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실체성
(1) 개념과 실체
하나님 나라의 실체성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 요소를 든다면 초대교회 시대부터 끊임없이 기독교에 침투해 온 영지주의적 사고와 헬라 철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상의 공통점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개념을 실체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영지주의는 미미한 세력을 유지해 오다가 주후 2세기경에 홍수처럼 기독교 안에 밀려들어온 매우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3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지적인 교회들이 이 사상으로 말미암아 시련을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지주의의 체제는 혼합적이고 절충적인 것이어서 그 내용물들을 희랍, 애굽,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의 신화, 철학, 및 종교 등 다양한 부분에서 빌어왔다. 영지주의의 중심이 되는 사상들 중에서 일부는 기독교 탄생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나, 그 신봉자들은 기독교에서 비로소 자기들의 체계에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인 절대성과 보편성 종교의 측면을 발견하고 기독교를 철학화 함으로써 여러 이방 종교들의 가르침과 왜곡된 구약 사상을 관련시켜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영지주의를 의미하는 영어의 ‘Gnosticism’은 ‘지식’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그노시스(γνοσις)’에서 왔는데, 영지주의는 그 구속의 교리에 있어서 영혼이 물질로부터 해방 받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구속을 얻기 위해서는 특별한 비법 또는 비밀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와 관련된 종파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이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데서 그들은 극단적으로 금욕적이거나 쾌락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고 독특한 이단 사상들을 출발시켰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 장정과 함께 근동에 퍼진 헬라 철학은 유대주의와 만남으로써 다양한 영역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70인역이 만들어졌으며, 필로는 이곳에서 구약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을 발전시켰다. 때때로 유대인들은 완전히 헬라화 되어 그들의 독특한 주체성이 단지 율법 준수와 회당 예배를 통해서만 유지되기도 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기독교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지만, 바울의 신학은 그 흔적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지중해 전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촉진시켰던 헬레니즘 문화의 동일한 특징들은 믿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이끌어 내었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적지 않은 긴장감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물질주의적 현상들로부터 본질을 추구해 들어간 헬라 철학이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개념적 정의들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실체를 거부하는 오류에 빠졌는데, 이러한 영향이 기독교 안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정신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전수되는 과정에서 그 실체성에 대한 소개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과 그 실체성을 강력히 주장한 반면, 헬라의 이방 세계에 매우 효과적으로 복음 전파하는 공헌을 세운 바울에게서는 그러한 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다녀왔다는 고백을 하고 있지만(고후 12:2),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환상 속에서의 비 실체적인 세계였음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및 부활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체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진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유일한 길로 제시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 속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실체를 설명하는 것이 개념이 될 수는 있어도, 개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실체이다.
실체를 계시하기 위해서는 그 계시를 담을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참조: Paul Rowntree Clifford, The Reality of the Kingdom(GranRapids: Eerdmans, 1996), p.2.) 문자 또는 언어 등의 전달수단이나 어떤 개념들 뒤에 숨어있는 사실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마찬가지이며, 예수가 증거한 하나님의 나라 역시 그러하다. 바울이 해석하고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실체를 담는 그릇과 같았다. 물론 그 그릇이 없다면 실체를 담아서 전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 즉 실체이며, 그릇의 역할은 그 내용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전달하는 데 있다. Paul Rowntree Clifford는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논함에 있어서 복음서 및 바울 서신을 선입견을 제거한 비판적 시각에서 다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참조: Ibid, pp.7-13.) 십자가와 부활 및 승천을 포함한 예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내용물 즉 인간에게 비로소 도래하게 된 하나님의 통치와 사후(死後)에 들어가게 될 실체적 하나님 나라를 전달하는 그릇이었다. 바울이 그 그릇을 헬라 철학과 유대교적 배경을 이용하여 참으로 훌륭하게 장식한 것은 그의 엄청나게 큰 업적이고, 그의 수고를 통하여 2,000년 동안 기독교가 힘을 얻고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음 자체는 십자가에 의해서 과도하게 채색되었으며, 모든 기록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영광의 주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강조한 것이 사실이다.(참조: Ibid, p.56.)
