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와 개념
단어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개념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그 개념을 대표할 수는 없다. 언어의 제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 정신의 다양함 또는 심오함 때문이기도 하다. 의사소통을 위하여 '언어'라는 수단이 필수불가결하지만, 그 제한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원래 목적인 의사소통에 오히려 방해를 받고 더 나아가 어떤 심각한 갈등들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실제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로 말미암아 정신에 떠오르는 '개념 전체'이다. 단어는 그 개념 전체를 대표하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상대방에게 그 사람 나름대로의 어떤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통로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단어는 허상이고 실체는 바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개념 전체'이다. 수단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동일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떠오르는 '개념'은 어떤 두 사람에게도 똑같을 수 없다. 그 사람이 타고난 천성과 자라온 환경과 문화적 배경 등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의 숫자의 요소들 때문에 그 '개념' 전체성은 개인마다 특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어렸을 때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를 경험한 '갑'이라는 사람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그 '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아버지'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무관심하고 때로는 폭력도 일삼는 아버지를 경험한 '을'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갑'이라는 사람과는 상당히 다를 것임이 분명하다. 이 '을'이라는 사람은 아무리 '아버지'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간다 하더라도, 그 정신 속에 이미 각인된 이미지는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생 경험을 통하여 그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또 상처를 치유 받았다 하더라도, 그 경험의 영향력마저 완전히 바뀌어 '갑'이라는 사람과 '아버지'라는 단어에 대한 똑같은 '개념 정의'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회성과 보편적 언어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단어들에 대한 각 사람의 '개념 정의'의 독특성과 다양성 그리고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의 '개념 정의'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동일한 '개념 정의'를 요구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나는 나의 깨달음에 대해 '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상대방에게도 똑같은 'A'라는 단어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그 'A'라는 단어만을 통해서 나의 '개념 정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독교에서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홍같이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하신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정작 양을 직접 키우는 목동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 어떤 동물들보다도 양이 가장 더러운 동물이고, 그 털은 어느 동물의 털보다도 더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깨끗하다"는 '개념 정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양털"이라는 단어 대신 전혀 다른 단어를 써야만 된다는 것이다. "죄를 흰 눈 같이 씻어주신다"는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눈을 직접 볼 수 있는 지역의 주님들은 이해가 되지만, 눈을 평생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인 것이다. 전달해야 할 '개념 정의'가 '단어'라는 수단보다 더 중요하다면, '단어'는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함을 인정한다면, 그에 합당한 어떤 도구 또는 수단이 강구되어야만 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타문화 속에서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발전시켜왔고 성과를 거두어 왔다.
"문화의 차이"를 생각할 때, "하늘 나라의 문화"와 "이 세상의 문화"는, 물론 하늘 나라에 대해 인간적 언어인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가장 발전된 문화권과 가장 낙후된 문화권 사이의 차이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하늘의 존재들이 그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가장 근접된 인간의 '단어'를 채택하여 계시를 주겠지만, 그러나 계시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배경을 가진 인간이 과연 그 참 뜻, 그 '개념 정의'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계시된 한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잘못된 개념을 바로잡거나 청소하면서 바른 이해를 천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통해 얻기 위해서는...
그런데 인간들은 서로 자신의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어떤 '단어'를 고집하면서 상대방에게 강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진리를 깨달았다" "하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 강도가 더 심해진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바른 태도일까? 칭찬받을만한 태도일까? 좀 더 상대방의 지나온 과거 속에서의 바탕을 이해하면서 그에게 더 적합한 '개념 정의'를 전달하기 위하여 참고 인내하며 나를 희생하는 아픔을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늘의 지혜를 구하면서 겸손함으로 부단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노력할 수는 없는 것인가?(K)
단어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개념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그 개념을 대표할 수는 없다. 언어의 제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 정신의 다양함 또는 심오함 때문이기도 하다. 의사소통을 위하여 '언어'라는 수단이 필수불가결하지만, 그 제한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원래 목적인 의사소통에 오히려 방해를 받고 더 나아가 어떤 심각한 갈등들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실제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로 말미암아 정신에 떠오르는 '개념 전체'이다. 단어는 그 개념 전체를 대표하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상대방에게 그 사람 나름대로의 어떤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통로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단어는 허상이고 실체는 바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개념 전체'이다. 수단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동일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떠오르는 '개념'은 어떤 두 사람에게도 똑같을 수 없다. 그 사람이 타고난 천성과 자라온 환경과 문화적 배경 등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의 숫자의 요소들 때문에 그 '개념' 전체성은 개인마다 특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어렸을 때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를 경험한 '갑'이라는 사람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그 '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아버지'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무관심하고 때로는 폭력도 일삼는 아버지를 경험한 '을'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갑'이라는 사람과는 상당히 다를 것임이 분명하다. 이 '을'이라는 사람은 아무리 '아버지'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간다 하더라도, 그 정신 속에 이미 각인된 이미지는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생 경험을 통하여 그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또 상처를 치유 받았다 하더라도, 그 경험의 영향력마저 완전히 바뀌어 '갑'이라는 사람과 '아버지'라는 단어에 대한 똑같은 '개념 정의'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회성과 보편적 언어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단어들에 대한 각 사람의 '개념 정의'의 독특성과 다양성 그리고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의 '개념 정의'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동일한 '개념 정의'를 요구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나는 나의 깨달음에 대해 '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상대방에게도 똑같은 'A'라는 단어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그 'A'라는 단어만을 통해서 나의 '개념 정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독교에서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홍같이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하신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정작 양을 직접 키우는 목동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 어떤 동물들보다도 양이 가장 더러운 동물이고, 그 털은 어느 동물의 털보다도 더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깨끗하다"는 '개념 정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양털"이라는 단어 대신 전혀 다른 단어를 써야만 된다는 것이다. "죄를 흰 눈 같이 씻어주신다"는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눈을 직접 볼 수 있는 지역의 주님들은 이해가 되지만, 눈을 평생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인 것이다. 전달해야 할 '개념 정의'가 '단어'라는 수단보다 더 중요하다면, '단어'는 그저 단순한 수단에 불과함을 인정한다면, 그에 합당한 어떤 도구 또는 수단이 강구되어야만 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타문화 속에서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발전시켜왔고 성과를 거두어 왔다.
"문화의 차이"를 생각할 때, "하늘 나라의 문화"와 "이 세상의 문화"는, 물론 하늘 나라에 대해 인간적 언어인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가장 발전된 문화권과 가장 낙후된 문화권 사이의 차이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하늘의 존재들이 그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가장 근접된 인간의 '단어'를 채택하여 계시를 주겠지만, 그러나 계시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배경을 가진 인간이 과연 그 참 뜻, 그 '개념 정의'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계시된 한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잘못된 개념을 바로잡거나 청소하면서 바른 이해를 천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통해 얻기 위해서는...
그런데 인간들은 서로 자신의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어떤 '단어'를 고집하면서 상대방에게 강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진리를 깨달았다" "하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 강도가 더 심해진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바른 태도일까? 칭찬받을만한 태도일까? 좀 더 상대방의 지나온 과거 속에서의 바탕을 이해하면서 그에게 더 적합한 '개념 정의'를 전달하기 위하여 참고 인내하며 나를 희생하는 아픔을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늘의 지혜를 구하면서 겸손함으로 부단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노력할 수는 없는 것인가?(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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