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이해를 위한 코페르니쿠스적 개념 전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보다 1,400년전에 톨레미(Ptolemy)가 주장하였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참조: The World Book Encyclopedia, p.821) 지구가 모든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눈에 관측되는 천체의 움직임이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그의 저서 “Concerning the Revolutions of the Celestial Spheres"를 통하여, 천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간단한 이론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핍박을 받았으나, 그가 발견한 진리로 인하여, 갈릴레오, 케플러, 아이작 뉴톤 등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 우주 물리학과 과학 시대에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사고 전환 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나 문화적 환경이 인간을 계속 사로잡고 있을 수는 없다.
(1) 성경 해석과 문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적,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초대 교회는 헬라 문화의 상황가운데에서 복음을 이해시키면서도 그 본래의 메시지를 보존하는 두 가지의 일을 추구하면서 이원론적 헬라 사상에서 발단된 이단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신교 정통주의는 그 당시 교회의 타락성을 공격하면서 계몽기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신학을 형성하였다. 그 뒤를 이은 경건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또는 많은 현대 신학들도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기독교 메시지를 현실적 문화 상황에 맞도록 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시대마다 문화적 요구의 흐름이 신학을 이끌어 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상황가운데서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본다.(참조: 폴 하버트, 문화 속의 선교, 채은수 역,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p.262.) 교회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상황에 맞게 해석하면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사명을 갖는다.
인류는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문화적 상황속에 처해 있다. 시대마다 사상과 생각이 다르듯이 문화적 상황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도 달라져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먼저 그 상황들을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하며, 해당되는 카테고리 내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각각의 문화적인 편견을 탐구하고 성경적인 보편성을 발견하여 초문화적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출현한다. 특별한 문화적인 환경에 의하여 조성되는 이질적인 언어가운데 메시지가 표현되더라도, 공통적인 인간성에 근거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신학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개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전하시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서 두 차원 사이에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차이를 초월하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질적인 문화간에 대화할 때에도 각각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서로간에 메시지에 대한 의미의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와 함께, 그 메시지를 받았던 사람들의 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메시지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주권아래 기록한 성경을 인간의 문화적 상황하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무조건 인간의 상황에 맞추어서 교회가 해석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기준을 세울 것인가 하는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성경 해석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 역사가 길지는 못하였다.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의사 전달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제한 조건들과 전달의 방편들이다. 사람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표정이나 억양, 감정 등 수많은 조건들이 함께 이루어지며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단 문서로 기록되면 거기에는 오직 글자만이 있을 뿐 이차적인 전달 수단들(참조: 문자화된 단순한 언어 이외의 전달 수단을 말하며, 표정, 억양, 몸짓, 분위기, 배경 등 모든 환경적 요소들을 말한다.)은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전달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며, 참된 해석의 방편에는 이러한 이차적 수단들을 재현하는 노력이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이 세상에 임하기 이전의)를 인간에게 나타내심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적 상황과 배경을 무시한 계시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계시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치고자 했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문화만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대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 문화를 잘 알고 난 후에야 가능하듯이,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또는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 서서 그 말들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인간의 사고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빈 부분이 필요하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를 무시하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편으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2) 성경 해석학과 신학
성경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은 ‘해석자’란 의미를 가진 헬라어 ‘hermeneu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요 웅변의 수호자인 ‘Hermes’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고대의 헬라 시대에는 옛날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들보다 진리의 근원에 더 가까이 접근한 위치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으므로 이들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록 문서들은 특별한 경외와 세심한 배려로 해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성경을 해석하게 된 학문적인 기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참조: 다니엘 아담스, 성경 해석학 입문,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1983), p.14) 헬라의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이어 받았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정확한 원리를 깨달아 적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여, 성경 해석학을 기독교 신학 연구의 중요한 분야로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 해석방법에 있어서 축어적 해석, 비유적 해석, 유추적 해석, 영적(또는 신비적, 초자연적)해석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학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 방법에 대한 규율이 있었으며, 이 규율에 따라 신중히 평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계몽기까지 교회 내에서 계속되었으며, 오늘날의 보수적인 개신교단들에서도 아직 이러한 해석 방법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경 해석학은 상황이나 언어, 역사 문화와 같은 보편적인 것들을 다루는 일반 성경 해석학과, 수사나 상징, 시, 예언, 예표, 교의적 교훈, 그리고 다양한 문학적 형태 등 특수한 것을 취급하는 특수 성경 해석학이 있다.
