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우주관(3) -신약시대의 우주관과 신관
1) 고대 이집트와 헬라 우주관의 영향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천문학의 기본이 대부분 고대 즉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이미 통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천문학을 토대로 하여 일 년을 365일로 계산하였다는 기록이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며, 그에 의하면 기원전 1,100년에 이미 일 년을 365.25날로 계산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중국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것이 통용되었고, 달을 기준으로 하는 대신에 해를 기준으로 날자를 정하였다.
이집트의 제사장들은 우주를 바라보는 관측자들이었다. 나일강이 항상 범람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원인을 캐기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을 것이며, 결국 천체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별들을 36개의 무리로 나누어 관측하였으며, 기원전 1,300년 이전에 이미 해가 뜨는 각도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에집트에 건축된 피라밋의 구조 역시 별자리의 이동에 마추어져 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7세기 경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간격을 이용한 시계를 사용하였다. 자연 현상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일은 중국에서도 활발하게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3,000년경에 육신의 구조와 우주를 연결시켜 연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육안으로 식별될 수 있었던 혜성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으며, 현대의 천문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그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던 것이다.
천체에 대한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후에 인도와 유럽지역으로 흘러들어갔으며, 한 편으로는 신화와 토속 신앙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였지만,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발전도 끊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은 헬라 문화의 번영과 함께, 그리고 로마의 세계 지배에 편승하여 황금기를 누렸으나, A.D.5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중세 시대에는 이것 역시 암흑기를 맞이하여 전혀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교황청의 지시 이외에는 전혀 학문적 연구를 할 수 없는 시대가 1,0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A.D.1,500년 경 문예 부흥과 함께 학문적인 연구가 다시 자유로워지기까지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들은 잠을 자고 있었으며, 귀중한 자료들과 연구 결과들이 분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주에 대해 눈을 뜬 것은 근대 또는 현대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에 많은 연구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집트에 우뚝 서 있는 피라밋들을 보면서 고대인들은 우주를 논하고, 별자리들을 연구하였으며, 세상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을 해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절대자를 생각할 때, 막연한 신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우주를 직접 주관하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직접 주장하는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어떤 민족들은 그 신을 태양으로 상징화하였으며, 또 어떤 민족들은 달을 그 신에 비유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단순히 미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매우 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하여, 우주와 신 개념을 관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우주관이 로마 제국의 번성과 함께 세계로 퍼져나간 후에 신약의 시대가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진 근동과 유럽의 우주관
고대 페르시아의 빛의 신(Mithraism)을 섬기던 종교(신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가장 널리 퍼졌던 것이며, 기독교의 발흥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번영기를 누렸다. 이 종교를 신봉하던 사원을 mithraea라고 부르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수백 개가 발견되었으며, 팔레스틴으로부터 영국, 독일, 스페인에 이르는 거의 전 지역의 유럽에 분포되어있다. 특별히 로마 근처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로마의 군인들과 상인들 그리고 귀부인들이 신자의 무리를 이룬 것으로 판명된다. 규모는 한번에 20 내지 30명이 참석할 수 있는 크기이고, 길이 75피트, 넓이 30피트의 타원형 석굴이 대부분이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인도의 Mithra가 헬라어 또는 라틴어로 번역이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신교의 사원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황소를 죽이는 상’이다. 조각 또는 그림의 형태로 발견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칼로 황소를 죽이는 장면이다. 만약에 이 신교가 인도의 Mithra에서 온 것이라면 인도의 신화에 이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도의 신화에는 그러한 비슷한 내용도 없다. 이것은 신교의 근원지가 인도 또는 아시아가 아니라 근동의 일대에서 생겨난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써, 새로운 각도의 연구를 가능케 하는 동기가 되었다. 1971년 몇몇 학자들이 고대의 우주 지도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그 결과 놀라운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 해석법은 두 가지를 고려하여 진행되었다. 하나는 모든 그림들에 순서적으로 나타나는 하늘의 띠와 형상들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의 행성들에 관한 그림들이다. 또한 Porphyry등의 고대 철학자들은 신교가 우주관과 연관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David Ulansey는 고대 로마시대(기원전 1세기 이후)의 우주관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고대인들은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우주가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우주는 별자리들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하였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우주를 두개의 띠로써 표시하여 상징으로 나타내었으며, 각 띠는 12개의 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 띠는 2160년마다 다른 별자리가 오도록 서서히 회전을 하며, 결국 25,920년에 한 바퀴를 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은 황소 자리가 된다.
