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21, 2011

"예수의 선재(先在)"

"예수의 선재(先在)"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예수의 삶과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관심을 집중해야만 하며, 1차적 자료라고 할 수 있는 4복음서를 바르게 그리고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그의 모범과 가르침을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를 닮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도래한 사건과 그의 공생애 전체는 나타난 현상 또는 결과이다.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원인을 알아야만 하듯이, 예수가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왜 그러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려면 그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20세기에 있었던 큰 사건들 중 하나는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함으로써 인류 최초로 사람이 달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일 것이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것은 결과이다. 그 결과를 제대로 알려면 그것을 달로 보낸 지구의 과학자들과 우주선의 개발 역사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한 인간을 제대로 알려면 그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알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제대로 알려면 그의 과거와 근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으로 오신 예수에게는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태초에 이미 선재(先在)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선재에 대해 사도 요한과 바울이 증언하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사도 요한의 증언을 보면,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예수를 "말씀으로서 선재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씀'은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는 '다바르'인데, 히브리 개념으로는 Power 또는 Life의 의미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시편 33편 6절과 9절("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에서 히브리인들이 믿은 그 '말씀'은 그냥 사람이 입으로 말하는 그러한 '말'이 아니라 '생명력 있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헬라어의 '로고스'는 영어로 'word'라는 단어로만이 아니라, 'reason'이나 'pattern'으로도 번역될 수 있고, 'source & center'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의 '로고스'는 다른 장들 또는 다른 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의미와는 달리,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헬라철학에서 사용하던 '만물의 근원' 또는 'Universal Reason'이라는 의미로서의 '로고스'였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헬라 지역인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로고스'를 신봉하는 헬라인들에게 헬라 개념 및 히브리 개념이 조화를 이루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마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너희가 믿는 그 '말씀' 즉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우주와 생명의 근원으로 선재하신 분이다." (참조: 요일1:1-2,계1:4,22:12-13)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본체'로 표현하면서 그의 선재를 증거하였다.(골로새서 1:15-17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도 바울 역시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과 본체로 선재하신 분"이심을 증거 하였다.

구약성경도 예수의 선재와 육화를 뒷받침한다. 창세기 1장 1절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천지 창조에 개입하셨음을, 창세기 3장 16절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에 대하여 히브리서 7장 3절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설명함으로써 하늘의 존재가 얼마든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의 선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태생적으로 하나님과 동질성을 가지심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기록할 때 '하나님' 앞에 정관사가 없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또는 성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와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가 태초부터 존재하심으로써 영원 전부터 이미 인간 구원이 어떤 원칙과 계획으로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과 계획은 예수의 육화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완성되었다. 셋째로, 예수가 물질세계의 창조주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인간의 생명과 삶의 참 주인이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 피조물 세계로 들어오셨다!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사건이다! 천국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예수는 태초부터 선재하신 분이고 부활승천하여 지금도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인간들 중에 어느 날 문득 도를 깨달은 한 '인간영웅'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선재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만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리고 심지어는 신학자들 중에도 "예수는 성인들 중 하나", "고난당한 거룩한 실패자" 또는 "유대인을 위한 메시야"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은 신화에 불과하다", "천국은 없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실제적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의 선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예수의 선재를 배제하고 복음서를 본다면 그것처럼 허황되고 신비적인 미스테리로 가득한 '옛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예수의 선재를 배제하고 부활과 승천에 관한 기록을 읽는다면 그저 인간이 꾸며낸 종교설화로 치부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신앙과 진리 배척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선재를 받아들이지 못함"에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과 십자가형의 원인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외치더라도 그들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예수의 선재를 인정하고 믿는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면,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들로 다가오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국복음'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를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당신의 진실된 신앙고백이 이렇게 시작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십니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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