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개념
(1) 하나님 나라와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일은 복음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말과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단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가는 전자와 후자를 겸하여 사용하였고, 누가는 거의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심지어는 누가가 ‘그 나라’라고 썼을 경우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마태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두 번 정도만 사용하였고 다른 모든 경우에는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천국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말쿹 샤마임(“하늘들의 나라”)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마태가 거의 일관성 있게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대체적으로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 사용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와는 반대로, 원래 이교도들이었던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 마가와 누가가 특별한 유대교적 표현을 피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천국이라는 용어의 부차적인 표현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한된 자료들과 분석을 토대로 한 가정일 뿐이며, 예수가 직접 어떤 단어를 사용하였을지 그리고 이 두 용어를 다른 개념 또는 바탕에서 사용하였을지 하는 문제는 미해결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의미에 차이가 없고, 동일한 지칭을 표현상으로 다르게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따르기로 한다.
(2)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해석 동향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해석들은 세부적으로 볼 때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들을 갖는다.(참조: G. E. Ladd, 신약신학, 신성종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pp.60-63.)
어거스틴으로부터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 빛을 점차 잃어갔고, 개혁 교회들에서는 물론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카톨릭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개혁 교회 탄생 이후 초기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는 하르낙에 의해 대표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순수 예언적 종교 즉, 하나님의 부성(父性), 인간의 형제 됨, 개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윤리 등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그들은 예수의 교훈 속에 나타나는 묵시론적 요소들이 그의 실제적인 종교 메시지의 핵을 담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여기에 속한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개인의 종교 체험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에 반하여 요하네스 바이스는 1892년 그의 저서 “Jesus'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을 통하여 예수의 천국관이 유대 묵시론자들의 견해 즉 철저하게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왕국의 개념과 같았다고 주장하였다.(참조: Johannes Weiss, 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pp.67-74.) 그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에서 쟁취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도래한 것을 선포한 것이다. 왕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이며, 그것이 도래할 때 예수는 천상적인 인자(人子)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바이스의 이러한 개념을 채택하여 발전시킨 신학자 중에는 쉬바이처가 있는데, 그는 예수의 전체 사역을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장래에 도래할 것으로(그는 이 해석을 “철저 종말론”이라고 불렀다) 기대하였다. 그는 예수의 윤리 교훈이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이 임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만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왕국은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망과 환멸 속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바이스와 쉬바이처 이래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묵시론적인 요소가 예수 교훈의 껍질이 아니라 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왕국을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보지 않는다. 불트만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해석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실제 의미는 실존론적으로 이해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이다. 도드는 하르낙처럼 묵시적인 언어를 단적으로 제거시키지 않고 그것을 인간 정신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실재들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는 묵시론적인 언어로 묘사된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상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온,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질서이며, 전적(全的) 타자(他者)가 예수 안에서 역사 속에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 도드의 사상에 나타난 이 초월적 “전적 타자”는 성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적이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언자들이 대망하여 온 모든 사실들이 역사 속에 실현되었다고 하였다.
큄멜은 왕국의 일차적 의미를 종말 즉, 유대 묵시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새 세대로 이해하였다. 예수는 새 세대가 가까웠음을 선포하였으나, 큄멜은 왕국이 현재적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인격 속에서만 그러하다고 주장하였다.
예레미야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도드가 왕국의 현재적 돌입을 심도 있게 강조함으로써 해석상 실제적 돌파구를 열어놓은 일을 높이 평가한 반면, 왕국의 종말론적 측면을 과소평가한 일에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 대신에 예레미야스는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을 제의하였다. 그는 예수의 전체 사역을 왕국이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하였으며, 심지어 세례 요한도 성취의 때에 속한 사람으로 보았다.
미국과 영국의 어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새로운 견해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이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구약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음이 분명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와 천국 개념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후자는 지상에서의 하나님 통치이며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지상적 신정 왕국을 우선적으로 지칭한다고 본다.