기원전 128년 Hipparchus는 이러한 우주의 행성들이 움직이는 원칙을 발전시켰고 그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황소를 죽이는 남자가 우주의 새로운 실권자가 된다는 상징이 도입되었다고 보지만, 이러한 우주관이 정착되기까지에는 적어도 10세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신교의 신전에서 보여지고 있는 대부분의 그림이나 조각들이 우주와 관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대개 뱀의 형상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Hipparchus가 이론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 신교의 뿌리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이미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황소에 관계된 신화들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미발달된 우주관들이 근동의 신화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되는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들과 관계된 많은 조각품들이나 벽화들에서도 이와 같은 해석의 근저를 찾을 수 있다.
David Ulansey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바벨론 등의 근동에서 발견된 신화들에서 찾을 수 있는 우주관보다 훨씬 발전되고 고차원적인 우주관이 이미 고대인들의 지식속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별자리 지도나 고대의 항해술의 발달등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신교가 본격화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247년의 Plato의 대화에서도 그의 영이 우주 밖으로 여행하였다는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 지혜자들이 만약에 우주관을 주변의 설화들에서 빌어와서 변형시켰다면, 보다 고차원적인 설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벨론이나 가나안의 것을 토대로 했겠는가 하는 의심이 가는 것이다. 오히려 우주에 대한 어떤 계시가 고대인들에게 상당히 밝혀져 있었으며, 그러한 내용이 왜곡 발전되어 여러 민족들과 문화들속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한편 유대인들이 간직하였던 설화와 구전이 원래의 계시 내용에 가장 근접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 신약 시대의 우주관과 예수 그리스도
a. 점성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전된 점성술은 고대로부터 별들과 유성들의 정연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에서 파생되어 나타난 것으로써, 별들이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사람이 태어난 때의 별들의 배치 상태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별의 영을 이해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별이 곧 신이라는 플라톤의 믿음은 점성술적인 사변과 희랍 철학의 전통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고, 헬라의 다른 철학자들은 점성술과 수학을 결합시키므로써 별들의 움직임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그 결과 헬라 제국의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의 사람들은 별들의 힘을 두려워하였으며, 별의 영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영혼의 비밀을 배우려는 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 길을 통해서만 별들에 의해 접지된 사람들의 운명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으며, 하늘에 대한 신령한 지식을 갖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영지주의’의 토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영지주의가 A.D.100년 이후의 후기에 이르러 많은 신비 종교들과 신화들을 끌어들이고, 이방의 모든 종교 예식들을 흡수하는 혼합주의에 빠진 것은 이러한 그들의 사상적 출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 교회가 확실한 형태를 갖추기까지 이스라엘 및 근동의 일반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영지주의적 요소들은 초기 기독교의 사상과도 매우 유사하였으므로, 크게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신비적 요소들이 아무런 거부감없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며, 우주적인 천국의 개념과 현세에서의 복음의 역할에 대하여 이 점성술 또는 당시 우주관이 일조를 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b. 신비 종교
여러 종류의 신비 종교들이 신약 시대에 근동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배타적인 그들의 성향 때문에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시스와 오리시스 신에 대한 신화가 이집트에서 전해내려 왔는데, 이것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주후 2세기 초에는 신비 주의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플루타크에 의해 찬미를 받을 정도였다. 헬라 문화권에는 신화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신비적 제의가 행해졌으며, 정치권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는 등, 단순한 계절적 축제의 개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특히 당시에 핍박받는 하층민들과 노예들 속에서는 하나의 도피처 역할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상류 계층의 사람들도 불확실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여 안정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신비 종교로 몰려들었다.
