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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8, 2019

예수의 행동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남을 저주하거나 욕되게 하는 말을 또는 욕설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욕을 하면 안 되나? 욕을 하면 지옥에 가게 되나?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욕을 하셨을까?
 
마태복음 2333절에 의하면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치셨다. 욕설처럼 들리지 않는가? 예수님 당시에 은 첫째로 지하세계의 악한 힘과 혼돈의 상징둘째로 다산(多産) 그리고 생명과 치유의 상징이었는데, 예수님은 첫째 의미로 말씀했음이 분명하며, 그들이 듣기에 명백한 욕설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137절 이하에 보면 화 있을찐저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바리새인을 비난했을 때, 이를 듣고 있는 사람 중 한 율법사가 나서서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라고 항의한 것으로 봐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은 그들에게 더욱 명백한 욕설이었을 것이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욕설을 하시다니...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욕설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
 
먼저, 그 대답은 욕설의 주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마태복음 71-6절의 기르침에 의하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상대방 눈의 티끌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알고 고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 눈의 들보를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느 경우가 정당한가? 비난받아 마땅한 경우는 어느 쪽인가?
 
다음으로, 욕설의 대상과 목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듣는 사람 전체에게 또는 아무에게나, 자기 분노 표출 방법으로 또는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욕을 퍼붓는 경우가 있는 반면, 오직 명백한 대상자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을 고치도록 자극하려는 충격요법의 목적으로 욕을 할 수도 있다. 둘 다 부당하다고 할 수 있나? 비난받아 마땅한 경우는 어느 쪽인가?
 
예수는 죄 없으신 분이므로,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욕을 하셨다면, 비난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완악함이 오죽했으면, 그리고 얼마나 그들을 깨우치고 싶었으면 그렇게까지 하셨겠는가...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뿐, 아직 완전한 의인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분명히 인식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의 목적으로 특정인에게 욕을 한다면 이 또한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지 않고도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욕먹은 이유는 이렇다: (마태복음 232)모세의 자리에 앉았음(심판 자리), (3)말만 하고 행치 않음, (4)책임을 전가하고 권리만 주장, (5-7)외식하고 교만하며 욕심과 야망으로 가득함, (34)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회개치 않음. 그러니 예수께 욕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은 욕먹기 전에 회개하고 고쳤어야만 했다. 35-36절은 욕을 먹고도 돌아서지 않을 때 일어나게 될 결과를 경고하고 있는데, 지난 2천 년 유대인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유대인 중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음에도 욕먹을 이유가 분명했고 욕을 먹고도 돌아서지 않았다면, 입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인 되었다 할지라도 그 이유만으로 그 대상에서 제외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 욕먹을 이유에서 더욱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tck

Sunday, December 1, 2019

예수의 행동 - "성전에서 외쳐 가라사대"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뜻과는 다르게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가? 예수께서 인간 육신 속에 있는 동안의 행동을 면밀히 들여다보자.
 
요한복음 7장에서 보면,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의 관념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였음에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혹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혹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임이 성경에 기록돼 있다고 주장했다. 43절은 이 문제로 인해 무리 중에서 쟁론이 일어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파마다 또는 지역이나 지파마다 주장이 달랐던 것 같다.
 
반면에 예수가 전하고자 하는 명백한 진리는 내가 그 존재다.”라는 것이었으며 유대인의 여러 주장과는 완전히 달랐다. 유대인의 주장은 우리에게 맞추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완고했다. 그럼에도 유대인 전통과 상식에 예수가 억지로 맞춰야 했나?
 
예수는 진리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헬라어 원어성경은 크라조라는 단어로 기록돼 있는데, “울부짖다. 고함치다. 소리 지르다.”라는 의미의 단어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라사대또는 말씀하셨다는 분위기와는 매우 다르다. 예수가 외친 내용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고함치듯 외쳐야만 했을까? 간단하고 단순한 것 같은 이 몇 마디 내용이, 예수께서 전파한 그 천국복음의 핵심이요 기초임을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더구나 그 장소가 어디였는가? 성전이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다. 유대인의 상식에서도, 그곳은 누구나 조용하고 침착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예수는 요한복음 216절 말씀에서 보듯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서 그렇게 했다. 왜 하필 성전에서 그래야만 했을까?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야말로 진리가 최고로 빛나야 할 곳이며 그 진리가 세상으로 퍼져나갈 중심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아들의 권리로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예수의 이 행동이 당시 유력한 유대인의 모든 전통과 상식 그리고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 분명했지만, 하나님 아버지 뜻에는 100%일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요구는 무엇인가? 교회와 그리스도인 자신의 보편적 전통과 상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그러한가? 만일 세상의 요구와 하나님의 뜻이 서로 다르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맞춰 행동할 것인가?
 