성경 해석학은 신학 또는 다른 학문을 전제로 하여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방법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원문을 찾아내는 원문 비평에 근거를 두어야하며, 원문 해석은 성경 해석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방향의 신학이든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바로 원문 해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성경 해석법을 도구로 사용하였다.(참조: R.M.Grant, 성서 해석의 역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p.8.) 또한 신앙공동체의 밖에 있으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충분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성서 해석자는 진리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크리스찬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학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생활, 교회의 사업 그리고 교회의 사명에 대한 근간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재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전통적인 성경해석 방법에만 호소해서는 안된다. 현대의 성경해석 방법론들이 철학 사조에 근거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 해석학 역시 인간의 철학적 사고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재하는 장소이고, 하나님이 인간과의 계속적인 관계 속에서 계시를 주신다고 한다면, 그 나라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도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가 첨부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 지구 중심적 우주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예수 이전은 물론 그 이후 상당한 기간동안 사람들은 지구 중심적 우주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우주 전체의 한 복판에 지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며, 모든 천체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시 지구 중심적으로 해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신학적인 요구에 의하여 전승들을 발전시키고 편집을 하여 성경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비평학적 견해에서는 히브리인들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므로 그 이전의 기록들은 그들보다 뛰어난 문명을 가졌던 수메르나 이집트 등의 신화적 요소들과 가나안의 신화적인 요소들이 유입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신화의 내용을 빌려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개념은 원래 히브리인의 사상이 아니라 가나안 지역에서 발견된 우가리트 문서에 근거하여 가나안의 ‘엘’신과 ‘아세라’신 그리고 여러 다른 신들을 이야기하는 신화에서 빌어 온 것이며, 창세기 1장의 ‘두 큰 광명’은 바벨론의 신명을 배척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창세기 1장과 2장 등의 창조설화를 기록함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기에 그들이 배웠던 그 지역의 더욱 뛰어난 문명 즉, 그들의 우주관에서 개념을 빌어온 것 또는 그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다. 비평학을 근거로 하여 여러 문헌에서 말하고 있듯이 성경의 우주관이 주변의 설화들에서 빌어왔다는 것을 택하든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구전에 의해 전해왔던 여러 가지의 단편적인 유대인 고유의 설화들이 모세를 통하여 또는 여러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전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주변적인 자료들이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따르든지에 상관없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적 사상이 추구하는 창조 신학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공통적인 개념은 창조주가 피조물 세계를 이룩하였다는 것이고, 그 방향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나라”가 곧 “종말”이라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 종말이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참조: G. E. Ladd, op. cit., pp.66.) G. E. Ladd는 이것이 복음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지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할 때, 임한다는 의미를 물질세계 속에서의 이 세상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곧 물질세계의 종말과 같다는 공식을 세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세상을 자기 나라(원초적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만드셨는가 아니면 그것의 밖에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속에 지구를 만드시고 그 위에 우리 인간을 두시기 위하여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다는 지구 중심적 사고와 일치될 수 있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그 나라(물질 세계 속에도 임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와는 다른 개념으로)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물질 세계가 창조된다는 원초적 하나님 나라 중심의 개념이다. 만약에 우리가 전자를 따른다고 한다면, 물질적인 이 우주 속에 사탄의 궤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을 때, 그 우주를 안에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전체 역시 완전성을 잃어버린, 불의한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에도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이 개념이 오히려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생각 속에서 주인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훨씬 타당성이 있다. 원초적인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으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다”는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동그란 모양의 우주 경계면 밖에서 성령이 역사 하셨을 것이라는 상상을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우주 밖에 계시다는 전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적 타자가 되시고, 물질적인 우주는 하나의 던져진 존재로서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도 바로 이러한 개념에서 발상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 체계는 3차원의 공간세계와 시간을 더한 4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공간이 있으면 그 공간 전체가 균질한 성격을 갖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그 우주의 공간 전체가 균질한 물질 세계일 것이라고 단순히 결론을 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이미 오래 전에 현대 우주 물리학에 의해 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주 안에 존재할 것으로 가정되는 블랙홀(Black Hole)(참조: 이고르 노비코프, 블랙홀과 우주, 동아출판사 역, (서울: 동아출판사, 1991), pp.15-37.)에 관한 이론에 의해서이다. 우주 안에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힘과 에너지를 분석할 때, 이 우주 안에는 전혀 다른 성질의 어떤 공간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블랙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개략적인 이론적 배경은 설정할 수 있으나, 그리고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고 있으나, 과연 그것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랙홀이 원초적인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 우주 안에 특성이 다른 어떤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에 우주 공간을 설명하면서 도우넛 모양의 공간을 제시한 적이 있다. 풍선 모양의 우주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공간 모형도이다. 우주가 어떤 모양으로, 어떤 성질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분명하게 규명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바깥쪽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지구 중심적 우주관에서는 일단 벗어나야 되겠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할 때, 분명한 공간적인 개념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다. ~로부터 왔고 ~로 간다는 말은 공간 속에서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이것에 관한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4) 연속적 시간관
