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확신히 인정해야 할 한가지는 성경 비평학만이 이론적인 최종의 결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에서 발굴되고 있는 최신의 자료들과 새로운 이론들의 발전은 우리들이 ‘신앙’의 부분으로 무조건 돌려버리려는 소극적인 태도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주석에서도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이었다고 약간의 발뺌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그 전달 방편의 이유 때문에 해석이 어려울 따름이지, 해석이 불가능한한 일들을 단지 상징들로써 나열해 놓은 의미없는 기록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많은 부분을 인문주의적인 방법에만 의존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매우 자가당착적인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차라리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보려는 무리들의 솔직한 태도보다도 못한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66권의 첫 시작이 되는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의 방법 위에 기초를 세운다면 성경 전체가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지식은 있으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은 거부되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우주관과 구약 시대의 근동의 우주관을 보다 확실히 아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 이해에 대하여,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와 중세기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학의 발전과 함께 변화되어 온 성경 해석의 방법이 온통 철학의 이론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눈 앞에 한 권의 정경으로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어느 날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이 형성되기까지에도 천 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으며, 신약 성경이 정경으로 유착되기에도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구약 성경이 완성되는 동안에 실제적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하여 씌어졌든지간에 베드로 후서에 기록된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한 성경의 기록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수차례 발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신 개념은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하였음도 살펴보았다. 한편 ‘성경으로만’ 성경이 해석되어야 하고 ‘성경으로만’ 하나님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칼빈의 영향 아래,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마치 불경죄를 짓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좀더 진리에 접근해 보고자 목숨을 바쳐가면서 애썼던 구약 시대보다도 오히려 퇴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신학자들은 현대에 들어와서 너무도 다양하게 추구된 바 있는 하나님의 이해의 혼란에서 빠져 나오려고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하바드 대학의 카우만 교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면서, 모든 계시의 근원으로써 신학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주어진 어떤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이해를 유추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 이해의 방편으로 돌아가자는 현대 신학의 새로운 경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예 부흥이 있기까지 세계의 모든 문화와 과학은 기독교가 주관하였다. 아니 성경이 주관하였다고 하는 편이 보다 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로 자연 과학이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성경의 권위는 점차 실제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신앙은 교회 안에만 갇혀서 과거의 바리새인들이나 엣세네파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이 거룩을 지키고 구원을 유지하는 것으로 변하였으며, 급기야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의 세속화를 부르짖게 되었다. 실제의 생활과 신앙의 생활이 벌어지는만큼 복음은 힘을 잃었으며,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는 서구 사회에는 텅빈 교회들이 사회의 큰 문젯거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은 이제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신앙을 위하여 학교의 교과 내용을 17세기 이전의 성경 중심의 내용으로 돌려놓을 수가 있는가? 아니면 신학적으로 다른 대응책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현대의 과학자들 특히 현대 우주 물리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폴 데이비스 박사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그 동안 배워오고 발전하고 있는 인문 과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교회와는 전혀 반대되는 적대 세력인 것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 교과서에 실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이 매우 과학적인 것인양 생각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과학이라는 모든 것은 성경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지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된 성경 하나만을 가지고 변화하는 세상과 우주 전체를 다루고자 하는 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되어진 해석과 만들어 놓은 교리들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의 태도보다는 우주의 법칙속에서 하나님과 진리를 좀 더 발견해 보고자 하는 과학자들 또는 신앙인들의 태도가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겸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 이미 주어진것이고, 우주를 바라보면서 그 심성이 발전되고 결국 하나님을 찾기에 이른 조상들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의 상황에서 오늘날의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과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체에 좀 더 접근해 가려는 노력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적이시고 세상 모든 만물의 위에 주관자로서 존재하신다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분의 것이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그분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과학’이라고 무조건 팽개치고 적대할 것이 아니라 신학이 그들을 포용하고, 그것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이 발견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 오늘의 신학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세상의 다른 종교들에게 기독교가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올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체성으로써의 신학,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마음으로써의 신학, 과학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미래적 신학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문예 부흥과 함께 잃어버렸던 신학의 한 분야인 과학, 특별히 과학에 기초한 우주관을 되찾는 21세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으로서의 과학을 이용하는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과학 교육의 세대들이 그 신학을 통하여, 진리되시는 우주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도록 복음과의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며,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의 우주관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그 내용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렵겠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기록된 바대로 말씀으로 ‘계셨던’ 실체로서의 예수님의 우주적 존재,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대로 우주의 궁극적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말씀’ 즉 ‘로고스’의 우주적인 의미,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실체로서의 의미 등을 더욱 깊이 다루어야하며, 이 문제가 신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순수 과학 이론이나 우주 기원의 논쟁보다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재해석되고 분석되는 일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의 신학적 시도를 더 깊이 연구하는 일도 남겨진 과제이다. 