(2) 공간과 하나님 나라
이제는 예수가 증거한,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나라를 실체성의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의견들을 제시해 왔지만, 공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신도들은 주일학교 시절에 들었던 막연한 개념만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간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II장에서 논거한 전제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들은 공간과 시간은 물질 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물질세계 속에는 영적인 것이 함께 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극단적인 물질주의 개념에서 해석하든지 아니면 그와는 정 반대로 영적인 개념만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와 그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영적인 존재들이 물질 세계 속에 공존하는 여러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참조: 예: ① 마 1:20, 2:13, 2:22 현몽하여 나타난 주의 사자들의 인도를 받음 ② 마 4:1-11, 막 1:12-13, 눅 4:1-13 예수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음, 천사들이 수종듬 ③ 마 3:17, 마 17:5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 ④ 인간 속에 작용하는 귀신들을 쫓아냄 ⑤ 마 17:3, 막 9:2-8, 눅 9:28-36 천상의 존재들이 예수와 대화를 나눔 ⑥ 마 3:16, 행 2:1-4 성령이 임함 ⑦ 마 28:5-7 천사들과의 대화 ⑧ 기타 많은 사건들과 말씀들) 따라서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공간 속에서 이원론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영역이 아니며, 그것은 성질상으로 다른 세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통적인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물질적인 세계 즉 우리가 육체 속에서 현재 살고 있는 ‘이곳’과, 육신의 장막을 벗고 들어가는 영의 세계 즉 원초적인 하나님의 나라인 ‘그곳’으로 철저하게 구별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선입견과 개념을 가지고서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말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공간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의 출처에 대해 여러 번 분명하게 대답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 왔다는 것과 또한 해를 받은 후에 ‘이곳’으로부터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였다.(참조: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 14:2-4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그곳’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분명히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였다.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곳’이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이미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 즉 물질 세계 전체를 하나의 균질성을 내포하는 풍선 모양으로 생각한다면 ‘그곳’은 풍선 밖에 있어야 하고 ‘이곳’은 풍선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으로는 예수가 분명히 말씀한 ‘내가 거하는 곳’ 그리고 너희도 나와 함께 거하게 될 ‘그곳’이 어디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한편, 물질적인 그 우주를 도우넛 모양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도우넛 안에 있는 공간(실제적으로는 물질계에서 생각하는 그런 공간이 아닌)이 어떤 전혀 다른 성질의 장소라고 한다면, 즉 영적으로 완전한 상태의 어떤 곳이라고 가정한다면 ‘이곳’과 ‘그곳’을 공간적인 개념의 단어를 사용해서도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사실 예수가 ‘이곳’에 와서 인간들의 언어를 가지고 ‘그곳’을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서로가 동일한 선험적 개념을 갖고 있을 때에야 정확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공간적인 개념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곳’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였을 때, 그 단어들이 물질적인 공간적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는 의미에서 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계시한 ‘그곳’의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우주와 공존하는(위치적으로 반드시 동일 공간이 아닌) 어떤 실체인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환상 속에서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었다고 기록한 내용을 우리는 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의 선입견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것은 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대기권 밖 저 멀리 있는 세 겹의 하늘이다. 그러니 그 세 번째 하늘은 광활한 이 우주보다 훨씬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고, 그 위치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세 번째 하늘을 앞에서 이야기한 도우넛 모양의 우주 개념을 도입하고 지구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원초적인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우주관을 도입한다면, 그 세 번째 하늘은 하나님에게로 더 접근해 가는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우주 물리학은 하나님 나라와 이 공간과의 관계의 문제를 규명하는 일에 좀 더 발전된 개념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서론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과학자들은 우주 내부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공간을 ‘Black Hole’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가설을 세움으로써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론에 의하면(이것은 아직 이론에 불과하다) Black Hole의 내부는 물질 세계의 질서 또는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곳은 중력 작용이 너무나 강해서 어떤 것도 물질로 존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물질 세계의 공간이나 시간의 원리 또는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과학자들은 공간도 시간도 없는 그 장소가 우주 안에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증명하고 있다. 20세기까지만 하여도 그러한 이론은 가정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수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제한 조건이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곳’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의 개념이 적용되든지 아니면 다른 개념이 적용되든지에 상관없이 분명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과학의 증명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단원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3) 시간과 하나님 나라