예수는 가르치기만 한 것 아니라 행동하셨다. 행동이 더 중요하고 더 의미심장할 수 있다. 예수의 행동에서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할 교훈은 세상의 요구보다 아버지의 뜻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행동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tck

Sunday, November 17, 2019

예수의 행동 - “제자들에게 물러 가라사대”

예수의 공적 사역이 거의 마무리 돼가면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 즉 사도들에게 질문하셨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예수의 행동이었다.
 
우리가 질문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내가 몰라서, 상대방이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또는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그리고 분명한 목적을 갖고 질문하셨다면 당연히 모든 성도에게도 똑같은 질문 하실 것인데,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돼있는가?
 
예수는 두 가지 질문을 하셨다. 첫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누구나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 말은 하기 쉽고 전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어서 다음 질문을 하셨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신앙 수준이 드러날 수 있고 잘못하면 책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급한 성격의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다.
 
예수께서 두 번째 질문을 먼저 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 주눅 들어서 베드로조차 고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은 두 번째 질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었고 진리가 아니었다. 성도가 신앙고백을 할 때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고 있다면,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만 고백하고 있다면, 시키는 대로 외우고 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평가했다. 그 순간에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진심과 판단에 의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기 입을 빌려드렸을 뿐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의 핵심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고백의 내용이 베드로라는 단어 즉 반석인 것이다. 누가복음 647-49에서 말씀하는 그 반석이다. 시몬 베드로라는 인간이 아니다! 참 신앙고백은 말로 하는 고백과 행동이 일치할 때 비로소 성립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다. 둘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에베소서 1220-22절에서 언급하는 모퉁이 돌이신 예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집이 지어져가야 함에도 2,000년의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는 참 신앙고백이 아니라 영웅적인 사람들과 세상의 세력 위에 세워져 왔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참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에게 천국열쇠를 맡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마태복음 2313-15절 말씀 그대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자도 막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천국 열쇠는 교회 소유가 아니라 참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 개인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모든 성도 각자는 다음 3가지 질문에 반드시 개인적으로 대답해야만 한다: “나도 천국 열쇠 맡았나?” “내가 열고 들어가고 있나?” “그들에게도 문을 열어주나?”tck

Sunday, November 10, 2019

예수의 행동 -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 쉬울까? 아니면 손가락으로 땅에 쓰는 것이 쉬울까? 요한복음 8장은 예수께서 후자의 행동을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 의미나 의도 또는 목적 없는 행동이었을까?
 
말과 글의 특징이 분명히 다르다. 말은 휘발성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없어지지만, 즉시성과 동시성이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기본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말은 상황에 따라 의미가 변하고 전파될수록 틀려지기 쉬우며 일단 말을 입 밖에 꺼내면 주워 담을 수 없다.
 
반면에 글의 특징은 불변성과 기록성이 뛰어나지만 순차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사전달의 2차적 수단으로 이용되나, 일관성과 보존성이 담보되고, 전파되기 전에 주워 담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간이 말씀 즉 진리를 만나면 숨겨졌던 죄가 드러나 심판 또는 정죄가 이뤄지게 되며, 거짓과 음모가 드러나게 돼 있다. 예수는 공생애 동안 어떤 개인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가룟 유다와 빌라도까지도 시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음을 복음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진실을 말로 전달하실 수 없는 경우들을 많이 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한복음 8장이 소개하는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음행 중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고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음행 또는 간음은 비밀리에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현장에서 잡힐 수 있을까? 미리 준비되고 계획된 연극일 가능성이 많지 않나?
 