과연 그들의 시도가 신학적으로 또는 진리의 본체이신 하나님께로의 접근에 타당한 일인지를 충분히 논의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많은 부분을 인문주의적인 방법에만 의존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매우 자가당착적인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차라리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보려는 무리들의 솔직한 태도보다도 못한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66권의 첫 시작이 되는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의 방법 위에 기초를 세운다면 성경 전체가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지식은 있으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은 거부되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우주관과 구약 시대의 근동의 우주관을 보다 확실히 아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 이해에 대하여,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와 중세기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학의 발전과 함께 변화되어 온 성경 해석의 방법이 온통 철학의 이론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눈 앞에 한 권의 정경으로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어느 날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이 형성되기까지에도 천 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으며, 신약 성경이 정경으로 유착되기에도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구약 성경이 완성되는 동안에 실제적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하여 씌어졌든지간에 베드로 후서에 기록된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한 성경의 기록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수차례 발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신 개념은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하였음도 살펴보았다. 한편 ‘성경으로만’ 성경이 해석되어야 하고 ‘성경으로만’ 하나님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칼빈의 영향 아래,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마치 불경죄를 짓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좀더 진리에 접근해 보고자 목숨을 바쳐가면서 애썼던 구약 시대보다도 오히려 퇴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신학자들은 현대에 들어와서 너무도 다양하게 추구된 바 있는 하나님의 이해의 혼란에서 빠져 나오려고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하바드 대학의 카우만 교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면서, 모든 계시의 근원으로써 신학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주어진 어떤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이해를 유추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 이해의 방편으로 돌아가자는 현대 신학의 새로운 경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예 부흥이 있기까지 세계의 모든 문화와 과학은 기독교가 주관하였다. 아니 성경이 주관하였다고 하는 편이 보다 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로 자연 과학이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성경의 권위는 점차 실제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신앙은 교회 안에만 갇혀서 과거의 바리새인들이나 엣세네파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이 거룩을 지키고 구원을 유지하는 것으로 변하였으며, 급기야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의 세속화를 부르짖게 되었다. 실제의 생활과 신앙의 생활이 벌어지는만큼 복음은 힘을 잃었으며,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는 서구 사회에는 텅빈 교회들이 사회의 큰 문젯거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교회에서 배우는 내용은 이제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신앙을 위하여 학교의 교과 내용을 17세기 이전의 성경 중심의 내용으로 돌려놓을 수가 있는가? 아니면 신학적으로 다른 대응책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현대의 과학자들 특히 현대 우주 물리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폴 데이비스 박사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그 동안 배워오고 발전하고 있는 인문 과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교회와는 전혀 반대되는 적대 세력인 것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 교과서에 실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이 매우 과학적인 것인양 생각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과학이라는 모든 것은 성경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지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된 성경 하나만을 가지고 변화하는 세상과 우주 전체를 다루고자 하는 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되어진 해석과 만들어 놓은 교리들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의 태도보다는 우주의 법칙속에서 하나님과 진리를 좀 더 발견해 보고자 하는 과학자들 또는 신앙인들의 태도가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겸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 이미 주어진것이고, 우주를 바라보면서 그 심성이 발전되고 결국 하나님을 찾기에 이른 조상들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의 상황에서 오늘날의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과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체에 좀 더 접근해 가려는 노력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적이시고 세상 모든 만물의 위에 주관자로서 존재하신다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분의 것이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그분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과학’이라고 무조건 팽개치고 적대할 것이 아니라 신학이 그들을 포용하고, 그것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이 발견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 오늘의 신학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세상의 다른 종교들에게 기독교가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올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체성으로써의 신학,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마음으로써의 신학, 과학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미래적 신학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문예 부흥과 함께 잃어버렸던 신학의 한 분야인 과학, 특별히 과학에 기초한 우주관을 되찾는 21세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으로서의 과학을 이용하는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과학 교육의 세대들이 그 신학을 통하여, 진리되시는 우주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도록 복음과의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며,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의 우주관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그 내용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렵겠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기록된 바대로 말씀으로 ‘계셨던’ 실체로서의 예수님의 우주적 존재,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대로 우주의 궁극적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말씀’ 즉 ‘로고스’의 우주적인 의미,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실체로서의 의미 등을 더욱 깊이 다루어야하며, 이 문제가 신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순수 과학 이론이나 우주 기원의 논쟁보다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재해석되고 분석되는 일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의 신학적 시도를 더 깊이 연구하는 일도 남겨진 과제이다. 과연 그들의 시도가 신학적으로 또는 진리의 본체이신 하나님께로의 접근에 타당한 일인지를 충분히 논의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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