(3) 구약과 유대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용어는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와 유사한 개념들은 예언서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왕권에 관한 기사는 이중적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왕(참조: 출 15:18, 민 23:21, 신 33:5, 사 43:15 등)과 온 세상의 왕(참조: 왕하 19:15, 사 6:5, 렘 46:18, 시 29:10, 99:1-4)으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현재에도 왕이지만, 그가 장차 왕이 되어 그의 백성들을 다스릴 날이 올 것이라는 구절들(참조: 사 24:23, 33:22, 52:7, 습 3:15, 슥 14:9)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왕이지만 또한 미래적으로도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미래적 왕국의 형태는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크게 나누면 두 종류의 소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적이며 예언적인 소망은, 왕국이 역사 속에서 일어날 것이며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통치될 지상적 나라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점차 퇴색하자,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서 성취될 왕국의 소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상적인 인자(人子)의 인격을 통해서, 역사를 뛰어넘는, 완전한 초월적 왕국을 가지고 돌입하는 묵시론적 왕국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소망은 항상 윤리적인 것으로 국한되었고 사변적인 것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묵시론적 유대교 역시 다양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저술가들은 왕국의 지상적이며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에녹 1-36장, 솔로몬의 시편 17-18편 참조)하는 반면, 다른 저술가들은 보다 초월적인 측면들을 강조(에녹 37-71장 참조)한다. 유대 묵시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현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생각을 상실하였으며, 역사가 악한 세력들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함으로써 역사를 포기해 버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오는 세대에 그의 왕국을 세울 때까지 이 세대에서는 단지 고난과 핍박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소망을 갖고 있었는데,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에 천사들이 내려와 함께 싸움으로써 쿰란 신도들에게 무조건적인 승리를 안겨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랍비 문헌들도 이와 비슷한 종말론들을 발전시켰으나, 천국이라는 술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인간 역사의 전체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의 율법을 통해 주권을 행사하신다고 보았고, 율법에 복종하는 자만이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 하에 두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 나라는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그것에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나라라고 보았다.
유대교 안에서의 또 다른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열심당과 관련된 것이었다. 주후 1세기 초엽에 로마를 대항하는 수많은 반란들이 열심당들의 선동에 의해 일어났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성취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일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칼로 도래시키기를 원하신다고 보는 유대 급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로마를 대항해서 일으킨 반란들은 메시야적인 운동일 가능성이 많으며, 단지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인 목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재촉하려는 종교적인 목적에서 일어났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신학적 해석의 동향과 유대교 및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대개가 극단적인 입장들 중에서 한 쪽을 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세주의적 유대교와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이 세상에 현재적으로 또는 미래적으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함에 있어서 메시야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가 공생애를 살면서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때, 하나님의 나라 또는 메시야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예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오해들은 그들이 유대교적인 개념에 사로잡힌, 극단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며, 제한된 우주관으로 인하여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 하나님 나라와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일은 복음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말과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단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가는 전자와 후자를 겸하여 사용하였고, 누가는 거의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심지어는 누가가 ‘그 나라’라고 썼을 경우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마태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두 번 정도만 사용하였고 다른 모든 경우에는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천국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말쿹 샤마임(“하늘들의 나라”)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마태가 거의 일관성 있게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대체적으로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 사용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와는 반대로, 원래 이교도들이었던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 마가와 누가가 특별한 유대교적 표현을 피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천국이라는 용어의 부차적인 표현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한된 자료들과 분석을 토대로 한 가정일 뿐이며, 예수가 직접 어떤 단어를 사용하였을지 그리고 이 두 용어를 다른 개념 또는 바탕에서 사용하였을지 하는 문제는 미해결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의미에 차이가 없고, 동일한 지칭을 표현상으로 다르게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따르기로 한다.
(2)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해석 동향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해석들은 세부적으로 볼 때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들을 갖는다.(참조: G. E. Ladd, 신약신학, 신성종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pp.60-63.)
어거스틴으로부터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 빛을 점차 잃어갔고, 개혁 교회들에서는 물론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카톨릭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개혁 교회 탄생 이후 초기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는 하르낙에 의해 대표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순수 예언적 종교 즉, 하나님의 부성(父性), 인간의 형제 됨, 개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윤리 등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그들은 예수의 교훈 속에 나타나는 묵시론적 요소들이 그의 실제적인 종교 메시지의 핵을 담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여기에 속한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개인의 종교 체험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에 반하여 요하네스 바이스는 1892년 그의 저서 “Jesus'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을 통하여 예수의 천국관이 유대 묵시론자들의 견해 즉 철저하게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왕국의 개념과 같았다고 주장하였다.(참조: Johannes Weiss, 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pp.67-74.) 그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에서 쟁취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도래한 것을 선포한 것이다. 왕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이며, 그것이 도래할 때 예수는 천상적인 인자(人子)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바이스의 이러한 개념을 채택하여 발전시킨 신학자 중에는 쉬바이처가 있는데, 그는 예수의 전체 사역을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장래에 도래할 것으로(그는 이 해석을 “철저 종말론”이라고 불렀다) 기대하였다. 그는 예수의 윤리 교훈이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이 임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만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왕국은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망과 환멸 속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바이스와 쉬바이처 이래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묵시론적인 요소가 예수 교훈의 껍질이 아니라 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왕국을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보지 않는다. 불트만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해석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실제 의미는 실존론적으로 이해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이다. 도드는 하르낙처럼 묵시적인 언어를 단적으로 제거시키지 않고 그것을 인간 정신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실재들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는 묵시론적인 언어로 묘사된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상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온,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질서이며, 전적(全的) 타자(他者)가 예수 안에서 역사 속에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 도드의 사상에 나타난 이 초월적 “전적 타자”는 성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적이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언자들이 대망하여 온 모든 사실들이 역사 속에 실현되었다고 하였다.