공간의 문제보다 시간과 하나님 나라 관계의 문제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여러 모형으로 제기된 바 있다. 이 모형에 따라서 혹자는 ‘실현된 종말론’을, 혹자는 ‘임박한 미래적 종말론’을 또 어떤 사람들은 ‘실현되어 가는 과정의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미래성과 현재성으로 구분하여 명료하게 제기한 신학자 중에 G. E. Ladd가 있다. 그의 저서 “The Gospel of the Kingdom”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먼저 알아보자.(참조: G. E.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Grand Rapids: Eerdmans, 1995), pp.24-51.)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지배 즉 통치권의 임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와 미래 양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그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재의 영역과 미래의 영역 양쪽을 모두 창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요, 이를 수반하는 은총의 향유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 세대에 완전하게 실현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 교리를 신학의 중심에 두고 두 세대 즉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대에 속한 것이 아님을 성경을 근거로 하여 주장하고,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는 세대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는 그 시점에 비로소 오는 세대가 시작된다고 보는 반면,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오는 세대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Ladd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입장을 지지하든 대개의 신학자들은 연속적인 시간관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시간을 축으로 하는 직선을 그려놓고 그 직선 위의 어느 한 시점을 잡아서 거기에 예수의 재림을 상정하고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분명한 개념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한 시간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한 발 더 나아가서, 현재로 확장된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학관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관념 속에서나 가능한, 언제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한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전파한 복음 즉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가까이 왔고, 너희들 가운데 이미 있으며, 또 장차 이루어질 그러한 복합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제시하고 판넨베르그가 하나님 나라 개념에 적용시킨 시간관을 도입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나님은 흘러가는 강가에 앉아서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고기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고기잡이처럼 흘러가는 시간(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실체로 보고 연속적인 시간으로 보는)을 지켜보다가 어떤 상황에 이르면 그 물을 모두 순간적으로 없애버리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인간의 기억과 사고 속에서 작용하는 어떤 에너지일 뿐이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은 그 현재 속에서 과거를 주장하셨고 또 미래를 현재 속으로 창조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의 실체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거에 존재했을 수도 없고 미래에 존재하게 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고, 미래의 가능성 또는 잠재력이라는 실체(가능성 또는 잠재력도 영원의 개념 속에서는 실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로 현재 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이러한 시간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면, 그 나라는 이미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실체로써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시간 속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며 물질 세계와 함께 시간도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하나로 보며, 모든 시간을 현재로 본다고 설명하였다.(참조: 노만 가이슬러, Op. Cit., pp.88-89.) 하나님이 시간 속에 계시지 않다는 말과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말은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시간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시간과 관계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신다함은 실체가 아닌 과거와 미래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유일한 실체인 현재 속에서 과거의 모든 흔적을 장악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역사 속에 미래의 잠재력을 실현시키신다는 의미가 더 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의 시간으로 볼 때에도 실체이고, 현재의 시간으로 볼 때에도 실체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에 이야기할 하나님 나라 실현의 다중성(多重性)과 연관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
(4) 현대 우주물리학과 하나님 나라
금세기 초, 물리학에는 두 개의 기념비적인 이론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다.(참조: 폴 데이비스,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유시화 역, (서울: 정신세계사, 1996), pp.19-29.) 20세기 물리학의 대부분이 이 두 이론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그보다 더 단순하고 훌륭한 물질세계의 모형을 만들어 내었다. 이 새로운 발견을 통해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참모습에 대한 근본 시각을 통째로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통적인 상식을 뒤엎고 아주 뜻밖의 참신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터득하였으며, 물질주의보다는 오히려 신비주의에 더 가깝다고 할 정도의 새로운 길을 택하기 시작하였다.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이러한 존재관에 있어서의 혁명이 이제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으며, 삶의 배후에 숨어 있는 더 깊은 인생의 참뜻을 찾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 역시 현대 물리학의 이 새로운 개념에 맞추어 변화되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과 우주와 존재를 생각하는 방식은 크게 종교와 과학 두 가지로 나타났다. 종교는 우리의 삶과 행동 양식을 다스리는 강력한 정신적 힘에 관심을 둔 반면 과학은 물질 문명을 통한 인류 환경 변화 모색에 관심을 두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과학의 성공과 영향력이 커질수록 종교적인 영향력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과학과 종교가 본질적으로 상반되고 심지어 적대적 관계라는 선입견 때문에 과학의 진보는 그 발달에 상당한 지장을 받아왔으며, 주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학이 발달되어온 반면에 이러한 방해가 역으로 기독교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이 어느 단계에 오르게 되자, 과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물리학은 작게는 원자의 내부 작용에서부터 크게는 우주 밖의 블랙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비한 비밀들을 밝혀주고 있다.
