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과 '하나님 나라'
(1) 우주관의 의미
우주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참조: 오토 J. 바압, 구약성서신학, p.24.)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심각한 문제였으며, 철학자가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추구해 왔다. 문제는 그가 그 목적에 대해서 날카롭게 자각하였느냐, 아니면 희미하게 그저 지나쳐 가는 생각으로 삼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진실되게 탐구하려는 노력이 신학 또는 철학에 의해 표현되었다. 원시 종교들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본다면, 인간 내면 세계에 대한 문제와 자연 및 우주 현상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주에 관한 연구였다. 인간 내면의 세계 즉,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사후의 존재에 관한 것이라든가 하는 문제들도 우주적인 개념에 비추어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고 있으며, 문서설에서 구약성경 기록의 배경이었다고 성경 비평학에서 이야기하는(참조: 김정준, 율법서 예언서 연구, (서울: 한국신학 연구소, 1991) p.41
“성서 해석에 역사비평, 문학비평, 본문비평 등 비평학을 용인하는 성서학자들은 창조설화가 두 개로 기록된 역사적 사정과 신학적 사정이 각각 있었기 때문에 창조라는 한 가지 사건의 강조가 아니라 창조설화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바벨론에도 분명한 우주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경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은 민족들의 설화를 볼 때, 그 속에도 나름대로 우주적인 어떤 개념이 들어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밖의 어떤 세상을 동경하면서, 자기 민족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인류와 우주의 관계는 인간 사고 속에서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즉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니 창조된 우주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깊은 것이다. 물론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시려는 목적에서 이 우주가 필요하게 되었겠지만, 하나님과 우주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할 것이요, 우주에 대한 추구가 없다면 천국에 대한 집착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분명히 공간적인 제약속에서 활동하셨으며, 부활하신 모습은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속에서 인간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승천하시는 모습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공간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않았다.(사도행전 1:9 참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참조: 인류가 살고 있는 태양계만이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범주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의 우주 즉,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2 에서 말하고 있는 세째 하늘까지도 포함한 개념) 밖에 또 다른 어떤 공간이 있어서, 이곳과 그곳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는 분명히 인류의 구원에 대한 섭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우주에 대한 개념 없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수 없으며, 반면에 우주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인간의 해석 능력도 확대되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확대된 계시도 더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감정 그리고 지성과 철학에 기초하는 종교들은 ‘지성적인 종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참 종교’는 아니다. 궁극적인 실체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뿐이며, 영적인 경험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하나의 도덕률에 불과할 것이다. 참 종교는 개인의 궁극적인 운명이 확실히 성취되는 것이어야 하며, 우주적인 실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지성적 종교’가 아니라 ‘참 종교’이다. 우주 속에서 궁극적으로 추구되는 실체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확실히 계시되었고, 말씀으로 ‘계셨던’ 즉,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즉 확실한 실체로써 인간과 함께 존재하셨으며,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고’ 즉 지금이나 영원히 존재하시고 있으며, 구원얻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수와 함께 ‘있게’된다는 것은 우주성과 실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복음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2) 신약 시대의 우주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전된 점성술은 고대로부터 별들과 유성들의 정연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에서 파생되어 나타난 것으로써, 별들이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사람이 태어난 때의 별들의 배치 상태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별의 영을 이해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별이 곧 신이라는 플라톤의 믿음은 점성술적인 사변과 희랍 철학의 전통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고, 헬라의 다른 철학자들은 점성술과 수학을 결합시킴으로써 별들의 움직임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다.(참조: 하워드 클락 키이, 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43-44.) 그 결과 헬라 제국의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의 사람들은 별들의 힘을 두려워하였으며, 별의 영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영혼의 비밀을 배우려는 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 길을 통해서만 별들에 의해 점지된 사람들의 운명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으며, 하늘에 대한 신령한 지식을 갖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영지주의’의 토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영지주의가 A.D.100년 이후의 후기에 이르러 많은 신비 종교들과 신화들을 끌어들이고, 이방의 모든 종교 예식들을 흡수하는 혼합주의에 빠진 것은 이러한 그들의 사상적 출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 교회가 확실한 형태를 갖추기까지 이스라엘 및 근동의 일반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영지주의적 요소들은 초기 기독교의 사상과도 매우 유사하였으므로, 크게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참조: Pheme Perkins, Gnosticism and the New Testamen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p.53)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신비적 요소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며, 우주적인 천국의 개념과 현세에서의 복음의 역할에 대하여 이 점성술 또는 당시 우주관이 일조를 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신비 종교들이 신약 시대에 근동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배타적인 그들의 성향 때문에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시스와 오리시스 신에 대한 신화가 이집트에서 전해내려 왔는데, 이것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주후 2세기 초에는 신비주의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플루타크에 의해 찬미를 받을 정도였다. 헬라 문화권에는 신화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신비적 제의가 행해졌으며, 정치권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는 등, 단순한 계절적 축제의 개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특히 당시에 핍박받는 하층민들과 노예들 속에서는 하나의 도피처 역할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상류 계층의 사람들도 불확실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여 안정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신비 종교로 몰려들었다.