인간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 중에서 시간만큼 심각한 것은 없다. 공간의 문제 역시 인간에게 한계상황을 지워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었다. 교통 수단의 발달과 통신 장비의 발달로 인하여 공간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로 정복되었고, 이제는 지구 전체를 하나의 촌락으로 표현하면서 무한한 우주 밖으로 뻗어가 보고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관을 크게 분류하면 직선적인 시간관과 원형의 시간관이 있다. 동양은 주로 원형의 시간관을 가져서, 불교의 윤회 사상이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직선적인 시간관은 주로 유대교적인 배경에서 탄생되어, 이 세상이 분명한 시작점으로부터 탄생되었고 거기에는 분명한 종말이 있다는 종말사상이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독교적 시간관은 이것들 중에서 직선적인 시간관을 기초로 한다.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고 사색한 신학자 중에서 어거스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참조: 노만 가이슬러, 어거스틴 사상, 박일민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pp. 72-90.) 시간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어거스틴 역시 직선적인 시간관에서 출발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직선적으로 구분하면서 과연 그것들이 어디에서 존재하고 있는가를 사색하였고, 결국에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기억 속에서 흔적과 가능성으로만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창조가 시간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無)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도 없었고,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현재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의 발달과 물질주의의 성장에 따라 시간 역시도 물질주의적인 개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와 미래가 실재(實在)하는 세계인 것처럼 다루려는 사조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과거와 미래는 물질세계 또는 실존의 세계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려서 존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과거와 미래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는 큰 혼돈을 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고체계 속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 막연한 시간개념 속에서 과거 또는 미래 역시 현재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확한 개념에 도달하기는 힘든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 원초적인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다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인가? 그리고 직선적인 시간 개념 속에서 만일 하나님이 과거에 손을 대신다면 현재와 미래는 어떻게 변화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시간 개념을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연결시킨 신학자 중에 판넨베르그가 있다. 그는 저서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에서 현재 속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에 대해 언급하였다.(참조: Wolfhart Pannenberg,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pp. 127-143.) 과거는 현재의 현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현재는 과거의 축적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의미에서), 미래는 현재 속에서 어떤 가능성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간관은 어거스틴의 사상과 기본적으로 틀을 같이하지만, 판넨베르그는 이 시간관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적용시킨 점이 특이하다. 즉,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 속에 그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도록 길을 열어줄 때 비로소 거기에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은 이미 현재 속에 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G. E. Ladd가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여 설명한 하나님 나라 임재의 이론(참조: George Eldon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Grand Rapids: Eerdmans, 1995), pp. 24-51.)보다도 훨씬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어거스틴의 시간관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다. 창조는 무(無)로부터 유(有)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시간 개념과 함께 적용시킨다면, 미래는 아직 존재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무(無)이다. 그러나 그 미래는 현재라는 순간에 존재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즉, 창조의 순간을 맞이하며, 현재의 순간을 지나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재 속에서의 흔적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간관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무한한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현장에 바로 인간들이 서 있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실존과 창조의 역사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창조 동역자들이 된다. 그것은 바로 판넨베르그가 지적하였듯이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시간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직선적인 시간관 또는 반복적 시간관의 틀 위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 존재의 세계로 간주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극단적인 개념으로 치우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연속적 시간관 속에서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예수의 말씀 역시 어떤 경우에는 현재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참조: 누가복음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를 언급하는 한편 또 어떤 경우에는 미래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참조: 누가복음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를 말씀하였다.