과학자와 신학자는 전적으로 다른 출발점에서,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갖고 추구해 들어간다. 과학은 서로 다른 경험들을 공통적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이론이 성립될 수 있도록 하는 정밀한 관찰과 실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물질과 힘의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과학자는 자연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들을 찾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만일 지금까지 가정하고 적용하였던 어떤 이론에 대해 반대되는 증거가 나타나면 그 이론을 기꺼이 포기하는 열린 자세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는 계시를 받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인정하는 어떤 지혜에 기초를 두었다. 종교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수많은 과학 실험보다도 개인적 계시를 정당한 근거로 삼는다. 과학자들은 개인적인 이 기초에 대하여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계시 받은 진리에 대하여 의심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반드시 차갑고 딱딱하고 계산적인 인간들이며 영혼이 없이 오로지 사실과 숫자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 두각을 나타냈던 과학자들 대부분이 종교인들이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이 성장함에 따라, 과학이 갖고 있는 깊은 철학적인 의미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을 뿐이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과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추구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가 분리된 이래(참조: 원래는 과학이 종교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문예부흥 이후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말미암아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1996년도 M.Div.학위 논문 “우주관과 신관의 발달에 관한 연구” 참조) 두 조류는 정신계와 물질계 사이에 분명한 구분선을 긋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것을 꺼리면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비난하면서 공존해 왔다. 과학이 물질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으로 정신계의 구분선을 넘어간 학문이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구분선을 아예 허물어 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질계의 법칙과 원리를 추구해 들어가면서, 특히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제는 그 한계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계와 물질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강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가 규칙적으로 운행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 중에는 중력을 비롯한 과학이 규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 이외에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으며, 이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이 21세기 물리학의 최대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참조: 본인은 이것을 정신적 또는 영적인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과학자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완전하고 유일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각각 출발점은 달랐지만 진리를 추구해 들어갈수록 서로 접근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며, 이미 그렇게 되어 가는 현상이 현대 물리학 또는 생명과학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과학 발전에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과학을 진리 발견의 도구로 삼고, 오늘의 시대에 맞는 복음 해석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는 하나의 실체라고 한다면, 정신적 또는 영적인 힘이 우주 안에 작용하고 있음을 과학이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과학의 접근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개념과 실체
하나님 나라의 실체성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 요소를 든다면 초대교회 시대부터 끊임없이 기독교에 침투해 온 영지주의적 사고와 헬라 철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상의 공통점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개념을 실체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영지주의는 미미한 세력을 유지해 오다가 주후 2세기경에 홍수처럼 기독교 안에 밀려들어온 매우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3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지적인 교회들이 이 사상으로 말미암아 시련을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지주의의 체제는 혼합적이고 절충적인 것이어서 그 내용물들을 희랍, 애굽,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의 신화, 철학, 및 종교 등 다양한 부분에서 빌어왔다. 영지주의의 중심이 되는 사상들 중에서 일부는 기독교 탄생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나, 그 신봉자들은 기독교에서 비로소 자기들의 체계에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인 절대성과 보편성 종교의 측면을 발견하고 기독교를 철학화 함으로써 여러 이방 종교들의 가르침과 왜곡된 구약 사상을 관련시켜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영지주의를 의미하는 영어의 ‘Gnosticism’은 ‘지식’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그노시스(γνοσις)’에서 왔는데, 영지주의는 그 구속의 교리에 있어서 영혼이 물질로부터 해방 받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구속을 얻기 위해서는 특별한 비법 또는 비밀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와 관련된 종파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이 악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데서 그들은 극단적으로 금욕적이거나 쾌락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고 독특한 이단 사상들을 출발시켰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 장정과 함께 근동에 퍼진 헬라 철학은 유대주의와 만남으로써 다양한 영역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70인역이 만들어졌으며, 필로는 이곳에서 구약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을 발전시켰다. 때때로 유대인들은 완전히 헬라화 되어 그들의 독특한 주체성이 단지 율법 준수와 회당 예배를 통해서만 유지되기도 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기독교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지만, 바울의 신학은 그 흔적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지중해 전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촉진시켰던 헬레니즘 문화의 동일한 특징들은 믿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이끌어 내었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적지 않은 긴장감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물질주의적 현상들로부터 본질을 추구해 들어간 헬라 철학이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개념적 정의들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실체를 거부하는 오류에 빠졌는데, 이러한 영향이 기독교 안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정신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전수되는 과정에서 그 실체성에 대한 소개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과 그 실체성을 강력히 주장한 반면, 헬라의 이방 세계에 매우 효과적으로 복음 전파하는 공헌을 세운 바울에게서는 그러한 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다녀왔다는 고백을 하고 있지만(고후 12:2),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환상 속에서의 비 실체적인 세계였음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및 부활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체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진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유일한 길로 제시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 속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실체를 설명하는 것이 개념이 될 수는 있어도, 개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실체이다.
