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의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사랑 받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사랑은 허다한 죄도 덮어주고 완전하게 용서하며 위로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사랑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찾는다. 기도할 때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당연한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용납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니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있어서 공의와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절대적 공동 성품이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도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피조물의 이해 범위 안에서는 사랑과 공의가 충돌된다. 완전한 사랑 앞에서는 공의가 무너지고 완전한 공의에는 사랑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사랑과 공의가 완전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공존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그 사랑과 공의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세상을 심판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만으로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성도들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을 찾는다. 무엇이든지 무조건 용서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임을 이유로(그런 존재로 지으셨다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적당히 죄를 범한 후에 당연히 용서받을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사랑의 하나님"만을 부르면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오직 반쪽짜리 기도이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만날 수 없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만나기를 원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을 찾는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도 찾아야 한다.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을 찾기 전에 "공의의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완전해져 가야만 할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 이미 내려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는 당연히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해 성도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완전한 공의는 절대로 실현할 수 없다. 바로 그 시점에, 최선을 다하여 공의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만 찾으면서 적당히 고의적인 죄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를 과연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을까? 그러한 성도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이미 무너진 것이 아닌가? 공의가 무너진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로서, 기도할 때마다, "공의의 하나님"을 먼저 외쳐 부르자! 그 공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다윗 왕의 부르짖음 처럼 "내 마음을 감찰해 주십시오. 내 죄악이 다 드러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르짖자. 잘못된 어두움의 그림자들을 열심히 찾아내어 께끗이 씻음받고, 빈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과 은혜로 채움받자. 그러면 자동적으로, 성도가 구하지 아니하여도, "사랑의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덮어주고, 점점 더 완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K)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사랑 받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사랑은 허다한 죄도 덮어주고 완전하게 용서하며 위로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사랑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찾는다. 기도할 때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당연한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용납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니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있어서 공의와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절대적 공동 성품이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도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피조물의 이해 범위 안에서는 사랑과 공의가 충돌된다. 완전한 사랑 앞에서는 공의가 무너지고 완전한 공의에는 사랑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사랑과 공의가 완전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공존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그 사랑과 공의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세상을 심판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만으로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성도들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을 찾는다. 무엇이든지 무조건 용서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임을 이유로(그런 존재로 지으셨다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적당히 죄를 범한 후에 당연히 용서받을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사랑의 하나님"만을 부르면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오직 반쪽짜리 기도이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만날 수 없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만나기를 원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을 찾는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도 찾아야 한다.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을 찾기 전에 "공의의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완전해져 가야만 할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 이미 내려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는 당연히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해 성도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완전한 공의는 절대로 실현할 수 없다. 바로 그 시점에, 최선을 다하여 공의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만 찾으면서 적당히 고의적인 죄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를 과연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을까? 그러한 성도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이미 무너진 것이 아닌가? 공의가 무너진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로서, 기도할 때마다, "공의의 하나님"을 먼저 외쳐 부르자! 그 공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다윗 왕의 부르짖음 처럼 "내 마음을 감찰해 주십시오. 내 죄악이 다 드러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르짖자. 잘못된 어두움의 그림자들을 열심히 찾아내어 께끗이 씻음받고, 빈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과 은혜로 채움받자. 그러면 자동적으로, 성도가 구하지 아니하여도, "사랑의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덮어주고, 점점 더 완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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