생활을 보려고, 동안 따라다니곤 했다. 헌신하는 남녀들이 거의 초인간적 애정으로 예수 사랑했다. 그들은 그를 알면 알수록, 그를 더욱 사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여전히 참말인데: 오늘날에도, 그리고 모든 미래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나님_사람을 알면 알수록, 그를 더욱 사랑하고 따르게 것이다.
 
 
3.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149:3.1 평민들이 예수 그의 교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음에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경계심과 적대감을 품게 됐다. 바리새인 조직적이고 교리적인 신학을 형성했다. 예수께서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가르치는 선생이었으며; 규칙을 따르는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의거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비유를 들어 가르쳤다. (그가 예를 들어 자신의 메시지를 설명하려고 비유를 사용했을 , 목적을 위하여, 이야기의 가지 특색만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그의 비유에서 우화{寓話} 만들어내려고 시도함으로써, 예수 교훈에 관한 잘못된 관념이 많이 만들어질  있다.)
149:3.2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최근에 젊은 아브라함 개종했던 사건의 결과로,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이제는 갈릴리 2 전도여행에서 전도자들과 함께 나가있는 정탐꾼이 변절한 사건 때문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두려움과 편견으로 인해 점점 눈이 멀었으며, 한편 천국 복음의 매력적인 진리를 계속 배척함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졌다. 내주하는 영의 호소에 사람이 귀를 막을 , 태도를 변경시키기 위하여 있는 일은 거의 없다.
149:3.3 예수께서 벳새다 야영지에서 전도자들과 처음 만났을 , 강연을 마치면서 말씀했다: “육체와 정신 속에서 --감정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너희는 기억해야한다.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한결같은 내주하는 영이다. 체험의 본질과 정도가 다소 다를지라도, 신성한 영들은 모든 영적 호소에 한결같이 반응한다. 인류는 오직 영을 통해서만, 그리고 영에게 호소함으로써만, 언제라도 하나가 되고 형제관계를 달성할 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 가운데 다수는 복음의 영적 호소에 마음 문을 닫았다. 그들은 이날부터 계속, 주님 없애려는 계획과 음모를 멈추지 않았다. 종교 범죄자, 유대 신성시되는 율법의 주요 교훈을 어긴 자로서 예수 체포하고, 유죄를 선고하여 처형해야한다고 그들은 확신했다.
 
 
4. 전도여행의 진행
 
149:4.1 예수께서는, 전도여행에서 대중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으나, 야고보 요한 함께 우연히 머물게 대부분의 도시나 동네에서 신자들과 함께 저녁 수업을 여러 열었다. 이런 저녁 수업시간 중에 번은, 나이 어린 전도자가 분노에 관하여 예수 질문했고, 주님 다른 것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49:4.2 “분노는 대체로, 지능과 육체의 혼합된 본성을 영적 본성이 통제하지 못한 정도를 나타내는 물질적 증상이다. 분노는, 너그러운 형제다운 사랑이 모자라고, 자존감과 자기_통제가 모자람을 가리킨다. 분노는 건강을 해치고, 정신의 질을 저하시키고, 사람의 혼을 가르치는 선생을 무력하게 만든다. ‘진노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은 ‘분노해서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지만,’ 반면에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라는 글을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않았느냐? 너희는 모두 이런 말도 알고 있다: ‘유순한 대답은 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말은 분노를 격동시킨다.’ ‘신중함이 분노를 지연시킨다.’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자는 성벽 없는 무방비한 성과 같다.’ ‘진노는 잔인하고 분노는 난폭하다.’ ‘분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격노하는 자는 계명을 많이 어기게 된다.’ ‘영으로 조급하지 말라, 분노가 우매자의 품에 머물기 때문이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예수께서 이어서 말했다: “사랑이 너희 마음을 다스려서, 신성한 아들신분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동물적 분노를 터뜨리는 경향으로부터, 안내자가 너희를 건져내는 아무 어려움이 없게 하라.
 