c.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하여 근동의 세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한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메시야를 고대하는 마음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공통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헬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들을 배경으로 하는 신비주의 종교들에서도 어떤 강력한 왕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으며, 특별히 유대인들 중에서 선지서들을 믿었던 평민 또는 하층민들은 그 날을 무척 고대하였다. 여러 차례의 혁명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러한 메시야사상을 널리 전했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Suetonius는 이에 대하여 “유대에서 한 왕이 나타나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예언이 동방에 널리 퍼져있다.”고 기록하였으며, Tacitus는 “동방이 강력해지고, 유대로부터 한 지배자가 나와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던 점성술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학과 과학 또는 의학과도 연관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뛰어난 사람은 일반인들에게 크게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오늘날의 미신적인 개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동방으로부터의 별과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추측하기를, 기원전11년에 핼리혜성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며, 기원전7년에는 Saturn과 Jupiter가 거의 일직선에 놓였을 것이므로 밝게 빛났을 것이라고 하며, 기원전5년에서 기원전6년 사이에 특이한 현상이 천체에 벌어졌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의 점성가들은 매우 흥분하였을 것이며, 어떤 위대한 왕이 출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신비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하여 당시의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지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우주의 현상과 현세를 연결시키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한 배경에 마추어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의 범위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탄생 자체가 우주와의 어떤 관련성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속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하늘에 “계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늘에”라는 공간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셨으며, 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 속에서도 공간적인 의미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개념적인 철학적 의미만의 신 개념이나 천국 개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개념들을 오로지 철학적인 관념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4) 신약 시대 이후의 신관
a.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신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하나님에 관한 이해는 그 장을 달리하는 큰 변화가 있었다. 더 이상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인 하나님, 모든 민족의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구원주로서의 하나님, 공의만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이해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사도들의 활동에 이어서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들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에 의하여 정립되기 시작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는 아직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 형식화된 교리들도 없었으며, 그들의 주된 관심은 새로운 기독교적 생활을 추구하는 일에만 집중되었다. 그들은 ‘두 길’ 즉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는 명확한 원리는 형성하였지만, 그들의 교리적 표현은 매우 산발적인 것이었다.
사도 후 교부들은 이교의 다신교적 신앙에 반대하여 구약 성서적 의미에 있어서의 유일신교에 집착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요,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시는 자이다. 그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파악할 수도 없으며, 창조되지 아니하고 영원하시며, 아무것도 부족을 느끼지 않는 자이다. 동시에 그는 인간들 특히 죄인에게 자기를 사랑으로 나타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다. 이러한 사상은 대체로 구약 성경과 유대교적 근원에 속한 것이며, 희랍적 영향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삼위일체론적 신 개념은 교부들에게서도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그 사상은 클레멘트나 헤르마스 등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령을 하나의 실재로 이해하는데에도 여러 가지 곤란이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노력보다는 이교도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입장에서 그리스도론과 신도들의 도덕적인 삶의 형태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기록되고 정경화되기까지의 200 내지 3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 오히려 희박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혼란된 여러 가지의 하나님 이해에 젖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보다 더 확실한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희랍적 변증론자들과 타락된 종파들간의 끈질긴 논쟁은 드디어 기독교의 교리라는 형태로써 나타나게 되었으며, 어거스틴에 이르러서야 서구의 신학은 자리를 잡게 되었다.
b. 어거스틴의 신관
하르낙, 제베르크 등은 어거스틴이 그의 생애의 중요한 식에 신플라톤주의의 종교관에 지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 자신도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핵심은 신 개념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실체를 분석하였으며, 하나님은 전지, 전능, 전선(全善)하시다고 하였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 어거스틴에게 잘 어울릴 정도로 플라톤과 여러가지면에서 유사점이 있다. 어거스틴은 신적 개념들을 하나님속에서의 영원 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택하고 있다. 이 신적 개념들은 개별적인 사물들에게 존재 형태와 존재 이유를 부여해 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개념을 모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절대적인 표준이 된다고 하였다.
