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복음’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등장하고 또한 중요한 단어가 없을 것이다. 반면에 그 의미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할 때, 부정적인 대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아는 것보다, 그저 ‘복된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또는 그 껍데기만 알고 있는 경향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하여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께서 사용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바울이 사용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언급한 것은 마가복음 1장 14-15절이다(“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사용한 ‘복음’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때가 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때가 하나님의 아들의 육화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증거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며, 누구든지 바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 나라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바로 눈앞에까지 임하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선언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의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다.
반면에 바울은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덧붙인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로마서 1:2-4). 더욱이 바울은 복음의 초점을 “영광스러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시키고 있다(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물론 그가 전한 복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배제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예수께서 원래 의도하였던 메시지와는 각도가 약간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믿으라”고 직접 외치셨을 때, 그 ‘복음’ 속에는 예수의 생애 특히 십자가와 부활은 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증거하시는 일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필수적인 사건이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가 ‘복음’의 목적이나 의도는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 다시 십자가가 있어야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 신앙으로 이미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부활의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 성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영적으로 그리고 영체(靈體) 안에서 영원토록 이루어질 사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그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몸과 생명을 고난 속에 던져버리신 분이다. 예수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인들과 함께하는 고난의 그리스도”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과 승천의, 영광의 그리스도”에 집중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초대교회 시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복음을 받아들일 대상자들의 무지와 그들의 마음 밭의 제약적 상황으로 인하여, 그리고 더 쉽고 빠르게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좋은 마음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영광의 그리스도”에 더 초점을 맞추었으리라고 짐작은 가지만,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더 깊이 접근해 보고자 하는 성도라면 당연히, 바울이 사용한 ‘복음’ 보다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복음’의 의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로 오늘날까지, 왜 세계 민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는 처절한 투쟁과 갈등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있는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하면서 미워하고 핍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오늘날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자신이 선언하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성도들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영광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은연중에 선민의식을 마음에 품고 비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면서 저주하는 것이 당연하다. 소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고 전쟁도 불사하는 자세가 오히려 칭찬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끼리, 소위 구원받은 성도들끼리만 뭉치고 힘을 키워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최고의 사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관심과 초점을 맞춘다면, 그 천국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몸으로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한다면,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인과 함께하신 고난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실천한다면, 그 때 비로소 예수께서 전하신 그 ‘복음’의 핵심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도들이 될 것이다.(K)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복음’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등장하고 또한 중요한 단어가 없을 것이다. 반면에 그 의미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할 때, 부정적인 대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아는 것보다, 그저 ‘복된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또는 그 껍데기만 알고 있는 경향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하여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께서 사용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바울이 사용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언급한 것은 마가복음 1장 14-15절이다(“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사용한 ‘복음’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때가 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때가 하나님의 아들의 육화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증거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며, 누구든지 바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 나라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바로 눈앞에까지 임하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선언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의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다.
반면에 바울은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덧붙인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로마서 1:2-4). 더욱이 바울은 복음의 초점을 “영광스러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시키고 있다(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물론 그가 전한 복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배제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예수께서 원래 의도하였던 메시지와는 각도가 약간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믿으라”고 직접 외치셨을 때, 그 ‘복음’ 속에는 예수의 생애 특히 십자가와 부활은 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증거하시는 일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필수적인 사건이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가 ‘복음’의 목적이나 의도는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 다시 십자가가 있어야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 신앙으로 이미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부활의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 성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영적으로 그리고 영체(靈體) 안에서 영원토록 이루어질 사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그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몸과 생명을 고난 속에 던져버리신 분이다. 예수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인들과 함께하는 고난의 그리스도”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과 승천의, 영광의 그리스도”에 집중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초대교회 시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복음을 받아들일 대상자들의 무지와 그들의 마음 밭의 제약적 상황으로 인하여, 그리고 더 쉽고 빠르게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좋은 마음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영광의 그리스도”에 더 초점을 맞추었으리라고 짐작은 가지만,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더 깊이 접근해 보고자 하는 성도라면 당연히, 바울이 사용한 ‘복음’ 보다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복음’의 의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로 오늘날까지, 왜 세계 민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는 처절한 투쟁과 갈등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있는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하면서 미워하고 핍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오늘날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자신이 선언하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성도들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영광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은연중에 선민의식을 마음에 품고 비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면서 저주하는 것이 당연하다. 소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고 전쟁도 불사하는 자세가 오히려 칭찬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끼리, 소위 구원받은 성도들끼리만 뭉치고 힘을 키워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최고의 사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관심과 초점을 맞춘다면, 그 천국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몸으로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한다면,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죄인과 함께하신 고난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실천한다면, 그 때 비로소 예수께서 전하신 그 ‘복음’의 핵심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도들이 될 것이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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