아무튼, 모든 것을 아시는 창조주요 진리 자체이신 예수께서 그 사건의 진실을 말로 전달했다면 거짓과 음모가 공개되고 죄인에 대한 정죄와 심판이 즉시 이뤄졌을 것이며, 듣고 있던 무리들이 즉각 반응하여 본질을 오해하고 진실이 변질되기 쉬웠을 것이다. 군중심리가 작동됨으로써 개인의 양심이 억압되고 오히려 더 강퍅해짐으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로 전달한 예수의 행동의 예상되는 효력은 무엇일까? 첫째, 군중의 호기심을 유발함으로써 각자 스스로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둘째, 비공개 정죄를 통해 각자 자기 눈으로 읽고 자기 죄를 기억하게 했을 것이다. 셋째, 개인적인 양심을 자극함으로써 강제가 아닌 자발적 회개에 이르게 함으로써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게 했을 것이다. 넷째, 듣기는 순간적인 반면 여럿이 보기까지는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돌아선 자들이 자기성찰과 진리 발견의 기회를 갖게 됐을 것이다.
 
예수의 이 행동에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교훈을 마태복음 18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판단하기 전에 내 생각이 진리에 입각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개인에 대한 말이나 행동은 1:1로 직접 시작하고 하나님 뜻에 맞지 않음을 확신할 때에만 그리고 죄의 확산을 방지하는 목적이 분명할 때에만 공개해야 한다. 예수는 그렇게 하셨다.tck
 
예수의 행동을 본받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Sunday, November 3, 2019

예수의 행동 - "머물러 서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 했을 때 예수께서는 내가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하셨지만, 누가복음 1835-43절에서 소경이 외칠 때는 직접 가서 고쳐주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백부장이라고 특별대우 한 것일까?
 
이 사건의 결과로 소경이 눈을 뜨게 됐을 뿐 아니라 백성이 다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예수께서 직접 가는 대신 머물러 서서 사람을 보내 소경을 오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가서 고쳐주셨다면 당사자 한 사람이 혜택 받음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소경이 눈 뜨게 된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이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믿는 자 본인의 혜택과 쓰임 받은 자의 감동 그리고 백성에게 퍼져나가는 향기가 그것이다. 일석삼조의 효과로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머물러 서서그를 오게 하신 결과였으며 예수님의 의도적인 행동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출발점은 그 소경의 상황에 대한 관심과 질문에 있었다. 그는 상황 변화에 민감했고,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뻔뻔스러울 정도로 질문하기를 주저하기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평소에 갖춰지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구걸이나 하는 소망 없는 걸인이었음에도 이러한 자세를 소유했는데,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오늘날 주변상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며 또한 진실을 알고자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무관심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어도 여전히 진부하거나 뒷걸음질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에는 3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소경의 외침, 소경을 데려온 사람들의 역할, 그리고 그의 믿음과 예수의 말씀 등이 그것이다. 첫째, 소경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는 대신, 창조주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파악을 기초한 외침이었다. 둘째 요소는 인도자의 사명 즉 먼저 된 자의 역할이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는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스스로 용감하게 나서서 예수의 명령을 수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역사 현장에는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사람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며 위기 때마다 특히 그러하다. 이 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셋째로, 소경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예수의 말씀이 있었다. 주님 앞에 오기까지 그는 교만한 방해자들의 외침에 당당히 맞섰고 창조주의 능력과 은혜를 믿었으며 여러 가지 의심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의 체험에 대한 반응으로 주님을 좇아갔고 예수님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온전한 감사와 온전한 드림의 모범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보던 자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됐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소경이 눈을 뜨게 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과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며, 각 역할마다 똑같이 중요하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천국이 이 땅에도 이뤄지게 됨을, “머물러 서 소경을 데려오게 하신예수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tck

Sunday, October 27, 2019

예수의 행동 - "내가 가서"

마태복음 85-13절에는 로마 군인 백부장의 요청으로 그의 하인이 예수께 치유 받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상당히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이 누가복음 71-10절과 요한복음 443-54절에도 기록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두 가지 행동을 발견케 된다. 첫째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는 말에서 보듯 예수께서 직접 가서 고쳐주는 행동을 하고자 했다. 둘째는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는 말씀에서 보듯 예수께서는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말씀만 했는데 가려던 분명한 계획을 멈췄으니 이것 역시 예수의 행동에 해당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면 이 두 가지 행동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나? 대개 예수님이 직접 와서 고쳐주는 쪽이 더 큰 은혜와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면 예수의 두 가지 행동에 따른 결과를 살펴보자. 첫째,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는 약속대로 직접 가서 고쳐주셨다면 치유 받은 주요 원인은 무엇인가? 명백히, 백부장과 하인의 믿음(신앙)보다는 예수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치유 받은 결과로 그들에게 믿음(신앙)이 생기지 않았다면 죽은 후 그들 자신에게 남는 것은 없다. 둘째, 가시지 않고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가 치유 받았는데, 그것은 백부장의 믿음(신앙)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 믿음(신앙)은 그들에게 영원히 남게 되고, 그것이 바로 구원과 영생 및 천국성취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여러분에게 더 좋은가? 어느 쪽을 더 원하나? 어느 쪽이 구원과 영생에 가까운가?
 