서방의 신학에 최초로 방향과 특성을 부여한 것은 터툴리안과 사이프리안이었지만, 결정적인 형성은 어거스틴에 의해서였다. 오리겐이 동방의 신학에 영향을 주기는 하였으나, 서방에 끼친 어거스틴의 영향에는 견줄 수 없으며, 중세기까지 줄기차게 세력을 유지해 온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많은 특징들은 어거스틴의 신학에 나타난 개념, 원리, 암시들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신학은 죄와 은총의 교리 등에서는 오히려 후대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용납되는 것이었다. 마니교가 주장하는 하나님과 악의 이원론적 개념에 대항하여 그는 하나님을 참된 영원적 실재라고 하였으며, 악은 유일한 실재인 선으로부터 고의적으로 떠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신플라톤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의 사고와 명상은 철학적인 특색이 짙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철학의 영향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본질을 논하였다. 하나님은 순전하며 절대적이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성과, 불멸성, 편재성, 비물질성, 영원성을 하나님의 본질로 보았으며,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역설하였다.
c. 하나님 존재의 존재론적 논증(안셀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던 안셀름은 스콜라 철학의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을 신앙의 해명의 도구로 사용하여 신앙을 이성으로 논증하는 합리적 신학자이다. 안셀름의 하나님의 존재 논증을 ‘존재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개념에서 그것의 실재를 논증하기 때문이다.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은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데카르트는 ‘나의 의식’에서 출발하고 안셀름은 신앙과 기도 그리고 계시에서 출발한다. 안셀름의 증명을 해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논리는 플라톤 철학이지만 하나님 인식의 근거는 철두철미하게 신앙과 계시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셀름의 시도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높이 평가되는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범위가 단순히 속성을 밝혀보는데에서 벗어나 그의 존재에 대하여서까지 거론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d. 하나님 존재의 우주론적 논증(아퀴나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두 가지 계시, 두 가지 신학,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계시로써 자연 계시 또는 자연 신학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은총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계시로써 초자연 신학 또는 초자연 계시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존재문제는 자연 계시, 자연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성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의 자연 신학적 논증으로서 다섯개의 논증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부르는데, 안셀름이 플라톤적 변증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하였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을 사용하여 우주, 자연, 세계의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다. 그의 시도는 하나님의 증명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식에 봉사하는 신학적 언어로써의 방식에 있다. 우주에 대한 한계적인 지식속에서 우주론적 증명을 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논증 시도는 현대 과학자들의 하나님 존재 증명의 시도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우주 과학을 기초로 해서는 철학에 의한 개념적 증명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미약한 상태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현대 신학자들이 눈을 우주 밖으로 다시 돌리게 하는 길을 열었다.
e. 칼빈의 신관
어거스틴이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칼빈은 성서를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그의 이해는 ‘예정론’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하나님은 세계의 정밀한 기구내에서 나타내신 자기의 계시가 효력이 없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효과있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자기의 말씀을 보조로 주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계시를 보존케 하는 데에 자연계시 대신에 성경을 주신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진리와 자신에 관한 계시를 성경에 신탁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신탁의 총체로 보았다. 즉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 인간은 다만 대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이른바 성경 영감설은 칼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성령의 증거에 둠으로써, 성경의 기자는 자기의 말이나 경험이나 느낌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직접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역할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것은 죽은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부르면서 칼빈은 특별히 강조를 하였다.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주셨다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제자들은 융통성이 없는 영감설들을 만들어 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계시의 총체임을 강조한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창조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외부 세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부분 즉 정신이나 마음 또는 감정등의 부분들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주입되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양심과, 자연계를 통해서 가지는 하나님의 지식,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가지는 하나님의 지식이 포함된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우는 로마 카톨릭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앞세우고자 하였던 칼빈은 예정 교리를 내세워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예정 교리는 기독교 교리중의 여러 가지 비의 중에서 가장 풀기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칼빈 자신도 이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억지로나 무리로 권고하지는 말라고 권고하였다. 이 예정론은 이방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운명의 신이나 맹목적이고 숙명적인 악령들이 우연한 장난의 결과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불변하신 섭리에 따라 은총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예정 교리의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승천 이후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고대하였던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으며, 그들의 생전에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세계의 정부가 우뚝 서기를 바랐던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지경으로 훼파되어 버렸다.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았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가서 전파하는 자들이 되었지만,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역량은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오히려 잊어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국에 대한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개념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개념들을 많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아직 그러한 이해를 할 만한 준비가 덜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
이로 인한 혼란을 앞에 열거한 주요 신학자들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기독교 밖으로부터의 인간적인 사상과 철학들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하나님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에 대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개념적인 설명을 하려고 애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고대 이집트와 헬라 우주관의 영향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천문학의 기본이 대부분 고대 즉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이미 통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천문학을 토대로 하여 일 년을 365일로 계산하였다는 기록이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며, 그에 의하면 기원전 1,100년에 이미 일 년을 365.25날로 계산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중국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것이 통용되었고, 달을 기준으로 하는 대신에 해를 기준으로 날자를 정하였다.