(5) 물질주의와 영지주의적 가치관
눈에 보이거나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한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인류의 사고 체계 속에 흐르고 있다. 하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 즉 눈에 보이는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무가치하게 보는 한편 오로지 영적인 것에만 가치 기준을 두는 영지주의적 흐름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서 동서양의 문화가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는 분명히 후자에 더 치중하였고,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는 오히려 전자에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해석함에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물질적인 세계 속에서의 임재로 보려는 부류가 있는 반면, 그것을 오로지 영적인 세계 속에서의 성취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의 조류는 주로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극단적인 경향을 보여왔다. 특별히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해방신학은 물질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성취만이 성경적인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였고, 이에 대응하는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유토피아주의적인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보다 저 세상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만이 진리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속에서는 이 두 가지가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만일 하나님의 우주 창조가 원초적 하나님 나라 바깥쪽으로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통치(참조: G. R.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Grand Rapids: Eerdmans), pp.3-38. 하나님의 통치가 곧 하나님의 나라 임재라고 보는 견해,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여기에 동의함.)가 원초적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물질 세계 속에까지 확장되게 되었다는 개념을 수용한다면 즉, 지구 중심적 우주관이 아닌 원초적 하나님 나라 중심적 우주관을 수용한다면, 예수의 이중적인 표현이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 원초적인 나라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다가 타락한 물질 세계 속에서도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적으로 완전성을 회복하게 될 것을 동시적으로 수용한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모두 타당성을 갖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오직 한 두 가지의 기준만이 평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릇된 선입견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제대로 판단될 수 있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지가 동시적으로 적용이 되어야 옳을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는 동시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보다 1,400년전에 톨레미(Ptolemy)가 주장하였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참조: The World Book Encyclopedia, p.821) 지구가 모든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눈에 관측되는 천체의 움직임이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그의 저서 “Concerning the Revolutions of the Celestial Spheres"를 통하여, 천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간단한 이론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핍박을 받았으나, 그가 발견한 진리로 인하여, 갈릴레오, 케플러, 아이작 뉴톤 등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 우주 물리학과 과학 시대에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사고 전환 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나 문화적 환경이 인간을 계속 사로잡고 있을 수는 없다.
(1) 성경 해석과 문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적,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초대 교회는 헬라 문화의 상황가운데에서 복음을 이해시키면서도 그 본래의 메시지를 보존하는 두 가지의 일을 추구하면서 이원론적 헬라 사상에서 발단된 이단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신교 정통주의는 그 당시 교회의 타락성을 공격하면서 계몽기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신학을 형성하였다. 그 뒤를 이은 경건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또는 많은 현대 신학들도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기독교 메시지를 현실적 문화 상황에 맞도록 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시대마다 문화적 요구의 흐름이 신학을 이끌어 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상황가운데서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본다.(참조: 폴 하버트, 문화 속의 선교, 채은수 역,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p.262.) 교회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상황에 맞게 해석하면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사명을 갖는다.