실체를 계시하기 위해서는 그 계시를 담을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참조: Paul Rowntree Clifford, The Reality of the Kingdom(GranRapids: Eerdmans, 1996), p.2.) 문자 또는 언어 등의 전달수단이나 어떤 개념들 뒤에 숨어있는 사실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마찬가지이며, 예수가 증거한 하나님의 나라 역시 그러하다. 바울이 해석하고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실체를 담는 그릇과 같았다. 물론 그 그릇이 없다면 실체를 담아서 전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 즉 실체이며, 그릇의 역할은 그 내용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전달하는 데 있다. Paul Rowntree Clifford는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논함에 있어서 복음서 및 바울 서신을 선입견을 제거한 비판적 시각에서 다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참조: Ibid, pp.7-13.) 십자가와 부활 및 승천을 포함한 예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내용물 즉 인간에게 비로소 도래하게 된 하나님의 통치와 사후(死後)에 들어가게 될 실체적 하나님 나라를 전달하는 그릇이었다. 바울이 그 그릇을 헬라 철학과 유대교적 배경을 이용하여 참으로 훌륭하게 장식한 것은 그의 엄청나게 큰 업적이고, 그의 수고를 통하여 2,000년 동안 기독교가 힘을 얻고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음 자체는 십자가에 의해서 과도하게 채색되었으며, 모든 기록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영광의 주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강조한 것이 사실이다.(참조: Ibid, p.56.)
(2) 공간과 하나님 나라
이제는 예수가 증거한,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나라를 실체성의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의견들을 제시해 왔지만, 공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신도들은 주일학교 시절에 들었던 막연한 개념만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간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II장에서 논거한 전제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들은 공간과 시간은 물질 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물질세계 속에는 영적인 것이 함께 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극단적인 물질주의 개념에서 해석하든지 아니면 그와는 정 반대로 영적인 개념만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와 그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영적인 존재들이 물질 세계 속에 공존하는 여러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참조: 예: ① 마 1:20, 2:13, 2:22 현몽하여 나타난 주의 사자들의 인도를 받음 ② 마 4:1-11, 막 1:12-13, 눅 4:1-13 예수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음, 천사들이 수종듬 ③ 마 3:17, 마 17:5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 ④ 인간 속에 작용하는 귀신들을 쫓아냄 ⑤ 마 17:3, 막 9:2-8, 눅 9:28-36 천상의 존재들이 예수와 대화를 나눔 ⑥ 마 3:16, 행 2:1-4 성령이 임함 ⑦ 마 28:5-7 천사들과의 대화 ⑧ 기타 많은 사건들과 말씀들) 따라서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공간 속에서 이원론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영역이 아니며, 그것은 성질상으로 다른 세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통적인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물질적인 세계 즉 우리가 육체 속에서 현재 살고 있는 ‘이곳’과, 육신의 장막을 벗고 들어가는 영의 세계 즉 원초적인 하나님의 나라인 ‘그곳’으로 철저하게 구별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선입견과 개념을 가지고서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말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공간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의 출처에 대해 여러 번 분명하게 대답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 왔다는 것과 또한 해를 받은 후에 ‘이곳’으로부터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였다.(참조: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 14:2-4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그곳’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분명히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였다.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곳’이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이미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 즉 물질 세계 전체를 하나의 균질성을 내포하는 풍선 모양으로 생각한다면 ‘그곳’은 풍선 밖에 있어야 하고 ‘이곳’은 풍선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으로는 예수가 분명히 말씀한 ‘내가 거하는 곳’ 그리고 너희도 나와 함께 거하게 될 ‘그곳’이 어디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한편, 물질적인 그 우주를 도우넛 모양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도우넛 안에 있는 공간(실제적으로는 물질계에서 생각하는 그런 공간이 아닌)이 어떤 전혀 다른 성질의 장소라고 한다면, 즉 영적으로 완전한 상태의 어떤 곳이라고 가정한다면 ‘이곳’과 ‘그곳’을 공간적인 개념의 단어를 사용해서도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사실 예수가 ‘이곳’에 와서 인간들의 언어를 가지고 ‘그곳’을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서로가 동일한 선험적 개념을 갖고 있을 때에야 정확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공간적인 개념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곳’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였을 때, 그 단어들이 물질적인 공간적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는 의미에서 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계시한 ‘그곳’의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우주와 공존하는(위치적으로 반드시 동일 공간이 아닌) 어떤 실체인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환상 속에서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었다고 기록한 내용을 우리는 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의 선입견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것은 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대기권 밖 저 멀리 있는 세 겹의 하늘이다. 