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3, 2011

성경과 우주관(2) -구약 시대의 우주관과 신관

성경과 우주관(2) -구약 시대의 우주관과 신관

1). 비평학에 의한 성경 해석과 우주관
a. 비평학의 배경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후기에 오경 율법의 전달자 또는 저자가 모세였다는 견해는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전제가 되고 있으며, 요세푸스, 필로, 탈무드가 분명히 언급하였고, 교회의 전통에서도 17세기까지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수많은 연구와 다양한 논증에 의하여 모세의 저작권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오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약 해석과 구약 신학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오경에 나타난 개개의 구성 요소들을 갈라내어, 그들의 연대와 목적을 결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몇 가지 가설(hypothesis)들을 내세워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문서 비평등의 여러 다른 노선들이 있으며, 특히 양식 비평에서는 문서 이전의 단계를 파악하여 구전의 성장과 그 생활 환경 및 종교적인 환경을 이해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경의 자료들은 위대한 저자들(모세 등)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 고대의 전통적인 일반 자료들을 여러 학파에서 수집하여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전승사 연구라는 새로운 방법이 나타나서 오경의 뿌리는 여러 설화들 특히 오경이 기록되기 시작하는 연대로 추정되는 바벨론의 포로기 시대에 그 주변에서 수집된 것들을 그들의 전승에 첨가하여 편집한 것이라는 주장이 학자들 간에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가설들과 연구 방법들을 토대로 하여 오경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내용들을 분류하여 내며, 이 모순들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주변의 여러 가지 설화들(내용이 비슷한)에서 첨가 또는 보충하는 방법으로 모자이크처럼 구성해 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경의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위한 학문적인 기록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더우기 그 당시 고대 근동의 세계가 훨씬 발전된 역사 의식이 있었고 다양한 역사 문학이 배출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이 가정 교육 또는 민족 교육을 위하여 주변의 자료들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편집, 발전시켜 나갔다고 말한다.

b. 제사문서(P)와 야웨문서(J)의 창조 설화
성서 비평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부분을 두 가지의 창조 설화로 구분하는데,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는 제사문서(P)로,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창조 설화를 야웨문서(J)로 구분한다. 기록된 연대도 P문서는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인 기원전 6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J문서는 기원전 950년경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두 기록의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긴 기간이 있으며, 두 창조 설화의 동기, 역사적 배경, 설화의 구조, 표현, 강조점, 그 신학 사상이 각각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에서 학자들은 창세기가 기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 동기 - 창세기 1장의 P문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본래의 신앙을 강조하고, 안식일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날’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있었다고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창세기 2장 이후의 J문서는 창조 설화가 단순히 창조의 사실을 인간에게 알리는 지식을 전달하려 함이 아니고,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 되는 인간이 창조주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한다.
(2) 역사적 배경 - 창세기 1장은 포로 시대에 바벨론에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상황이 배후에 깔려있으나, 2장 이후의 창조 설화는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당시 또는 그 직후의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다고 본다.
(3) 구조 - 창세기 1장은 신앙 고백 형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2장 이후는 서술 문학 또는 고발 문학의 형태를 취하면서 여러 가지 사상을 전달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4) 표현 - 창세기 1장은 바벨론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신화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바벨론 신화와 다름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5) 강조점 - 창세기 1장의 창조 설화에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 있고, 2장 이하 설화에는 인간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창세기 1장(P 문서)은 J문서 기자의 영향하에 기록이 되었고, J문서의 기자를 이스라엘 고대 신학 전승을 실존적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케리그마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알리려 했던 최초의 신학자라고 보는 것이다.