149:4.3 바로 기회에, 주님 균형_잡힌 성품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 관하여 무리에게 이야기했다. 어떤 직업에 숙련되기까지 몰두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예수께서 인정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전문화하고, 일생의 활동을 편협하게 만들고 제한하는 모든 경향에 대해 개탄했다. 어떤 미덕이든지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면 결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예수께서는 항상 절제를 설교했고, 일관성-- 삶의 문제를 균형 있게 조정하는 -- 가르쳤다. 과잉 동정심과 연민은 심각한 감정적 불안감으로 퇴보될지도 모르며; 열성이 광신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예수께서는 동역자들 가운데 하나에 관하여, 그의 상상력이 그를 몽상적이고 비실제적인 이행업무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고 언급했다. 동시에 예수께서는, 지나친 보수적 진부함은 둔감한 자가 되게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149:4.4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용기와 신앙이 때로는 어떻게 지각없는 혼들을 무모함과 억측으로 이끌어 가는지,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신중함과 분별력이 너무 지나치면, 그것들이 어떻게 비겁함과 실패로 이끌어 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듣는 이들에게, 정도{正道} 벗어나려는 모든 경향을 피하고, 독창성을 얻으려 애쓰라고 권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동정심과, 독실한 신자인 하지 않는 경건함을 지니라고 호소했다. 두려움과 미신에 매이지 않는 공경{恭敬} 가르쳤다.
149:4.5 동역자들에게 감명을 것은, 균형 잡힌 성품에 관하여 가르친 것보다는, 예수 생애 자체가 가르침의 감동적인 본보기였다는 사실이었다. 압박과 격동 한가운데서 살았으나,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적들은 계속해서 그의 앞에 덫을 놓았지만, 그는 결코 걸려들지 않았다. 교활하고 박식한 자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으나, 그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를 논쟁에 휩쓸어 넣으려고 했지만, 그의 대답은 항상 교화를 주고, 위엄 있고, 또한 확정적이었다. 여러 종류의 질문으로 말미암아 강론이 중단됐을 때에도, 그의 대답은 항상 의미심장하고 확실했다. 적들의 계속된 압력에 맞서면서, 그는 결코 비열한 전략을 동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을 써서 그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149:4.6 많은 남녀가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어떤 분명한 업무에 부지런히 힘써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대로, 인생에 대해 폭넓은 문화적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다. 진심으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동료들의 삶과 활동을 모르고 지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5. 만족에 대한 교훈
 
149:5.1 열심당 시몬 함께 일하던 전도자 집단을 예수께서 방문했을 , 저녁 회담 시간에 시몬 예수 질문했다: “어찌하여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행복하고 만족하는지요? 만족은 종교 체험의 문제인가요?”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예수께서 시몬 질문에 대답했다:
 
149:5.2 시몬, 어떤 사람은 천부적으로 남들보다 행복해 한다. 많은, 아주 많은 것이, 사람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영이 인도하고 지도하시는 것을 자신이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이는지에 달려있다. ‘사람의 영은 등불인데, 중심에 있는 모든 것을 살핀다’고 현자가 말을 너는 성서에서 읽지 않았느냐? 또한 그런 영으로 인도된 필사자들이 말했다: ‘나에게 줄로 재어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으니; 그렇다,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 ‘한 의인의 작은 재산이 여러 악인의 풍부한 재산보다 크다.’ ‘선한 사람은 자기 행위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빛나게 하고, 항상 잔칫날이다. 재물이 적어도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 채소를 먹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 ‘마음의 즐거움은 좋은 약이다.’ ‘한 움큼 밖에 없지만 평온한 것이, 남아돌지만 영이 슬프고 속상한 것보다 낫다.
149:5.3 “사람의 슬픔 대부분은,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자존심으로 상처 받는 데서 나온다. 세상에서 일생을 최대한 이용해야하는 것이 자신에게 의무일지라도, 이렇게 성실하게 힘쓴 뒤에,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자기 수중에 들어온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것이다. 사람의 허다한 근심거리는 모두, 자신의 평상시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토양에서 기원된다. ‘악인은 좇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악인은 요동치는 바다와 같으니, 잠잠할 없고, 물이 진창과 쓰레기를 밀어올리기 때문이며; 평강이 없음은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 말씀하신다.
149:5.4 “그러니, 거짓 평강과 일시적인 기쁨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에, 평강만족과 최상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신앙의 확신과 신성한 아들신분에 대한 보증을 찾아라.
149:5.5 예수께서는, 세상을 조금도 “눈물 골짜기”로 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오히려 낙원 상승을 이루는 영원하고 영생하는 영들이 탄생하는 장소, “혼을 만드는 골짜기”로 여겼다.
 