큄멜은 왕국의 일차적 의미를 종말 즉, 유대 묵시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새 세대로 이해하였다. 예수는 새 세대가 가까웠음을 선포하였으나, 큄멜은 왕국이 현재적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인격 속에서만 그러하다고 주장하였다.
예레미야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도드가 왕국의 현재적 돌입을 심도 있게 강조함으로써 해석상 실제적 돌파구를 열어놓은 일을 높이 평가한 반면, 왕국의 종말론적 측면을 과소평가한 일에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 대신에 예레미야스는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을 제의하였다. 그는 예수의 전체 사역을 왕국이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하였으며, 심지어 세례 요한도 성취의 때에 속한 사람으로 보았다.
미국과 영국의 어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새로운 견해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이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구약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음이 분명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와 천국 개념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후자는 지상에서의 하나님 통치이며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지상적 신정 왕국을 우선적으로 지칭한다고 본다.
(3) 구약과 유대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용어는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와 유사한 개념들은 예언서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왕권에 관한 기사는 이중적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왕(참조: 출 15:18, 민 23:21, 신 33:5, 사 43:15 등)과 온 세상의 왕(참조: 왕하 19:15, 사 6:5, 렘 46:18, 시 29:10, 99:1-4)으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현재에도 왕이지만, 그가 장차 왕이 되어 그의 백성들을 다스릴 날이 올 것이라는 구절들(참조: 사 24:23, 33:22, 52:7, 습 3:15, 슥 14:9)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왕이지만 또한 미래적으로도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미래적 왕국의 형태는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크게 나누면 두 종류의 소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적이며 예언적인 소망은, 왕국이 역사 속에서 일어날 것이며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통치될 지상적 나라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점차 퇴색하자,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서 성취될 왕국의 소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상적인 인자(人子)의 인격을 통해서, 역사를 뛰어넘는, 완전한 초월적 왕국을 가지고 돌입하는 묵시론적 왕국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소망은 항상 윤리적인 것으로 국한되었고 사변적인 것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묵시론적 유대교 역시 다양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저술가들은 왕국의 지상적이며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에녹 1-36장, 솔로몬의 시편 17-18편 참조)하는 반면, 다른 저술가들은 보다 초월적인 측면들을 강조(에녹 37-71장 참조)한다. 유대 묵시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현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생각을 상실하였으며, 역사가 악한 세력들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함으로써 역사를 포기해 버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오는 세대에 그의 왕국을 세울 때까지 이 세대에서는 단지 고난과 핍박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소망을 갖고 있었는데,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에 천사들이 내려와 함께 싸움으로써 쿰란 신도들에게 무조건적인 승리를 안겨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랍비 문헌들도 이와 비슷한 종말론들을 발전시켰으나, 천국이라는 술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인간 역사의 전체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의 율법을 통해 주권을 행사하신다고 보았고, 율법에 복종하는 자만이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 하에 두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 나라는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그것에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나라라고 보았다.
유대교 안에서의 또 다른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열심당과 관련된 것이었다. 주후 1세기 초엽에 로마를 대항하는 수많은 반란들이 열심당들의 선동에 의해 일어났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성취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일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칼로 도래시키기를 원하신다고 보는 유대 급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로마를 대항해서 일으킨 반란들은 메시야적인 운동일 가능성이 많으며, 단지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인 목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재촉하려는 종교적인 목적에서 일어났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신학적 해석의 동향과 유대교 및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대개가 극단적인 입장들 중에서 한 쪽을 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세주의적 유대교와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이 세상에 현재적으로 또는 미래적으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함에 있어서 메시야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가 공생애를 살면서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때, 하나님의 나라 또는 메시야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예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오해들은 그들이 유대교적인 개념에 사로잡힌, 극단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며, 제한된 우주관으로 인하여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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