이집트의 제사장들은 우주를 바라보는 관측자들이었다. 나일강이 항상 범람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원인을 캐기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을 것이며, 결국 천체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별들을 36개의 무리로 나누어 관측하였으며, 기원전 1,300년 이전에 이미 해가 뜨는 각도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에집트에 건축된 피라밋의 구조 역시 별자리의 이동에 마추어져 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7세기 경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간격을 이용한 시계를 사용하였다. 자연 현상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일은 중국에서도 활발하게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3,000년경에 육신의 구조와 우주를 연결시켜 연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육안으로 식별될 수 있었던 혜성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으며, 현대의 천문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그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던 것이다.
천체에 대한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후에 인도와 유럽지역으로 흘러들어갔으며, 한 편으로는 신화와 토속 신앙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였지만,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발전도 끊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은 헬라 문화의 번영과 함께, 그리고 로마의 세계 지배에 편승하여 황금기를 누렸으나, A.D.5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중세 시대에는 이것 역시 암흑기를 맞이하여 전혀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교황청의 지시 이외에는 전혀 학문적 연구를 할 수 없는 시대가 1,0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A.D.1,500년 경 문예 부흥과 함께 학문적인 연구가 다시 자유로워지기까지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들은 잠을 자고 있었으며, 귀중한 자료들과 연구 결과들이 분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주에 대해 눈을 뜬 것은 근대 또는 현대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에 많은 연구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집트에 우뚝 서 있는 피라밋들을 보면서 고대인들은 우주를 논하고, 별자리들을 연구하였으며, 세상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을 해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절대자를 생각할 때, 막연한 신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우주를 직접 주관하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직접 주장하는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어떤 민족들은 그 신을 태양으로 상징화하였으며, 또 어떤 민족들은 달을 그 신에 비유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단순히 미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매우 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하여, 우주와 신 개념을 관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우주관이 로마 제국의 번성과 함께 세계로 퍼져나간 후에 신약의 시대가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진 근동과 유럽의 우주관
고대 페르시아의 빛의 신(Mithraism)을 섬기던 종교(신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가장 널리 퍼졌던 것이며, 기독교의 발흥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번영기를 누렸다. 이 종교를 신봉하던 사원을 mithraea라고 부르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수백 개가 발견되었으며, 팔레스틴으로부터 영국, 독일, 스페인에 이르는 거의 전 지역의 유럽에 분포되어있다. 특별히 로마 근처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로마의 군인들과 상인들 그리고 귀부인들이 신자의 무리를 이룬 것으로 판명된다. 규모는 한번에 20 내지 30명이 참석할 수 있는 크기이고, 길이 75피트, 넓이 30피트의 타원형 석굴이 대부분이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인도의 Mithra가 헬라어 또는 라틴어로 번역이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신교의 사원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황소를 죽이는 상’이다. 조각 또는 그림의 형태로 발견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칼로 황소를 죽이는 장면이다. 만약에 이 신교가 인도의 Mithra에서 온 것이라면 인도의 신화에 이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도의 신화에는 그러한 비슷한 내용도 없다. 이것은 신교의 근원지가 인도 또는 아시아가 아니라 근동의 일대에서 생겨난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써, 새로운 각도의 연구를 가능케 하는 동기가 되었다. 1971년 몇몇 학자들이 고대의 우주 지도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그 결과 놀라운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 해석법은 두 가지를 고려하여 진행되었다. 하나는 모든 그림들에 순서적으로 나타나는 하늘의 띠와 형상들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의 행성들에 관한 그림들이다. 또한 Porphyry등의 고대 철학자들은 신교가 우주관과 연관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David Ulansey는 고대 로마시대(기원전 1세기 이후)의 우주관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고대인들은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우주가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우주는 별자리들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하였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우주를 두개의 띠로써 표시하여 상징으로 나타내었으며, 각 띠는 12개의 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 띠는 2160년마다 다른 별자리가 오도록 서서히 회전을 하며, 결국 25,920년에 한 바퀴를 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은 황소 자리가 된다.