 
6. “주를 두려워함”
 
149:6.1 가말라에서 있었던 저녁 회담 시간에, 빌립 예수 말했다: 주님, 성서에서는 {}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는데,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두려움 없이 바라보라고 하시는지요? 우리가 교훈을 어떻게 조화시켜야합니까?예수께서 빌립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말씀했다:
 
149:6.2 “얘들아, 너희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는다. 처음에는 사람이 단지 두려움을 통해서 공경을 배울 있었지만, 내가 아버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상에 왔는데, 그리하여 너희가 아버지 깊고 완전한 사랑을 아들로서 다정하게 인식하고 그에 보답하도록 이끌어서, 영원자 경배하려는 마음이 너희에게 생기게 하려는 것이다. 노예근성의 두려움으로 너희를 몰아가서, 질투하고 분노하는 _하나님 따분하게 예배드리게 하는, 속박으로부터 너희를 구해주려고 한다. 나는 하나님 사람의 관계가 아버지_아들의 관계임을 일깨워서, 사랑 많고, 의롭고, 자비로우신 아버지_하나님, 숭고하고 탁월하게 자유로운 경배를 너희가 기쁨으로 드리게 하려고 한다.
149:6.3 “‘ 두려워하는 것’은 이어지는 여러 시대에 다른 의미를 가졌는데,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고통과 근심의 단계를 거쳐서 위엄과 공경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는 공경에서 시작하여, 인식깨달음과 감사함을 통해서 사랑 이르도록 너희를 인도하겠다. 사람이 하나님 업적만 알아볼 때에는 지존자 두려워하게 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과 성품을 비로소 이해하고 체험할 때에는, 점차로 그런 선하고 완전하고 보편적이고 영원하신 아버지 사랑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바로 사람과 하나님 관계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세상에서 사람의 아들 사명이다.
149:6.4 “총명한 자녀들은 아버지로부터 좋은 선물을 받을까 하여 그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물한 좋은 것들을 이미 풍성하게 받았으므로,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은, 그런 한량없는 은혜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감사함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 선하심은 회개로 이끌며; 하나님 은혜는 봉사로 이끌며; 하나님 자비는 구원으로 이끌며; 한편 하나님 사랑은 지성적이고 진솔한 경배를 드리도록 이끈다.
149:6.5 “너희의 선조는, 하나님 강력하고 신비로우시기 때문에 그분을 두려워했다. 너희는 하나님 충만한 사랑과 풍성한 자비와 영광스런 진리로 인해 그분을 흠모하게 것이다. 하나님 권능은 사람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인격의 고귀함과 의로움은, 공경과 사랑과 자발적인 경배를 초래한다. 본분을 지키고 애정 어린 자녀는, 아버지가 강력하고 고귀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는, 두려움 대신 사랑으로, 슬픔 대신 기쁨으로, 공포 대신 신뢰로, 노예근성의 굴종과 무의미한 예식 대신 사랑의 봉사와 감사의 경배로 바꾸려고 세상에 왔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있는 자에게는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하지만 빛이 더욱 완전하게 비췄을 , 하나님 자녀는 무한자 행하신 일로 인해 그를 두려워하기보다, 그가 어떤 이신가 인해 찬미할 마음이 생긴다.
149:6.6 “아이들이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에는, 부모를 존경하라는 훈계를 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부모의 봉사와 보호의 혜택을 고마워할 알게 때에는, 이해심에서 나오는 존경과 깊어지는 애정을 통해서, 실제로 부모가 행한 일보다는 그의 현존{現存}으로 인해 부모를 실제로 사랑하는 체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녀는 아버지가 무엇을 있는지 두려워하다가, 경외하고, 무서워하고, 의존하고, 존경하는 수준을 거쳐서, 사랑을 이해하고 깊이 존중하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한다.
149:6.7 “너희는 하나님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지니, 그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새롭고 높은 계명을 주러 왔다.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 사랑하고 그의 행하기를 배울지니, 그것이 하나님 해방된 자녀의 최고 특권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려한다. 너희의 선조는, 하나님-- 전능하신 -- 두려워하라’고 배웠다.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 완전히_자비로우신 아버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149:6.8 “나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러 왔는데, 거기는 높고 강력한 왕이 없으며; 나라는 {} 가족이다.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절대로 경배 받는 중심이시요 지성 존재들의 광범한 형제관계의 머리이신 분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시다. 내가 그분의 아들이며, 너희 또한 그분의 아들이다. 따라서 너희와 내가 하늘 신분에서 형제라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이며, 우리는 세상 생활에서도 육신의 형제가 됐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하나님 왕으로 두려워하거나 주인으로 섬기기를 그만 둬라; 그분을 창조주 공경하기를 배우며; 너희 미숙한 {} 아버지 예우하며; 자비로운 옹호자로 사랑하며; 궁극에는 너희의 성숙된 영적 깨달음과 감사함의 대상인, 사랑 많으시고 온전히_지혜로우신 아버지 경배하라.