이제 예수의 은혜와 예수의 바램을 예수의 행동에서 찾아보자. 먼저, 예수의 바램은 모든 인간이 올바른 믿음(신앙)의 주인공 되어 구원받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신앙이 확고할 때만 성취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신앙)이 이미 있음을 보셨기에, 그 잘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라고 기뻐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의 은혜는 직접 가서라도 그리고 믿음이 없더라도 고쳐주시기 원하는 것이다. 이 은혜 때문에 우리의 믿음(신앙)이 연약할 때에도 주님이 영으로 직접 와서 은혜를 베푸셨고 믿음과 신앙이 생겼으니 예수의 은혜 역시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의 은혜보다 예수의 바램 즉 내 믿음(신앙)으로 문제를 해결함(은혜 체험)에 있다.
 
백부장의 신앙이 주는 교훈에서 우리는 주님을 놀라실 만큼 기쁘시게 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다. 첫째, 그는 제자로 부름 받지 못했음에도 예수를 주님으로 모셨다. 백부장이지만 부하를 대하듯 요청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주님께 간구했다. 강요하거나 원망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셋째, 그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적 방법에 의존하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과는 달랐다. 넷째, 그는 의심없이 믿었다. 입으로만 믿거나 반신반의하며 믿지 않았다. 마태복음 1422-33절에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로 가다 물에 빠지게 될 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 받는 모습이 기록돼 있다. 예수님이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하는 순간에 백부장 마음속에 의심이 있었다면 그 의심대로 됐을 것이며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에게 주님의 은혜는 정말로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천국 성취 즉 구원 성취이며 예수님과의 만남이므로, “주님의 은혜보다 주님의 바램에 더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주님의 바램은 우리 신앙의 확고함을 보시는 것이며, 직접 보실 때마다 놀라고 기뻐하실 것이다.tck

Sunday, October 20, 2019

예수의 행동 - "얼굴을 땅에 대시고"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날 때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했던 예수께서는 땅을 향해서도 기도하셨다고 마태복음 2636-46절에 기록돼 있다. 마가복음 1435절과 누가복음 2241절에서도 예수의 기도하는 동일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서가 가장 자세하다(“...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마치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는 듯한 자세였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243-44절의 추가적인 상황 설명(“43.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으로 비춰볼 때 대단히 간절한 마음과 절박함 그리고 위기감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실 때는 이미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반면, 겟세마네에서는 아직 아버지의 뜻을 확증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도 혼란스런 상황이었던 것 같다.
 
이 때 예수의 기도 내용을 3가지 단어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잔은 진노의 잔(75:8,51:22-23,25:15,5:13,7:8-9,9:8-9,23:31)인 동시에 구원의 잔(116:13)을 의미한다. 둘째, “마심이란 홀로 감당함 그리고 완결지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이 잔을 마심으로써 가룟 유다의 구원 가능성을 종결되고 그의 배반으로 말미암는 멸망이 확정되는 것이며 온 인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가 완성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크게 고민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셋째, “지나감은 다른 때 또는 다른 방법을 기다릴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행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한탄하실 정도로, 선택된 제자들마저 전혀 준비되지 않은 현실 때문에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자신의 세상 만족이나 성공이 아니라 심판과 구원의 완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단코! 인자로서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예수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있고 또한 기도해야 한다. 우리도 하늘을 보며 기도하고 땅을 행해서도 기도한다. 그런데 하늘을 보며 기도할 때, 예수가 하시던 것처럼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있나? 빌립보서 46-7(“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처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이미 응답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하늘을 우러러 감사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이 때에도 의심하며 떼를 쓰듯 욕심으로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도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가 기도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 그리고 구원의 완결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버지의 뜻을 확신하지 못하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 또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일 수밖에 없다(마태복음 67절 참조). 그러나 아직 확신 없이 기도하더라도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가 그 기도의 결론이고 진심이라면 어떤 기도든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다. 예수처럼 그렇게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방법으로 반드시 더 좋은 결과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tck

Sunday, October 13, 2019

예수의 행동 - "보았노라"

누군가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요한복음 143-51절은 안드레 베드로를 통해 빌립이 먼저 예수를 만나고, 메시야임을 알게 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기록하고 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를 부인하지만 빌립의 강권함으로 예수께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씀에서,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도 다 보고 계셨고 다 알고 계셨던 예수의 행동을 발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주님은 나를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다.
 