(3) 예수의 우주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하여 근동의 세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한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메시야를 고대하는 마음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공통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헬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들을 배경으로 하는 신비주의 종교들에서도 어떤 강력한 왕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으며, 특별히 유대인들 중에서 선지서들을 믿었던 평민 또는 하층민들은 그 날을 무척 고대하였다. 여러 차례의 혁명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러한 메시야사상을 널리 전했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Suetonius는 이에 대하여 “유대에서 한 왕이 나타나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예언이 동방에 널리 퍼져있다.”고 기록하였으며, Tacitus는 “동방이 강력해지고, 유대로부터 한 지배자가 나와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던 점성술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학과 과학 또는 의학과도 연관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뛰어난 사람은 일반인들에게 크게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오늘날의 미신적인 개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동방으로부터의 별과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추측하기를, 기원전11년에 핼리혜성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며, 기원전7년에는 Saturn과 Jupiter가 거의 일직선에 놓였을 것이므로 밝게 빛났을 것이라고 하며, 기원전5년에서 기원전6년 사이에 특이한 현상이 천체에 벌어졌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의 점성가들은 매우 흥분하였을 것이며, 어떤 위대한 왕이 출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신비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하여 당시의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지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우주의 현상과 현세를 연결시키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한 배경에 마추어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의 범위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탄생 자체가 우주와의 어떤 관련성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속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하늘에 “계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늘에”라는 공간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셨으며, 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 속에서도 공간적인 의미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개념적인 철학적 의미만의 신 개념이나 천국 개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개념들을 오로지 철학적인 관념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예수는 분명히 그 당시 우주관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천국관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개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확실한 경험적인 것이었다. 예수가 인간과 다른 점들 중에서 한 가지는 자신의 출처와 돌아갈 장소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인간이 그 당시의 우주관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전하셨을 가능성도 있으며, 아니면 그 제한 때문에 어떤 가르침도 줄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확실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에도 예수의 말씀들을 그대로 기록한 부분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전해지는 예수에 관한 기사들을 토대로 하고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고 그의 유대교적 배경과 심오한 지식을 소화시켜서 예수의 복음을 재해석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바울의 복음이라는 창을 통하여 복음서들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우주관을 토대로 하여 예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노력을 하고자 할 때는 직접적으로 복음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예수의 천국관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1) 우주관의 의미
우주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참조: 오토 J. 바압, 구약성서신학, p.24.)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심각한 문제였으며, 철학자가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추구해 왔다. 문제는 그가 그 목적에 대해서 날카롭게 자각하였느냐, 아니면 희미하게 그저 지나쳐 가는 생각으로 삼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진실되게 탐구하려는 노력이 신학 또는 철학에 의해 표현되었다. 원시 종교들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본다면, 인간 내면 세계에 대한 문제와 자연 및 우주 현상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주에 관한 연구였다. 인간 내면의 세계 즉,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사후의 존재에 관한 것이라든가 하는 문제들도 우주적인 개념에 비추어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고 있으며, 문서설에서 구약성경 기록의 배경이었다고 성경 비평학에서 이야기하는(참조: 김정준, 율법서 예언서 연구, (서울: 한국신학 연구소, 1991) p.41
“성서 해석에 역사비평, 문학비평, 본문비평 등 비평학을 용인하는 성서학자들은 창조설화가 두 개로 기록된 역사적 사정과 신학적 사정이 각각 있었기 때문에 창조라는 한 가지 사건의 강조가 아니라 창조설화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바벨론에도 분명한 우주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경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은 민족들의 설화를 볼 때, 그 속에도 나름대로 우주적인 어떤 개념이 들어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밖의 어떤 세상을 동경하면서, 자기 민족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인류와 우주의 관계는 인간 사고 속에서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즉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니 창조된 우주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깊은 것이다. 물론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시려는 목적에서 이 우주가 필요하게 되었겠지만, 하나님과 우주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할 것이요, 우주에 대한 추구가 없다면 천국에 대한 집착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분명히 공간적인 제약속에서 활동하셨으며, 부활하신 모습은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속에서 인간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승천하시는 모습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공간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않았다.(사도행전 1:9 참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참조: 인류가 살고 있는 태양계만이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범주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의 우주 즉,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2 에서 말하고 있는 세째 하늘까지도 포함한 개념) 밖에 또 다른 어떤 공간이 있어서, 이곳과 그곳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는 분명히 인류의 구원에 대한 섭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우주에 대한 개념 없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수 없으며, 반면에 우주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인간의 해석 능력도 확대되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확대된 계시도 더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감정 그리고 지성과 철학에 기초하는 종교들은 ‘지성적인 종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참 종교’는 아니다. 궁극적인 실체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뿐이며, 영적인 경험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하나의 도덕률에 불과할 것이다. 참 종교는 개인의 궁극적인 운명이 확실히 성취되는 것이어야 하며, 우주적인 실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지성적 종교’가 아니라 ‘참 종교’이다. 