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창조론
세상에서는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흔히 말하는 '흑백논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편협된 사고방식을 갖게 하고 자기 고집에 집착하도록 만들며 심해지면 이견을 가진 사람들과의 불화 내지는 갈등과 투쟁으로 발전되게 한다. 이분법적 논리에는 심각한 함정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닐진대, 아무도 이분법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논리가 맞는 것도 아니다. 아무 기준 없이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진다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진화를 인정하면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고, 창조를 인정하면 진화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리하여 그 어느 쪽도 진정으로 논리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편협된 자세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면서 싸우려고 한다.
그러나 창조와 진화를, 이분법적 사도방식을 벗어나서, 먼저 인간에 대해 적용해 보자. 인간은 엄연히 동물과 다르다. '영'의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훈련을 받는다 해도, 영원한 세계를 생각할 수 없고, 어떤 절대자를 경배하는 예배자의 자세를 가질 수 없다. 만약에 그와 비슷한 모습을 동물에게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다만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육신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도 동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육신의 생명이 잉태되고,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얼마 동안 그 생명을 유지하다가, 연한이 되면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창조와 진화는 전혀 별개로 적용되어야 한다. '창조'의 의미는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고, '진화'의 의미는 "있던 것이 변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창조'와 관련되는 곳에 적용되어야만 하고, '진화'는 '진화'가 적용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적용되어야만 한다. '생명'은 땅에 있는 원소들을 조합하여 만들 수 없는 것이며(이것은 오늘날 첨단을 걷는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없던 것이 있게 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생명'에는 '진화'가 아니라 '창조'가 적용되어야만 한다. 반면에 '육신'은 땅의 원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이미 있던 것이 변형되는 것뿐이다. 그 육신에 생명이 더해짐으로써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력이 있게 되면 그 생명체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오랜 세월 속에서 이것들이 '진화'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진화'로 설명하고자 한다든지, '진화'의 대상조차 모든 것을 천편일률적으로 '창조'의 범위 안에 넣어보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모두 인간이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어떤 블랙박스로 남아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그 위에 '영'이라는 불가사의한 어떤 부분이 덧붙여져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동식물의 몸체는 '진화'의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인간의 육신도 그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인간의 인간됨'은 반드시 '창조'의 범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되었으므로 몸체와 '진화' 역시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좁은 의미에서 '진화'와 '창조'를 동시적으로 인정하고 바르게 적용할 때, 과학과 신앙은 대화가 가능하고 상호보완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주장하는 '론'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사고(思考)와 논리와 신앙에 진정한 '자유'를 선물로 안겨줄 것이다.(김)
세상에서는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흔히 말하는 '흑백논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편협된 사고방식을 갖게 하고 자기 고집에 집착하도록 만들며 심해지면 이견을 가진 사람들과의 불화 내지는 갈등과 투쟁으로 발전되게 한다. 이분법적 논리에는 심각한 함정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닐진대, 아무도 이분법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논리가 맞는 것도 아니다. 아무 기준 없이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진다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진화를 인정하면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고, 창조를 인정하면 진화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리하여 그 어느 쪽도 진정으로 논리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편협된 자세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면서 싸우려고 한다.
그러나 창조와 진화를, 이분법적 사도방식을 벗어나서, 먼저 인간에 대해 적용해 보자. 인간은 엄연히 동물과 다르다. '영'의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훈련을 받는다 해도, 영원한 세계를 생각할 수 없고, 어떤 절대자를 경배하는 예배자의 자세를 가질 수 없다. 만약에 그와 비슷한 모습을 동물에게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다만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육신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도 동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육신의 생명이 잉태되고,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얼마 동안 그 생명을 유지하다가, 연한이 되면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창조와 진화는 전혀 별개로 적용되어야 한다. '창조'의 의미는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고, '진화'의 의미는 "있던 것이 변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창조'와 관련되는 곳에 적용되어야만 하고, '진화'는 '진화'가 적용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적용되어야만 한다. '생명'은 땅에 있는 원소들을 조합하여 만들 수 없는 것이며(이것은 오늘날 첨단을 걷는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없던 것이 있게 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생명'에는 '진화'가 아니라 '창조'가 적용되어야만 한다. 반면에 '육신'은 땅의 원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이미 있던 것이 변형되는 것뿐이다. 그 육신에 생명이 더해짐으로써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력이 있게 되면 그 생명체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오랜 세월 속에서 이것들이 '진화'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진화'로 설명하고자 한다든지, '진화'의 대상조차 모든 것을 천편일률적으로 '창조'의 범위 안에 넣어보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모두 인간이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어떤 블랙박스로 남아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그 위에 '영'이라는 불가사의한 어떤 부분이 덧붙여져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동식물의 몸체는 '진화'의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인간의 육신도 그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인간의 인간됨'은 반드시 '창조'의 범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되었으므로 몸체와 '진화' 역시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좁은 의미에서 '진화'와 '창조'를 동시적으로 인정하고 바르게 적용할 때, 과학과 신앙은 대화가 가능하고 상호보완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주장하는 '론'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사고(思考)와 논리와 신앙에 진정한 '자유'를 선물로 안겨줄 것이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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