여기서 예수의 행동의 초점은 자신의 호기심 만족, 심판하기 위한 준비, 자기 뜻대로 조종, 세상 성공 비법을 수여함으로써 이용하기 등에 있지 않고 온전히 하늘 나라에 맞춰져 있었다. , 천국에 합당한 또는 합당하게 변화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국에 합당한 사람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이유로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음을제시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의미하므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인데, “그 속에 간사함이 없음이 평가 기준이다.
 
간사함이라는 단어는 미끼에서 유래됐는데, (,행동)과 속(마음,생각,계획,지식,목적 등)이 다름을 의미한다. 몸은 있으나 마음이 딴 곳에 있는 사람, 현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 미래의 계획과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 지식은 많이 담고 있지만 삶의 태도가 그 지식과 상관없는 사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사악한 방법을 거리낌 없이 동원하는 사람 등이 간사한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16-18, 23:13-16에서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경고의 말씀을 주신다.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완전한 인격체나 도덕군자가 이미 됐다거나 100% 말씀을 준행하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겉과 속이 같기만 하면 누구나 나다나엘과 똑같은 평가를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천국에 합당한 참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수는 반드시 더 큰 것을 보여주신다.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맛을 보게 하고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를 달성하도록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불평불만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항상 보고 계시고 특별히, 천국에 합당한 사람에게 항상 관심을 두시기 때문이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록 깨어 기도하며 변화되는 만큼 영광과 기쁨을 주님께 드리는 성도가 될 것이다.tck

Sunday, October 6, 2019

예수의 행동 -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마가복음 1013-16절에서 두 가지 핵심 단어를 꼽는다면 어린아이들안아주심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의 조건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건이 마태복음 19:13-15 누가복음 18:15-17에 기록돼 있지만 마가복음과는 달리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신 예수의 행동이 빠져있다. 아이들이 예수 앞으로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았는데 이것은 어린아이들을 인구조사에서 제외할 정도로 경시한 유대인 정서 때문이었다. 당시에 마가 역시 소년이었으므로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는 예수의 행동에 감격하여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어른인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예수께서는 오히려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게다가 아이들을 품에 안아주기까지 했다.
 
안아주심은 용납, 보호, 공유, 그리고 하나 됨 등을 의미할 수 있다. 대상은 어른 또는 제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단지 어리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천국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천국 소유자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어린아이 같은 제자가 돼야만 한다. 그리고 천국 소유자는 창조주 예수님이 직접 안아주신다.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은 나는 예수께 어린아이 같은 참 제자인가? 아니면 어른 즉 명목상 제자인가?”하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참 제자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첫째 순수함이다. 세상의 야망과 권모술수 등의 때가 묻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아이 같은 제자란 자기 야망과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 또는 천국복음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310-11(“10.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을 보면, 예수께서 직접 택하신 사도들 중에도 순수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다.
 
둘째, 어린아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지한다.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제자란 자기 능력을 과시하지 않는 즉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셋째, 어린아이는 자신의 참 부모 또는 보호자를 알아보고 오직 그에게만 의존한다. 어린아이 같은 제자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원한 참 아버지이심을 알고 의존하며 세상의 피조물이나 체제에 의존치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962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라고 선언한다.
 
넷째, 어린아이는 받은 은혜에 만족하고 기억하며 감사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같은 제자는 끝없는 요구, 욕심과 야망, 불만족, 불평, 원망, 배반 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1817절에서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한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는 인생 되지 말아야만 할 것을 예수께서 행동으로 어린아이들을 안아줌으로 보여주셨다. 누구든 천국을 소망한다면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가 돼야 할 것이다. 순교 당하던 스데반이 봤던 것처럼(사도행전 7:55-56), 품에 안아주시려 두 팔 벌리고 있는 창조주를 바라보자!t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