그러니 그 세 번째 하늘은 광활한 이 우주보다 훨씬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고, 그 위치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세 번째 하늘을 앞에서 이야기한 도우넛 모양의 우주 개념을 도입하고 지구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원초적인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우주관을 도입한다면, 그 세 번째 하늘은 하나님에게로 더 접근해 가는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우주 물리학은 하나님 나라와 이 공간과의 관계의 문제를 규명하는 일에 좀 더 발전된 개념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서론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과학자들은 우주 내부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공간을 ‘Black Hole’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가설을 세움으로써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론에 의하면(이것은 아직 이론에 불과하다) Black Hole의 내부는 물질 세계의 질서 또는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곳은 중력 작용이 너무나 강해서 어떤 것도 물질로 존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물질 세계의 공간이나 시간의 원리 또는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과학자들은 공간도 시간도 없는 그 장소가 우주 안에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증명하고 있다. 20세기까지만 하여도 그러한 이론은 가정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수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제한 조건이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곳’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의 개념이 적용되든지 아니면 다른 개념이 적용되든지에 상관없이 분명한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과학의 증명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단원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3) 시간과 하나님 나라
공간의 문제보다 시간과 하나님 나라 관계의 문제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여러 모형으로 제기된 바 있다. 이 모형에 따라서 혹자는 ‘실현된 종말론’을, 혹자는 ‘임박한 미래적 종말론’을 또 어떤 사람들은 ‘실현되어 가는 과정의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미래성과 현재성으로 구분하여 명료하게 제기한 신학자 중에 G. E. Ladd가 있다. 그의 저서 “The Gospel of the Kingdom”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먼저 알아보자.(참조: G. E.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Grand Rapids: Eerdmans, 1995), pp.24-51.)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지배 즉 통치권의 임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와 미래 양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그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재의 영역과 미래의 영역 양쪽을 모두 창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요, 이를 수반하는 은총의 향유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 세대에 완전하게 실현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 교리를 신학의 중심에 두고 두 세대 즉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대에 속한 것이 아님을 성경을 근거로 하여 주장하고,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는 세대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는 그 시점에 비로소 오는 세대가 시작된다고 보는 반면,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오는 세대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Ladd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입장을 지지하든 대개의 신학자들은 연속적인 시간관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시간을 축으로 하는 직선을 그려놓고 그 직선 위의 어느 한 시점을 잡아서 거기에 예수의 재림을 상정하고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분명한 개념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한 시간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한 발 더 나아가서, 현재로 확장된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학관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관념 속에서나 가능한, 언제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한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전파한 복음 즉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가까이 왔고, 너희들 가운데 이미 있으며, 또 장차 이루어질 그러한 복합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제시하고 판넨베르그가 하나님 나라 개념에 적용시킨 시간관을 도입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나님은 흘러가는 강가에 앉아서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고기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고기잡이처럼 흘러가는 시간(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실체로 보고 연속적인 시간으로 보는)을 지켜보다가 어떤 상황에 이르면 그 물을 모두 순간적으로 없애버리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인간의 기억과 사고 속에서 작용하는 어떤 에너지일 뿐이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은 그 현재 속에서 과거를 주장하셨고 또 미래를 현재 속으로 창조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의 실체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거에 존재했을 수도 없고 미래에 존재하게 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고, 미래의 가능성 또는 잠재력이라는 실체(가능성 또는 잠재력도 영원의 개념 속에서는 실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로 현재 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이러한 시간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면, 그 나라는 이미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실체로써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시간 속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며 물질 세계와 함께 시간도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하나로 보며, 모든 시간을 현재로 본다고 설명하였다.(참조: 노만 가이슬러, Op. Cit., pp.88-89.) 하나님이 시간 속에 계시지 않다는 말과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말은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시간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시간과 관계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신다함은 실체가 아닌 과거와 미래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유일한 실체인 현재 속에서 과거의 모든 흔적을 장악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역사 속에 미래의 잠재력을 실현시키신다는 의미가 더 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의 시간으로 볼 때에도 실체이고, 현재의 시간으로 볼 때에도 실체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에 이야기할 하나님 나라 실현의 다중성(多重性)과 연관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