c. 야웨문서의 역사적 배경
J문서의 기자가 살았던 역사적인 배경을 기원전 950년경 즉, 솔로몬의 시대였다고 학자들은 대부분 일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솔로몬의 시대는 정치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경제사적으로도 역사의 황금시대였다. 유목민의 문화에서 농경문화 또는 도시문화로 바뀌었으며, 이스라엘의 왕국이 한 나라로써 기초가 잡혔고, 강력한 세력으로 중동의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로몬의 무자비한 권력 행사가 있었으며, J기자는 이러한 솔로몬의 치정에 대해 항거하면서, 그의 창조 설화를 통하여 그가 살고 있었던 당시 역사적 현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인간의 참된 모습보다는 여기에 도전하는 인간의 범죄, 개인과 개인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의 본질, 인간이 취할 올바른 책임성 등의 문제를 대담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는 문학적 서술로 파헤치고 있다고 본다. 솔로몬의 왕권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의 백성을 권력으로 다스렸다. 그 반대자들은 무자비하게 피로 다스렸다. 이러한 사실을 실제로 체험한 J기자는 그의 창조 설화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인간의 타락과 반역을 그 근거에서부터 설명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J기자가 창조설화에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한 근거라는 것이다.

d. 바벨론의 영향과 모세 오경의 우주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신학적인 요구에 의하여 전승들을 발전시키고 편집을 하여 성경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비평학적 견해에서는 히브리인들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므로 그 이전의 기록들은 그들보다 뛰어난 문명을 가졌던 수메르나 이집트 등의 신화적 요소들과 가나안의 신화적인 요소들이 유입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신화의 내용을 빌려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개념은 원래 히브리인의 사상이 아니라 가나안 지역에서 발견된 우가리트 문서에 근거하여 가나안의 ‘엘’신과 ‘아세라’신 그리고 여러 다른 신들을 이야기하는 신화에서 빌어 온 것이며, 창세기 1장의 ‘두 큰 광명’은 바벨론의 신명을 배척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창세기 1장과 2장 등의 창조설화를 기록함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기에 그들이 배웠던 그 지역의 더욱 뛰어난 문명 즉, 그들의 우주관에서 개념을 빌어온 것 또는 그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바벨론의 우주관은 어떠하였으며, 그들의 문명이 뛰어났다는 가정은 어떠한 면에서 였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과연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민족성(구약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또는 가나안의 설화들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할 정도로 그들의 민족 전통이 흔들렸겠는가. 만약 그러했다면 어떻게 그들이 나라없는 가운데에서 유대교의 전통과 민족의식을 더욱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교육이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가부장적인 제도를 통하여 철저하게 구전으로 교육하였던 그들의 역사 배경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엄청난 문화의 회오리속에서도 굳건히 건재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당시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구전의 전통들에 대하여 더욱 엄격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위의 비평학을 근거로 하여 여러 문헌에서 말하고 있듯이 성경의 우주관이 주변의 설화들에서 빌어왔다는 것보다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구전에 의해 전해왔던 여러 가지의 단편적인 유대인 고유의 설화들이 모세를 통하여 또는 여러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전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주변적인 자료들이 유입되었다고 생각한다.