인류는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문화적 상황속에 처해 있다. 시대마다 사상과 생각이 다르듯이 문화적 상황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도 달라져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먼저 그 상황들을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하며, 해당되는 카테고리 내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각각의 문화적인 편견을 탐구하고 성경적인 보편성을 발견하여 초문화적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출현한다. 특별한 문화적인 환경에 의하여 조성되는 이질적인 언어가운데 메시지가 표현되더라도, 공통적인 인간성에 근거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신학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개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전하시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서 두 차원 사이에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차이를 초월하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질적인 문화간에 대화할 때에도 각각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서로간에 메시지에 대한 의미의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와 함께, 그 메시지를 받았던 사람들의 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메시지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주권아래 기록한 성경을 인간의 문화적 상황하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무조건 인간의 상황에 맞추어서 교회가 해석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기준을 세울 것인가 하는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성경 해석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 역사가 길지는 못하였다.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의사 전달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제한 조건들과 전달의 방편들이다. 사람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표정이나 억양, 감정 등 수많은 조건들이 함께 이루어지며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단 문서로 기록되면 거기에는 오직 글자만이 있을 뿐 이차적인 전달 수단들(참조: 문자화된 단순한 언어 이외의 전달 수단을 말하며, 표정, 억양, 몸짓, 분위기, 배경 등 모든 환경적 요소들을 말한다.)은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전달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며, 참된 해석의 방편에는 이러한 이차적 수단들을 재현하는 노력이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이 세상에 임하기 이전의)를 인간에게 나타내심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적 상황과 배경을 무시한 계시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계시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치고자 했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문화만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대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 문화를 잘 알고 난 후에야 가능하듯이,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또는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 서서 그 말들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인간의 사고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빈 부분이 필요하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를 무시하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편으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2) 성경 해석학과 신학
성경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은 ‘해석자’란 의미를 가진 헬라어 ‘hermeneu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요 웅변의 수호자인 ‘Hermes’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고대의 헬라 시대에는 옛날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들보다 진리의 근원에 더 가까이 접근한 위치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으므로 이들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록 문서들은 특별한 경외와 세심한 배려로 해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성경을 해석하게 된 학문적인 기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참조: 다니엘 아담스, 성경 해석학 입문,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1983), p.14) 헬라의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이어 받았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정확한 원리를 깨달아 적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여, 성경 해석학을 기독교 신학 연구의 중요한 분야로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 해석방법에 있어서 축어적 해석, 비유적 해석, 유추적 해석, 영적(또는 신비적, 초자연적)해석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학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 방법에 대한 규율이 있었으며, 이 규율에 따라 신중히 평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계몽기까지 교회 내에서 계속되었으며, 오늘날의 보수적인 개신교단들에서도 아직 이러한 해석 방법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경 해석학은 상황이나 언어, 역사 문화와 같은 보편적인 것들을 다루는 일반 성경 해석학과, 수사나 상징, 시, 예언, 예표, 교의적 교훈, 그리고 다양한 문학적 형태 등 특수한 것을 취급하는 특수 성경 해석학이 있다.
성경 해석학은 신학 또는 다른 학문을 전제로 하여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방법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원문을 찾아내는 원문 비평에 근거를 두어야하며, 원문 해석은 성경 해석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방향의 신학이든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바로 원문 해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성경 해석법을 도구로 사용하였다.(참조: R.M.Grant, 성서 해석의 역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p.8.) 또한 신앙공동체의 밖에 있으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충분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성서 해석자는 진리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크리스찬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학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생활, 교회의 사업 그리고 교회의 사명에 대한 근간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재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전통적인 성경해석 방법에만 호소해서는 안된다. 현대의 성경해석 방법론들이 철학 사조에 근거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 해석학 역시 인간의 철학적 사고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재하는 장소이고, 하나님이 인간과의 계속적인 관계 속에서 계시를 주신다고 한다면, 그 나라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도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가 첨부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 지구 중심적 우주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예수 이전은 물론 그 이후 상당한 기간동안 사람들은 지구 중심적 우주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우주 전체의 한 복판에 지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며, 모든 천체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시 지구 중심적으로 해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신학적인 요구에 의하여 전승들을 발전시키고 편집을 하여 성경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비평학적 견해에서는 히브리인들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므로 그 이전의 기록들은 그들보다 뛰어난 문명을 가졌던 수메르나 이집트 등의 신화적 요소들과 가나안의 신화적인 요소들이 유입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신화의 내용을 빌려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개념은 원래 히브리인의 사상이 아니라 가나안 지역에서 발견된 우가리트 문서에 근거하여 가나안의 ‘엘’신과 ‘아세라’신 그리고 여러 다른 신들을 이야기하는 신화에서 빌어 온 것이며, 창세기 1장의 ‘두 큰 광명’은 바벨론의 신명을 배척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창세기 1장과 2장 등의 창조설화를 기록함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기에 그들이 배웠던 그 지역의 더욱 뛰어난 문명 즉, 그들의 우주관에서 개념을 빌어온 것 또는 그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다. 