(4) 현대 우주물리학과 하나님 나라
금세기 초, 물리학에는 두 개의 기념비적인 이론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다.(참조: 폴 데이비스,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유시화 역, (서울: 정신세계사, 1996), pp.19-29.) 20세기 물리학의 대부분이 이 두 이론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그보다 더 단순하고 훌륭한 물질세계의 모형을 만들어 내었다. 이 새로운 발견을 통해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참모습에 대한 근본 시각을 통째로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통적인 상식을 뒤엎고 아주 뜻밖의 참신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터득하였으며, 물질주의보다는 오히려 신비주의에 더 가깝다고 할 정도의 새로운 길을 택하기 시작하였다.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이러한 존재관에 있어서의 혁명이 이제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으며, 삶의 배후에 숨어 있는 더 깊은 인생의 참뜻을 찾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 역시 현대 물리학의 이 새로운 개념에 맞추어 변화되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과 우주와 존재를 생각하는 방식은 크게 종교와 과학 두 가지로 나타났다. 종교는 우리의 삶과 행동 양식을 다스리는 강력한 정신적 힘에 관심을 둔 반면 과학은 물질 문명을 통한 인류 환경 변화 모색에 관심을 두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과학의 성공과 영향력이 커질수록 종교적인 영향력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과학과 종교가 본질적으로 상반되고 심지어 적대적 관계라는 선입견 때문에 과학의 진보는 그 발달에 상당한 지장을 받아왔으며, 주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학이 발달되어온 반면에 이러한 방해가 역으로 기독교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이 어느 단계에 오르게 되자, 과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물리학은 작게는 원자의 내부 작용에서부터 크게는 우주 밖의 블랙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비한 비밀들을 밝혀주고 있다.
과학자와 신학자는 전적으로 다른 출발점에서,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갖고 추구해 들어간다. 과학은 서로 다른 경험들을 공통적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이론이 성립될 수 있도록 하는 정밀한 관찰과 실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물질과 힘의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과학자는 자연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들을 찾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만일 지금까지 가정하고 적용하였던 어떤 이론에 대해 반대되는 증거가 나타나면 그 이론을 기꺼이 포기하는 열린 자세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는 계시를 받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인정하는 어떤 지혜에 기초를 두었다. 종교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수많은 과학 실험보다도 개인적 계시를 정당한 근거로 삼는다. 과학자들은 개인적인 이 기초에 대하여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계시 받은 진리에 대하여 의심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반드시 차갑고 딱딱하고 계산적인 인간들이며 영혼이 없이 오로지 사실과 숫자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 두각을 나타냈던 과학자들 대부분이 종교인들이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이 성장함에 따라, 과학이 갖고 있는 깊은 철학적인 의미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을 뿐이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과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추구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가 분리된 이래(참조: 원래는 과학이 종교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문예부흥 이후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말미암아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1996년도 M.Div.학위 논문 “우주관과 신관의 발달에 관한 연구” 참조) 두 조류는 정신계와 물질계 사이에 분명한 구분선을 긋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것을 꺼리면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비난하면서 공존해 왔다. 과학이 물질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으로 정신계의 구분선을 넘어간 학문이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구분선을 아예 허물어 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질계의 법칙과 원리를 추구해 들어가면서, 특히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제는 그 한계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계와 물질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강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가 규칙적으로 운행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 중에는 중력을 비롯한 과학이 규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 이외에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으며, 이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이 21세기 물리학의 최대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참조: 본인은 이것을 정신적 또는 영적인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과학자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완전하고 유일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각각 출발점은 달랐지만 진리를 추구해 들어갈수록 서로 접근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며, 이미 그렇게 되어 가는 현상이 현대 물리학 또는 생명과학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과학 발전에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과학을 진리 발견의 도구로 삼고, 오늘의 시대에 맞는 복음 해석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는 하나의 실체라고 한다면, 정신적 또는 영적인 힘이 우주 안에 작용하고 있음을 과학이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과학의 접근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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