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21, 2011

예수와 ‘기적’

예수와 ‘기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적’에 열광한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생하지 않고 얻는 떡”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 그리고 가나안 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메시야’를 고대하던 당대의 사람들 중에 많은 부류는 ‘진리’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기적’에 관심이 있어서 예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면 예수는 이 ‘기적’에 대하여 어떤 입장이었을까? 만약에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기적’ 베풀기를 좋아하였다면, “고생하지 않고 얻는 떡”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위하여 공생애를 살아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주변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적’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한 번 맛들이기 시작하면 중독되기 십상이다. 처음에는 작은 ‘기적’만으로도 크게 만족하고 감동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반복될수록 점점 더 획기적이고 기적적인 ‘기적’을 요구한다. 웬만한 것에는 관심도 없고 영향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할 때 그의 관심은 오직 ‘기적’ 그 자체에만 쏠려 있게 된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거나 진리에 대한 관심 또는 열심이 깊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예수께서 전혀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 설령 그러하였다 하더라도, 공생애를 준비하는 30년 가까이의 기간 동안, 당대에 모든 육상 교통 중심지였던 나사렛 동네에서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지냈을 예수께서 그러한 인간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였을 리가 만무하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인하여 새로 생겨난 사실 또는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태초 이전부터 영원토록 그의 본성이 그러하신 것이다. 그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물질세계로 들어왔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서 활동하실 때, 그의 주변에는 필연적인 ‘기적’들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오늘날 최고의 문명세계로부터 어떤 선교사가 밀림 지역에서 외부와 전혀 접촉이 없이 원시상태 그래도 살아가는 어느 원주민을 만났을 때 원주민의 눈에 그 선교사의 모든 것이 기이하게 비치는 것처럼...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는 동안 많은 기적이 일어났던 것을 복음서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겨우 그 정도의 기적뿐이었을까? 만약에 그가 자신으로 말미암는 ‘기적’을 용납하거나 또는 이성적으로 의도하였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그 기적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별로 감동을 줄만한 것이 못된다. 아마 여러 가지 마술을 보며 신기해하던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충격적인 사건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공생애 이전은 빼고서라도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죽은 막대기에 불과한 ‘모세의 지팡이’가 보여주었던 그 ‘기적’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기적’을 용납하고 또한 아무 제한 없이 그 ‘기적’들을 베풀었다 하자. 그러면 모든 성도들은 그 ‘기적’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심히 연구하며 또한 그러한 능력을 얻기 위하여 남은 생애를 다 바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의 의도가 ‘기적’에 있지 않았다면, 그 ‘기적’에 관심을 두고 열심히 좇아다니는 사람들은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공생애의 후반부, 특히 십자가를 지게 되는 절대절명의 순간들에는 아무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 ‘말씀으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사시면서 많은 ‘말씀’을 하였다. 그가 ‘말씀’만 하여도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는 주변에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이 세상에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인류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다. 예루살렘 성과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시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창조주’께서 왜 ‘말씀으로’ 그 일을 하지 않으셨을까? 만약에 의도적으로 ‘기적’을 행하고 또한 아무 제한 없이 ‘기적’을 용납하셨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참으로 비정하신 분이 될 수밖에 없다. 정말로 그 능력을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문제를 전부 알면서도 오늘날까지 해결하실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그 ‘기적’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 예수께서 창조주로서 “고생하지 않고 얻는 떡”에 열광하는 인간의 습성을 잘 아셨을 것이다. 죄로 물들어 있는 악한 존재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인간의 실상에 대해 완전하게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고생하지 않고 얻는 떡”에 열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 유익한 태도인가? 과연 그것이 ‘선’의 열매를 맺는 의로운 습성인가? 어느 것도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을 때에는, 창조주가 피조물과 함께 있게 될 때에는, 본인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인간들 앞에는 많은 기적적인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스스로 ‘기적’의 출현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나타났을 것이며, 그와 접촉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겠는가? 예수께서 떠난 후로 예수를 따라가야 할 성도들은 얼마나 심각한 상실감에 한탄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예수께서는 ‘기적’의 가능성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싶어 하였을 것이다.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은 “고생하지 않고 얻는 떡”을 위한 무슨 굉장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진리’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병자를 낫게 할 때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께 도대체 얼마나 굉장한 ‘기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그 기적적인 현상만을 바라볼 뿐, 예수께서 정작 관심을 두었던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열두 제자들마저도 자신들이 갖고자 하는 능력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기적’에 열광하고 있다. ‘기적’이 있어야 예수를 제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또 그렇게 무의식중에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기적’을 원하고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면, 그러한 믿음의 자세가 바른 신앙일 것이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의 ‘기적’을 베푸는 메시아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이 광대한 끝도 없는 우주를 창조하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완전한 ‘진리’를 따라오도록 ‘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따라갈 것인가? 복음서가 증거하는 기적들은, “기적을 베풀어주려고 노력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를 만난 자연계 속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작은 흔적들에 불과하다는 마음으로 대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활력소가 될 것이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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