비평학을 근거로 하여 여러 문헌에서 말하고 있듯이 성경의 우주관이 주변의 설화들에서 빌어왔다는 것을 택하든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구전에 의해 전해왔던 여러 가지의 단편적인 유대인 고유의 설화들이 모세를 통하여 또는 여러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전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주변적인 자료들이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따르든지에 상관없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적 사상이 추구하는 창조 신학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공통적인 개념은 창조주가 피조물 세계를 이룩하였다는 것이고, 그 방향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나라”가 곧 “종말”이라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 종말이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참조: G. E. Ladd, op. cit., pp.66.) G. E. Ladd는 이것이 복음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지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할 때, 임한다는 의미를 물질세계 속에서의 이 세상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곧 물질세계의 종말과 같다는 공식을 세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세상을 자기 나라(원초적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만드셨는가 아니면 그것의 밖에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속에 지구를 만드시고 그 위에 우리 인간을 두시기 위하여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다는 지구 중심적 사고와 일치될 수 있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그 나라(물질 세계 속에도 임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와는 다른 개념으로)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물질 세계가 창조된다는 원초적 하나님 나라 중심의 개념이다. 만약에 우리가 전자를 따른다고 한다면, 물질적인 이 우주 속에 사탄의 궤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을 때, 그 우주를 안에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전체 역시 완전성을 잃어버린, 불의한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에도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이 개념이 오히려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생각 속에서 주인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훨씬 타당성이 있다. 원초적인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으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다”는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동그란 모양의 우주 경계면 밖에서 성령이 역사 하셨을 것이라는 상상을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우주 밖에 계시다는 전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적 타자가 되시고, 물질적인 우주는 하나의 던져진 존재로서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도 바로 이러한 개념에서 발상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 체계는 3차원의 공간세계와 시간을 더한 4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공간이 있으면 그 공간 전체가 균질한 성격을 갖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그 우주의 공간 전체가 균질한 물질 세계일 것이라고 단순히 결론을 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이미 오래 전에 현대 우주 물리학에 의해 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주 안에 존재할 것으로 가정되는 블랙홀(Black Hole)(참조: 이고르 노비코프, 블랙홀과 우주, 동아출판사 역, (서울: 동아출판사, 1991), pp.15-37.)에 관한 이론에 의해서이다. 우주 안에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힘과 에너지를 분석할 때, 이 우주 안에는 전혀 다른 성질의 어떤 공간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블랙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개략적인 이론적 배경은 설정할 수 있으나, 그리고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고 있으나, 과연 그것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랙홀이 원초적인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 우주 안에 특성이 다른 어떤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에 우주 공간을 설명하면서 도우넛 모양의 공간을 제시한 적이 있다. 풍선 모양의 우주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공간 모형도이다. 우주가 어떤 모양으로, 어떤 성질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분명하게 규명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바깥쪽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지구 중심적 우주관에서는 일단 벗어나야 되겠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할 때, 분명한 공간적인 개념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다. ~로부터 왔고 ~로 간다는 말은 공간 속에서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이것에 관한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4) 연속적 시간관
인간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 중에서 시간만큼 심각한 것은 없다. 공간의 문제 역시 인간에게 한계상황을 지워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었다. 교통 수단의 발달과 통신 장비의 발달로 인하여 공간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로 정복되었고, 이제는 지구 전체를 하나의 촌락으로 표현하면서 무한한 우주 밖으로 뻗어가 보고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관을 크게 분류하면 직선적인 시간관과 원형의 시간관이 있다. 동양은 주로 원형의 시간관을 가져서, 불교의 윤회 사상이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직선적인 시간관은 주로 유대교적인 배경에서 탄생되어, 이 세상이 분명한 시작점으로부터 탄생되었고 거기에는 분명한 종말이 있다는 종말사상이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독교적 시간관은 이것들 중에서 직선적인 시간관을 기초로 한다.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고 사색한 신학자 중에서 어거스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참조: 노만 가이슬러, 어거스틴 사상, 박일민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pp. 72-90.) 