기원전 128년 Hipparchus는 이러한 우주의 행성들이 움직이는 원칙을 발전시켰고 그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황소를 죽이는 남자가 우주의 새로운 실권자가 된다는 상징이 도입되었다고 보지만, 이러한 우주관이 정착되기까지에는 적어도 10세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신교의 신전에서 보여지고 있는 대부분의 그림이나 조각들이 우주와 관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대개 뱀의 형상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Hipparchus가 이론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 신교의 뿌리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이미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황소에 관계된 신화들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미발달된 우주관들이 근동의 신화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되는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들과 관계된 많은 조각품들이나 벽화들에서도 이와 같은 해석의 근저를 찾을 수 있다.
David Ulansey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바벨론 등의 근동에서 발견된 신화들에서 찾을 수 있는 우주관보다 훨씬 발전되고 고차원적인 우주관이 이미 고대인들의 지식속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별자리 지도나 고대의 항해술의 발달등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신교가 본격화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247년의 Plato의 대화에서도 그의 영이 우주 밖으로 여행하였다는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 지혜자들이 만약에 우주관을 주변의 설화들에서 빌어와서 변형시켰다면, 보다 고차원적인 설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벨론이나 가나안의 것을 토대로 했겠는가 하는 의심이 가는 것이다. 오히려 우주에 대한 어떤 계시가 고대인들에게 상당히 밝혀져 있었으며, 그러한 내용이 왜곡 발전되어 여러 민족들과 문화들속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한편 유대인들이 간직하였던 설화와 구전이 원래의 계시 내용에 가장 근접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 신약 시대의 우주관과 예수 그리스도
a. 점성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전된 점성술은 고대로부터 별들과 유성들의 정연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에서 파생되어 나타난 것으로써, 별들이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사람이 태어난 때의 별들의 배치 상태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별의 영을 이해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별이 곧 신이라는 플라톤의 믿음은 점성술적인 사변과 희랍 철학의 전통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고, 헬라의 다른 철학자들은 점성술과 수학을 결합시키므로써 별들의 움직임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그 결과 헬라 제국의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의 사람들은 별들의 힘을 두려워하였으며, 별의 영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영혼의 비밀을 배우려는 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 길을 통해서만 별들에 의해 접지된 사람들의 운명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으며, 하늘에 대한 신령한 지식을 갖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영지주의’의 토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영지주의가 A.D.100년 이후의 후기에 이르러 많은 신비 종교들과 신화들을 끌어들이고, 이방의 모든 종교 예식들을 흡수하는 혼합주의에 빠진 것은 이러한 그들의 사상적 출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 교회가 확실한 형태를 갖추기까지 이스라엘 및 근동의 일반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영지주의적 요소들은 초기 기독교의 사상과도 매우 유사하였으므로, 크게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신비적 요소들이 아무런 거부감없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며, 우주적인 천국의 개념과 현세에서의 복음의 역할에 대하여 이 점성술 또는 당시 우주관이 일조를 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b. 신비 종교
여러 종류의 신비 종교들이 신약 시대에 근동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배타적인 그들의 성향 때문에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시스와 오리시스 신에 대한 신화가 이집트에서 전해내려 왔는데, 이것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주후 2세기 초에는 신비 주의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플루타크에 의해 찬미를 받을 정도였다. 헬라 문화권에는 신화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신비적 제의가 행해졌으며, 정치권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는 등, 단순한 계절적 축제의 개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특히 당시에 핍박받는 하층민들과 노예들 속에서는 하나의 도피처 역할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상류 계층의 사람들도 불확실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여 안정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신비 종교로 몰려들었다.