우주 속에서 궁극적으로 추구되는 실체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확실히 계시되었고, 말씀으로 ‘계셨던’ 즉,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즉 확실한 실체로써 인간과 함께 존재하셨으며,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고’ 즉 지금이나 영원히 존재하시고 있으며, 구원얻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수와 함께 ‘있게’된다는 것은 우주성과 실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복음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2) 신약 시대의 우주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전된 점성술은 고대로부터 별들과 유성들의 정연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에서 파생되어 나타난 것으로써, 별들이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사람이 태어난 때의 별들의 배치 상태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별의 영을 이해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별이 곧 신이라는 플라톤의 믿음은 점성술적인 사변과 희랍 철학의 전통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고, 헬라의 다른 철학자들은 점성술과 수학을 결합시킴으로써 별들의 움직임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다.(참조: 하워드 클락 키이, 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43-44.) 그 결과 헬라 제국의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의 사람들은 별들의 힘을 두려워하였으며, 별의 영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영혼의 비밀을 배우려는 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 길을 통해서만 별들에 의해 점지된 사람들의 운명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으며, 하늘에 대한 신령한 지식을 갖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영지주의’의 토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영지주의가 A.D.100년 이후의 후기에 이르러 많은 신비 종교들과 신화들을 끌어들이고, 이방의 모든 종교 예식들을 흡수하는 혼합주의에 빠진 것은 이러한 그들의 사상적 출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 교회가 확실한 형태를 갖추기까지 이스라엘 및 근동의 일반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영지주의적 요소들은 초기 기독교의 사상과도 매우 유사하였으므로, 크게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참조: Pheme Perkins, Gnosticism and the New Testamen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p.53)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신비적 요소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며, 우주적인 천국의 개념과 현세에서의 복음의 역할에 대하여 이 점성술 또는 당시 우주관이 일조를 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신비 종교들이 신약 시대에 근동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배타적인 그들의 성향 때문에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시스와 오리시스 신에 대한 신화가 이집트에서 전해내려 왔는데, 이것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주후 2세기 초에는 신비주의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플루타크에 의해 찬미를 받을 정도였다. 헬라 문화권에는 신화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신비적 제의가 행해졌으며, 정치권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는 등, 단순한 계절적 축제의 개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특히 당시에 핍박받는 하층민들과 노예들 속에서는 하나의 도피처 역할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상류 계층의 사람들도 불확실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여 안정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신비 종교로 몰려들었다.
(3) 예수의 우주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하여 근동의 세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한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메시야를 고대하는 마음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공통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헬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들을 배경으로 하는 신비주의 종교들에서도 어떤 강력한 왕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으며, 특별히 유대인들 중에서 선지서들을 믿었던 평민 또는 하층민들은 그 날을 무척 고대하였다. 여러 차례의 혁명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러한 메시야사상을 널리 전했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Suetonius는 이에 대하여 “유대에서 한 왕이 나타나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예언이 동방에 널리 퍼져있다.”고 기록하였으며, Tacitus는 “동방이 강력해지고, 유대로부터 한 지배자가 나와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던 점성술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학과 과학 또는 의학과도 연관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뛰어난 사람은 일반인들에게 크게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오늘날의 미신적인 개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동방으로부터의 별과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추측하기를, 기원전11년에 핼리혜성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며, 기원전7년에는 Saturn과 Jupiter가 거의 일직선에 놓였을 것이므로 밝게 빛났을 것이라고 하며, 기원전5년에서 기원전6년 사이에 특이한 현상이 천체에 벌어졌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의 점성가들은 매우 흥분하였을 것이며, 어떤 위대한 왕이 출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신비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하여 당시의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지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우주의 현상과 현세를 연결시키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한 배경에 마추어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의 범위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탄생 자체가 우주와의 어떤 관련성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속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하늘에 “계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늘에”라는 공간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셨으며, 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 속에서도 공간적인 의미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개념적인 철학적 의미만의 신 개념이나 천국 개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개념들을 오로지 철학적인 관념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예수는 분명히 그 당시 우주관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천국관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개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확실한 경험적인 것이었다. 예수가 인간과 다른 점들 중에서 한 가지는 자신의 출처와 돌아갈 장소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인간이 그 당시의 우주관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전하셨을 가능성도 있으며, 아니면 그 제한 때문에 어떤 가르침도 줄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확실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에도 예수의 말씀들을 그대로 기록한 부분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전해지는 예수에 관한 기사들을 토대로 하고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고 그의 유대교적 배경과 심오한 지식을 소화시켜서 예수의 복음을 재해석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바울의 복음이라는 창을 통하여 복음서들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우주관을 토대로 하여 예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노력을 하고자 할 때는 직접적으로 복음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예수의 천국관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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