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우주성(宇宙性)
'하나님'이 '유일하신 만유의 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만약에 어느 일부분이라도 그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게 된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영의 세계는 물론이지만 물질적인 세계 즉 우주 역시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선포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증언하였다. 그러한 완전하고도 무한하며 영원하고 절대적인 그 중심적 실존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우주 즉 이 물질세계 안에 지구 외에 어떤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세계들 역시 '하나님'께로 집중되는 것이 마땅하다. 범위를 더 좁혀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들도 그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 한다. 생물체거나 무생물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것들의 존재 의미와 생명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 또는 '보편적인 하나님'이시다.
범위를 더 좁혀들어 간다면, 인간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모든 활동들 역시 그 중심이 되셔야만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중심을 그 '하나님'께 둘 때 의미가 있고 생명과 질서가 있게 될 것이다. 중심을 벗어나면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음과 무질서가 있게 될 것이다.
이 지구 위에서의 인류 역사 속에 왜 그토록 많은 혼란과 갈등과 투쟁이 존재해 왔는가?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현상들 중 하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많은 종교들이 오늘날 서로 싸우며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모습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각 종교마다 서로 다른 중심에 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등한 위치에 그 중심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러한 그들 각 종교의 사고가 진리라면, 앞에서 범위를 좁혀 들어왔던 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때, 보이는 세계는 물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하는 전체 속에 대등한 위치의 중심들이 실존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만약에 그것이 진리라면, 이 우주 만물은 대등한 위치의 실체들의 갈등과 분란의 산물이 되어야 마땅하다. 영어로 '우주'를 가리키는 'cosmos'는 '질서'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 '우주'의 본질적인 조건은 '질서'이다. '질서'가 없다면 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각 종교가 서로 다른 중심에 서고자 하는 그러한 태도는 분명히 '진리'가 아니다. 각자의 망상과 허구 속에서 주장하는 '공허한 말들의 모음' 또는 전통이나 관습에 불과하다.
완전한 '진리' 탐구의 입장에서 볼 때, 이제 모든 인류에게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완전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그 실존 본체로써의 '신(神)'을 발견해야만 할 때이다. '여호와'는 유대인들의 '신(神)'이고,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신(神)'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한다면, 모든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분을 "아버지"라고 계시하였다. 아마도 그 당시 각 종족들을 총망라하는 인간의 사고 속에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개념들 중에서 '그 분'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아버지"라는 단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어느 문화든지 어느 언어든지 거의 완전하게 동일한 어떤 의미를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라는 단어는 각 종교들에서 인간의 입장에서 지어 불러 온, 서로 다른 '신(神)의 명칭'을 초월하는 의미를 제시하는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계시하신 "아버지"는 "보편적인 아버지" 또는 "우주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신격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께로 사고와 삶의 영역을 확대시켜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세상에 대해 열심히 싸우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였다. 예수께서 "아버지"로 계시하신 의도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였을 것이다.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들 역시, 지금까지 수고하고 애씀으로써 이루어 온 모든 지식과 경험들을 총 동원하여 그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모든 주권을 돌려드릴 때, 비로소 참 진리가 빛을 발하고, 모든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며, 모든 죽음의 세력들 및 현상들이 생명의 세력들과 현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바뀌는 만큼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의 실체가 인간의 눈 앞에도 드러나게(계시되게) 될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참 '진리'를 탐구하는 진지한 탐구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그 영향력이 확장되는 만큼 그 날은 가까이 이르게 될 것이다.(K)
'하나님'이 '유일하신 만유의 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만약에 어느 일부분이라도 그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게 된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영의 세계는 물론이지만 물질적인 세계 즉 우주 역시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선포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증언하였다. 그러한 완전하고도 무한하며 영원하고 절대적인 그 중심적 실존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우주 즉 이 물질세계 안에 지구 외에 어떤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세계들 역시 '하나님'께로 집중되는 것이 마땅하다. 범위를 더 좁혀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들도 그 '하나님'께로 집중되어야 한다. 생물체거나 무생물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것들의 존재 의미와 생명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 또는 '보편적인 하나님'이시다.
범위를 더 좁혀들어 간다면, 인간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모든 활동들 역시 그 중심이 되셔야만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중심을 그 '하나님'께 둘 때 의미가 있고 생명과 질서가 있게 될 것이다. 중심을 벗어나면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음과 무질서가 있게 될 것이다.
이 지구 위에서의 인류 역사 속에 왜 그토록 많은 혼란과 갈등과 투쟁이 존재해 왔는가?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현상들 중 하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많은 종교들이 오늘날 서로 싸우며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모습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각 종교마다 서로 다른 중심에 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등한 위치에 그 중심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러한 그들 각 종교의 사고가 진리라면, 앞에서 범위를 좁혀 들어왔던 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때, 보이는 세계는 물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하는 전체 속에 대등한 위치의 중심들이 실존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만약에 그것이 진리라면, 이 우주 만물은 대등한 위치의 실체들의 갈등과 분란의 산물이 되어야 마땅하다. 영어로 '우주'를 가리키는 'cosmos'는 '질서'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 '우주'의 본질적인 조건은 '질서'이다. '질서'가 없다면 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각 종교가 서로 다른 중심에 서고자 하는 그러한 태도는 분명히 '진리'가 아니다. 각자의 망상과 허구 속에서 주장하는 '공허한 말들의 모음' 또는 전통이나 관습에 불과하다.
완전한 '진리' 탐구의 입장에서 볼 때, 이제 모든 인류에게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완전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그 실존 본체로써의 '신(神)'을 발견해야만 할 때이다. '여호와'는 유대인들의 '신(神)'이고,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신(神)'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한다면, 모든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분을 "아버지"라고 계시하였다. 아마도 그 당시 각 종족들을 총망라하는 인간의 사고 속에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개념들 중에서 '그 분'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아버지"라는 단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어느 문화든지 어느 언어든지 거의 완전하게 동일한 어떤 의미를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라는 단어는 각 종교들에서 인간의 입장에서 지어 불러 온, 서로 다른 '신(神)의 명칭'을 초월하는 의미를 제시하는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계시하신 "아버지"는 "보편적인 아버지" 또는 "우주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신격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께로 사고와 삶의 영역을 확대시켜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세상에 대해 열심히 싸우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였다. 예수께서 "아버지"로 계시하신 의도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였을 것이다.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들 역시, 지금까지 수고하고 애씀으로써 이루어 온 모든 지식과 경험들을 총 동원하여 그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모든 주권을 돌려드릴 때, 비로소 참 진리가 빛을 발하고, 모든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며, 모든 죽음의 세력들 및 현상들이 생명의 세력들과 현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바뀌는 만큼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의 실체가 인간의 눈 앞에도 드러나게(계시되게) 될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참 '진리'를 탐구하는 진지한 탐구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그 영향력이 확장되는 만큼 그 날은 가까이 이르게 될 것이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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