c.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하여 근동의 세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한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메시야를 고대하는 마음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공통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헬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들을 배경으로 하는 신비주의 종교들에서도 어떤 강력한 왕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으며, 특별히 유대인들 중에서 선지서들을 믿었던 평민 또는 하층민들은 그 날을 무척 고대하였다. 여러 차례의 혁명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러한 메시야사상을 널리 전했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Suetonius는 이에 대하여 “유대에서 한 왕이 나타나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예언이 동방에 널리 퍼져있다.”고 기록하였으며, Tacitus는 “동방이 강력해지고, 유대로부터 한 지배자가 나와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던 점성술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학과 과학 또는 의학과도 연관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뛰어난 사람은 일반인들에게 크게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오늘날의 미신적인 개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동방으로부터의 별과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추측하기를, 기원전11년에 핼리혜성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며, 기원전7년에는 Saturn과 Jupiter가 거의 일직선에 놓였을 것이므로 밝게 빛났을 것이라고 하며, 기원전5년에서 기원전6년 사이에 특이한 현상이 천체에 벌어졌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의 점성가들은 매우 흥분하였을 것이며, 어떤 위대한 왕이 출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신비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하여 당시의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지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우주의 현상과 현세를 연결시키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한 배경에 마추어서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의 범위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탄생 자체가 우주와의 어떤 관련성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속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하늘에 “계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늘에”라는 공간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셨으며, 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 속에서도 공간적인 의미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개념적인 철학적 의미만의 신 개념이나 천국 개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개념들을 오로지 철학적인 관념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4) 신약 시대 이후의 신관
a.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신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하나님에 관한 이해는 그 장을 달리하는 큰 변화가 있었다. 더 이상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인 하나님, 모든 민족의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구원주로서의 하나님, 공의만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이해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사도들의 활동에 이어서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들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에 의하여 정립되기 시작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는 아직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 형식화된 교리들도 없었으며, 그들의 주된 관심은 새로운 기독교적 생활을 추구하는 일에만 집중되었다. 그들은 ‘두 길’ 즉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는 명확한 원리는 형성하였지만, 그들의 교리적 표현은 매우 산발적인 것이었다.
사도 후 교부들은 이교의 다신교적 신앙에 반대하여 구약 성서적 의미에 있어서의 유일신교에 집착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요,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시는 자이다. 그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파악할 수도 없으며, 창조되지 아니하고 영원하시며, 아무것도 부족을 느끼지 않는 자이다. 동시에 그는 인간들 특히 죄인에게 자기를 사랑으로 나타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다. 이러한 사상은 대체로 구약 성경과 유대교적 근원에 속한 것이며, 희랍적 영향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삼위일체론적 신 개념은 교부들에게서도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그 사상은 클레멘트나 헤르마스 등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령을 하나의 실재로 이해하는데에도 여러 가지 곤란이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노력보다는 이교도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입장에서 그리스도론과 신도들의 도덕적인 삶의 형태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기록되고 정경화되기까지의 200 내지 3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 오히려 희박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혼란된 여러 가지의 하나님 이해에 젖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보다 더 확실한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희랍적 변증론자들과 타락된 종파들간의 끈질긴 논쟁은 드디어 기독교의 교리라는 형태로써 나타나게 되었으며, 어거스틴에 이르러서야 서구의 신학은 자리를 잡게 되었다.
b. 어거스틴의 신관
하르낙, 제베르크 등은 어거스틴이 그의 생애의 중요한 식에 신플라톤주의의 종교관에 지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 자신도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핵심은 신 개념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실체를 분석하였으며, 하나님은 전지, 전능, 전선(全善)하시다고 하였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 어거스틴에게 잘 어울릴 정도로 플라톤과 여러가지면에서 유사점이 있다. 어거스틴은 신적 개념들을 하나님속에서의 영원 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택하고 있다. 이 신적 개념들은 개별적인 사물들에게 존재 형태와 존재 이유를 부여해 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개념을 모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절대적인 표준이 된다고 하였다.