149:6.9 하늘에 계신 아버지 대한 너희의 그릇된 관념들로부터, 잘못된 겸손 개념이 자라나고, 대부분의 위선이 생겨났다. 사람이 본질과 기원으로는 흙에서 나온 벌레 같을지 모르지만, 안에 아버지 영이 내재하게 , 사람의 운명은 신성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증여하시는 영은 신성한 근원, 기원된 우주 수준으로 확실히 돌아가며, 필사적 사람의 인간 혼은, 내주하는 영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자녀가 됐을 것이요, 신성한 영과 함께 혼은, 영원한 아버지 현존 바로 앞까지 틀림없이 상승할 것이다.
149:6.10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상승할 그런 모든 신앙 후보자에게 신성한 위엄이 덧붙여져 있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이런 모든 선물을 받은 필사적 사람에게는 정말로 겸손이 어울린다. 의미 없이 천박하게 거짓 겸양으로 허세부리는 버릇은, 구원의 근원을 이해하고 영으로 태어난 너희 혼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과 모순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함은, 너희의 마음 깊은 데서 하는 것이 아주 적절하며; 사람 앞에서 온순함은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자신을 의식하는 위선과 주의를 끌기 위한 겸양은 유치하고, 천국의 계몽된 자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149:6.11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사람 앞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너희의 온유함이 영적 기원에서 나오게 하고, 독선적 우월감을 의식하여 나타내는 자기_기만이 되지 않도록 해라. 선지자가 충고하기를, ‘겸손히 하나님 함께 걸으라’고 했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무한자시고 영원자시기 때문이며, 그는 또한 ‘통회하는 마음 그리고 겸손한 영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 자존심을 경멸하고, 위선을 싫어하고, 죄악을 혐오하신다. 성실의 가치를 강조하고, 하늘 아버지 사랑으로 지원하고 충실히 인도하심을 완전히 의지할 것을 강조하려고, 정신 태도와 반응을 보여주는 예로서 내가 무척 종종 어린아이를 언급했는데, 그런 태도와 반응은, 필사적 사람이 하늘 나라의 실체들 속으로 들어가는 아주 필요하다.
149:6.12 “선지자 예레미야 많은 필사자에 대해 서술하면서 말했다: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 가까우나, 마음 속에서는 멀리 있다.’ 그리고 너희는 또한 무서운 경고를 선지자의 말을 읽지 못했느냐?: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신앙심을 말하고, 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선포한다.’ 너희는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마음에는 악독이 있는’ 사람들과, ‘입으로는 아첨하나, 마음 속에서는 이중으로 거래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 받지 않았는가? 신뢰하는 사람의 모든 슬픔 가운데, ‘믿었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보다 지독한 것은 없다.
 
 
7. 벳새다로 돌아감
 
149:7.1 안드레, 시몬 베드로 상의하고 예수 승인을 받은 후에, 12 30 목요일 모든 사람이 여행을 끝내고 벳새다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내기 위하여, 전도하는 여러 집단에 심부름꾼을 파견하라고, 벳새다 있는 다윗에게 지시했다. 비가 오는 그날 저녁식사 시간까지, 모든 사도 일행과 전도자들이 세베대 집에 도착했다.
149:7.2 일행은 안식일까지 함께 있었고, 벳새다 가까이 있는 가버나움 여러 집에서 지냈으며, 후에 가족과 친구를 방문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도록 주일의 휴가가 일행 전체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벳새다에서 함께 지낸 이삼일은, 정말로 흥겹고 인상적인 날들이었으며; 선배 선생들조차 설교자들의 체험담을 통해서 교훈을 얻었다.
149:7.3 2 갈릴리 전도여행에 참가했던 117명의 전도자 중에서 75명만이 실제로 체험하는 시험을 통과했으며, 주의 휴가를 마치고 봉사에 배정될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요한 함께 세베대 집에 남았고, 천국의 복지와 확장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제148편 벳새다에서 전도자 훈련 ∥ 제150편 3차 전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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