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육화(肉化)"
그리스도인 중에 "예수의 성육신(또는 육화, incarnation)"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선재(先在)"를 인정하면서 믿고 있는지를 질문한다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말씀과 신앙이 되지 못하고 지식적인 동의에 그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도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의 헬라사상은 '영'을 '선'으로 '육'을 '악'으로 여기는 '이원론(二元論)'에 지배되어 있었다. 이 이원론의 영향으로 도케티즘이라는 이단이 발생하였는데, 그들은 "예수는 육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환상적 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예수를 "선재의 말씀(초월적 창조주 실존)"으로 그리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증언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의 의미와 당위성 그리고 역사성에 대한 선언이고 '이원론'에 대한 반격이며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은 그의 경험에 토대한 증언이었으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육화'가 왜 중요한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가 육화된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고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육화'가 없었다면 부활과 승천도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예수의 '선재'가 없다면 '육화'도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육화(incarnate)의 사전적인 뜻은 "actualize", "embody", "manifest"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가능할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형태화 되어 눈에 보이게 되고,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을 보자. 그 수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이면 구름이 되고 빗물로 땅에 떨어지며,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한 얼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얼음에 열을 가하면 다시 물이 되고 더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되어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중의 수분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상태로 나타날 수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우주물리학에서는 모든 물체의 근원을 "에너지"로 규정하고, 에너지의 운동력이 감소 또는 증가에 따라 고체 또는 액체가 되고 기체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에 의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어떤 존재가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육화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예수의 육화에 대해 사도 요한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요한복음 1장 5절과 9절은 "참 빛이 어두움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 '참 빛'이 바로 선재하신 예수이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예수는 부활하여 다시 '참 빛'으로 하나님 나라에 돌아가셨음을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한 사람이며 또한 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예수의 모든 것을 닮아가야 하므로 '예수의 육화'도 역시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육화는 그리스도의 '참 빛'이 자신에게 비취게 하는 과정이며, 또한 동시에 자신도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참 빛'을 비추는 과정이다. 그렇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예수처럼 '참 빛'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이 곧 '구원'이다.(욥33:29-30, 요일1:5-7, 시49:18-19)
예수의 육화에 대한 사도 요한의 두 번째 설명은 '말씀'과 '육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로고스)이 육신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시 "육신을 벗고 말씀으로(로고스)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말씀(로고스)'은 인간이 보고 들을 수 없는 상태이며, '육신'은 인간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이다. 예수의 육화는 인간들이 '말씀(로고스)'을 보고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뜻이 실현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예수의 육화'도 반드시 닮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속에서 육화되게 하는 과정 즉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태가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게 하고 실행되게 하여 눈에 보이는 상태로 바뀌게 하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먼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나중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육신의 삶 속에 실행하도록 그들을 인도해야만 한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와 동질성을 갖게 되고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식이나 이상 또는 계획으로 끝나는 말씀은 헛된 말장난에 불과하며 오히려 괴로움과 멸망의 근원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 속에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약2:17-22)
'예수의 육화'라는 진리에 대하여 인간의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어두움의 자식으로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임으로써 '참 빛'과 '말씀(로고스)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K)
그리스도인 중에 "예수의 성육신(또는 육화, incarnation)"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선재(先在)"를 인정하면서 믿고 있는지를 질문한다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말씀과 신앙이 되지 못하고 지식적인 동의에 그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도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의 헬라사상은 '영'을 '선'으로 '육'을 '악'으로 여기는 '이원론(二元論)'에 지배되어 있었다. 이 이원론의 영향으로 도케티즘이라는 이단이 발생하였는데, 그들은 "예수는 육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환상적 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예수를 "선재의 말씀(초월적 창조주 실존)"으로 그리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증언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의 의미와 당위성 그리고 역사성에 대한 선언이고 '이원론'에 대한 반격이며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은 그의 경험에 토대한 증언이었으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육화'가 왜 중요한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가 육화된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고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육화'가 없었다면 부활과 승천도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예수의 '선재'가 없다면 '육화'도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육화(incarnate)의 사전적인 뜻은 "actualize", "embody", "manifest"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가능할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형태화 되어 눈에 보이게 되고,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을 보자. 그 수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이면 구름이 되고 빗물로 땅에 떨어지며,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한 얼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얼음에 열을 가하면 다시 물이 되고 더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되어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중의 수분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상태로 나타날 수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우주물리학에서는 모든 물체의 근원을 "에너지"로 규정하고, 에너지의 운동력이 감소 또는 증가에 따라 고체 또는 액체가 되고 기체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에 의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어떤 존재가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육화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예수의 육화에 대해 사도 요한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요한복음 1장 5절과 9절은 "참 빛이 어두움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 '참 빛'이 바로 선재하신 예수이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예수는 부활하여 다시 '참 빛'으로 하나님 나라에 돌아가셨음을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한 사람이며 또한 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예수의 모든 것을 닮아가야 하므로 '예수의 육화'도 역시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육화는 그리스도의 '참 빛'이 자신에게 비취게 하는 과정이며, 또한 동시에 자신도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참 빛'을 비추는 과정이다. 그렇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예수처럼 '참 빛'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이 곧 '구원'이다.(욥33:29-30, 요일1:5-7, 시49:18-19)
예수의 육화에 대한 사도 요한의 두 번째 설명은 '말씀'과 '육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로고스)이 육신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시 "육신을 벗고 말씀으로(로고스)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말씀(로고스)'은 인간이 보고 들을 수 없는 상태이며, '육신'은 인간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이다. 예수의 육화는 인간들이 '말씀(로고스)'을 보고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뜻이 실현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예수의 육화'도 반드시 닮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속에서 육화되게 하는 과정 즉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태가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게 하고 실행되게 하여 눈에 보이는 상태로 바뀌게 하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먼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나중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육신의 삶 속에 실행하도록 그들을 인도해야만 한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와 동질성을 갖게 되고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식이나 이상 또는 계획으로 끝나는 말씀은 헛된 말장난에 불과하며 오히려 괴로움과 멸망의 근원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 속에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약2:17-22)
'예수의 육화'라는 진리에 대하여 인간의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어두움의 자식으로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임으로써 '참 빛'과 '말씀(로고스)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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