서방의 신학에 최초로 방향과 특성을 부여한 것은 터툴리안과 사이프리안이었지만, 결정적인 형성은 어거스틴에 의해서였다. 오리겐이 동방의 신학에 영향을 주기는 하였으나, 서방에 끼친 어거스틴의 영향에는 견줄 수 없으며, 중세기까지 줄기차게 세력을 유지해 온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많은 특징들은 어거스틴의 신학에 나타난 개념, 원리, 암시들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신학은 죄와 은총의 교리 등에서는 오히려 후대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용납되는 것이었다. 마니교가 주장하는 하나님과 악의 이원론적 개념에 대항하여 그는 하나님을 참된 영원적 실재라고 하였으며, 악은 유일한 실재인 선으로부터 고의적으로 떠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신플라톤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의 사고와 명상은 철학적인 특색이 짙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철학의 영향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본질을 논하였다. 하나님은 순전하며 절대적이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성과, 불멸성, 편재성, 비물질성, 영원성을 하나님의 본질로 보았으며,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역설하였다.
c. 하나님 존재의 존재론적 논증(안셀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던 안셀름은 스콜라 철학의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을 신앙의 해명의 도구로 사용하여 신앙을 이성으로 논증하는 합리적 신학자이다. 안셀름의 하나님의 존재 논증을 ‘존재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개념에서 그것의 실재를 논증하기 때문이다.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은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데카르트는 ‘나의 의식’에서 출발하고 안셀름은 신앙과 기도 그리고 계시에서 출발한다. 안셀름의 증명을 해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논리는 플라톤 철학이지만 하나님 인식의 근거는 철두철미하게 신앙과 계시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셀름의 시도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높이 평가되는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범위가 단순히 속성을 밝혀보는데에서 벗어나 그의 존재에 대하여서까지 거론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d. 하나님 존재의 우주론적 논증(아퀴나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두 가지 계시, 두 가지 신학,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계시로써 자연 계시 또는 자연 신학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은총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계시로써 초자연 신학 또는 초자연 계시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존재문제는 자연 계시, 자연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성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의 자연 신학적 논증으로서 다섯개의 논증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부르는데, 안셀름이 플라톤적 변증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하였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을 사용하여 우주, 자연, 세계의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다. 그의 시도는 하나님의 증명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식에 봉사하는 신학적 언어로써의 방식에 있다. 우주에 대한 한계적인 지식속에서 우주론적 증명을 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논증 시도는 현대 과학자들의 하나님 존재 증명의 시도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우주 과학을 기초로 해서는 철학에 의한 개념적 증명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미약한 상태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현대 신학자들이 눈을 우주 밖으로 다시 돌리게 하는 길을 열었다.
e. 칼빈의 신관
어거스틴이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칼빈은 성서를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그의 이해는 ‘예정론’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하나님은 세계의 정밀한 기구내에서 나타내신 자기의 계시가 효력이 없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효과있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자기의 말씀을 보조로 주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계시를 보존케 하는 데에 자연계시 대신에 성경을 주신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진리와 자신에 관한 계시를 성경에 신탁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신탁의 총체로 보았다. 즉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 인간은 다만 대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이른바 성경 영감설은 칼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성령의 증거에 둠으로써, 성경의 기자는 자기의 말이나 경험이나 느낌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직접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역할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것은 죽은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부르면서 칼빈은 특별히 강조를 하였다.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주셨다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제자들은 융통성이 없는 영감설들을 만들어 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계시의 총체임을 강조한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창조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외부 세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부분 즉 정신이나 마음 또는 감정등의 부분들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주입되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양심과, 자연계를 통해서 가지는 하나님의 지식,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가지는 하나님의 지식이 포함된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우는 로마 카톨릭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앞세우고자 하였던 칼빈은 예정 교리를 내세워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예정 교리는 기독교 교리중의 여러 가지 비의 중에서 가장 풀기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칼빈 자신도 이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억지로나 무리로 권고하지는 말라고 권고하였다. 이 예정론은 이방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운명의 신이나 맹목적이고 숙명적인 악령들이 우연한 장난의 결과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불변하신 섭리에 따라 은총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예정 교리의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승천 이후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고대하였던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으며, 그들의 생전에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세계의 정부가 우뚝 서기를 바랐던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지경으로 훼파되어 버렸다.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았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가서 전파하는 자들이 되었지만,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역량은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오히려 잊어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국에 대한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개념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개념들을 많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아직 그러한 이해를 할 만한 준비가 덜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
이로 인한 혼란을 앞에 열거한 주요 신학자들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기독교 밖으로부터의 인간적인 사상과 철학들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하나님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에 대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개념적인 설명을 하려고 애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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