시간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어거스틴 역시 직선적인 시간관에서 출발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직선적으로 구분하면서 과연 그것들이 어디에서 존재하고 있는가를 사색하였고, 결국에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기억 속에서 흔적과 가능성으로만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창조가 시간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無)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도 없었고,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현재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의 발달과 물질주의의 성장에 따라 시간 역시도 물질주의적인 개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와 미래가 실재(實在)하는 세계인 것처럼 다루려는 사조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과거와 미래는 물질세계 또는 실존의 세계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려서 존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과거와 미래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는 큰 혼돈을 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고체계 속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 막연한 시간개념 속에서 과거 또는 미래 역시 현재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확한 개념에 도달하기는 힘든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 원초적인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다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인가? 그리고 직선적인 시간 개념 속에서 만일 하나님이 과거에 손을 대신다면 현재와 미래는 어떻게 변화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시간 개념을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연결시킨 신학자 중에 판넨베르그가 있다. 그는 저서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에서 현재 속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에 대해 언급하였다.(참조: Wolfhart Pannenberg,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pp. 127-143.) 과거는 현재의 현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현재는 과거의 축적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의미에서), 미래는 현재 속에서 어떤 가능성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간관은 어거스틴의 사상과 기본적으로 틀을 같이하지만, 판넨베르그는 이 시간관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적용시킨 점이 특이하다. 즉,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 속에 그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도록 길을 열어줄 때 비로소 거기에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은 이미 현재 속에 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G. E. Ladd가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여 설명한 하나님 나라 임재의 이론(참조: George Eldon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Grand Rapids: Eerdmans, 1995), pp. 24-51.)보다도 훨씬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어거스틴의 시간관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다. 창조는 무(無)로부터 유(有)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시간 개념과 함께 적용시킨다면, 미래는 아직 존재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무(無)이다. 그러나 그 미래는 현재라는 순간에 존재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즉, 창조의 순간을 맞이하며, 현재의 순간을 지나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재 속에서의 흔적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간관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무한한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현장에 바로 인간들이 서 있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실존과 창조의 역사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창조 동역자들이 된다. 그것은 바로 판넨베르그가 지적하였듯이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시간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직선적인 시간관 또는 반복적 시간관의 틀 위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 존재의 세계로 간주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극단적인 개념으로 치우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연속적 시간관 속에서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예수의 말씀 역시 어떤 경우에는 현재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참조: 누가복음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를 언급하는 한편 또 어떤 경우에는 미래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참조: 누가복음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를 말씀하였다.
(5) 물질주의와 영지주의적 가치관
눈에 보이거나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한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인류의 사고 체계 속에 흐르고 있다. 하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 즉 눈에 보이는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무가치하게 보는 한편 오로지 영적인 것에만 가치 기준을 두는 영지주의적 흐름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서 동서양의 문화가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는 분명히 후자에 더 치중하였고,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는 오히려 전자에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해석함에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물질적인 세계 속에서의 임재로 보려는 부류가 있는 반면, 그것을 오로지 영적인 세계 속에서의 성취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의 조류는 주로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극단적인 경향을 보여왔다. 특별히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해방신학은 물질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성취만이 성경적인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였고, 이에 대응하는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유토피아주의적인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보다 저 세상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만이 진리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속에서는 이 두 가지가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만일 하나님의 우주 창조가 원초적 하나님 나라 바깥쪽으로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통치(참조: G. R.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Grand Rapids: Eerdmans), pp.3-38. 하나님의 통치가 곧 하나님의 나라 임재라고 보는 견해,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여기에 동의함.)가 원초적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물질 세계 속에까지 확장되게 되었다는 개념을 수용한다면 즉, 지구 중심적 우주관이 아닌 원초적 하나님 나라 중심적 우주관을 수용한다면, 예수의 이중적인 표현이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 원초적인 나라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다가 타락한 물질 세계 속에서도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적으로 완전성을 회복하게 될 것을 동시적으로 수용한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모두 타당성을 갖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오직 한 두 가지의 기준만이 평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릇된 선입견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제대로 판단될 수 있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지가 동시적으로 적용이 되어야 옳을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는 동시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