2) 유대인의 해석에 의한 구약 성경의 우주관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오경을 모세가 기록하였다고 믿는다. 그들이 모세에게 두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과학적인 근거와 경험적인 이론들을 근거로 하여 이 문제를 반박한다. 즉 모세 당시에는 히브리어의 문자도 제대로 발달되지 못하였으며, 문서를 남길 수 있는 방법도 변변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모세가 오경의 방대한 분량과 많은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었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두 가지의 관점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유대인들의 특유한 구전의 전승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모세가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르친 내용들을 후대의 선지자들이 전승들을 토대로 여러 시대에 여러 번에 걸쳐서 다시 기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전제로, 유대인들 자신이 성경의 창조 기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과학의 발달과 신학적인 성경 해석의 발달에 따라 유대인들도 최근에 새로운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스라엘과 미국에 있는 유대인 성경학자들이 모여서 Jewis Publishing Society(JPS)를 결성하고, JPS Torah Commentary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주해서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의 우주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창세기‘라는 이름은 Vulgate역에서 붙인 것이며, 50장으로 나뉘어진 것도 유대인의 전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Torah를 1년 또는 3년을 주기로 반복해서 읽을 수 있도록 구분을 하였는데, 3년 주기로 할 때에는 43내지 45개의 부분으로, 1년 주기로 할 때에는 12개의 부분으로 창세기를 분할하였다. JPS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50장의 구분을 채택하고 있다.
창세기는 크게 구분하면 ‘세 기원(origin)에 대한 기사’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인간의 기원, 둘째는 이스라엘의 기원, 셋째는 하나님과 특정 인물간의 특별한 관계의 기원이다. 한편, 창세기를 연대기적 주제별로 나누면 첫째: 창조 기사(1:1-2:3), 둘째: 인간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종족들의 기원(2:4-11:26), 셋째: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는 조상들의 이야기(11:27-50:26)가 된다. 히브리 전승들과 문서들을 종합하여 계산된 연대는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탄생까지 1948년,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의 죽음까지를 361년이라고 밝혀준다. 위와 같은 분류에 의하면 연대기적으로 17%에 해당하는 기간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의 죽음까지에 창세기 전체 기사의 약 80%이상을 할애하고 있음을 밝혀준다. 이러한 불균형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중심적으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창조를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셨는가를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계획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씀하시면서 그의 근원적인 뿌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시는 것이 바로 창세기 1장으로부터 11장까지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조 기사는 모든 다른 성경의 근원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해석한다.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신 명칭이나 족장들에 관계되는 기사들을 분석해 볼 때 후대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가정 또는 다른 설화들에서 빌어온 것이라는 주장은 논리에 맞지않는 것이 확실히 증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비평학에서 분석하고 있는 방법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에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며, 전체적인 흐름이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 학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3) 신화를 통해서 본 앗수르-바벨론과 가나안의 우주관
성경 비평학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부분들 특히 창조 기사는 성경 기록의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바벨론 포로기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지역의 여러 가지 설화들을 빌어와서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 고백으로 변형, 기록하였다고 한다. 한편 III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 학자들은 오히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창조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구약 시대의 앗수르-바벨론 지역과 가나안 지역에는 어떤 설화들이 있었으며, 창세기의 내용과는 어떤 차이점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진지하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a. 앗수르-바벨론의 신화
기원전 2000년경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아카드족과 수메르족이 정착하면서 비교적 높은 문명을 구가하였다. 남쪽의 걸프만에 자리잡은 수메르족은 중앙 아시아나 시베리아로부터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북쪽에 자리잡은 아카드족과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조하는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종교도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누가 정복자가 되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섬기는 신(god)도 달라져야 했다.
(1) 창조 설화 -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물을 창조의 근원으로 본다. 신들이 좋은 물과 나쁜 물을 이용하여 모든 물질을 만들었다고 한다. Apsu는 지구를 둘러싼 혼돈한 상태의 물이며, 지구 자체는 둥글고 높은 산들에 의해 하늘에 달려 있고, 이 Apsu로부터 물이 지구 표면에 흘러들어 온다고 한다. Tiamat은 바다를 가리키며,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낳게 한 것으로 본다. Lakhmu와 Lakhamu는 최초의 생명체였으며, 신에 가까운 존재였고, 기괴하게 생긴 뱀의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남성인 Anshar와 여성인 Kishar가 나왔으며, 세계를 대표하는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Marduk신이 Tiamat을 이기고 우주를 정복하고 질서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화는 거의 희랍 신화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2) 주요 신들 - Marduk 신이 Tiamat을 이긴 후 신들의 세계에는 평화가 왔으며, 신들은 각자 고유의 권한을 받게 되었다. Anu 신은 하늘을, Enlil(Bel) 신은 지구를, Ea 신에게는 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다. 이 외에도 많은 신들이 있어서 우주의 모든 것들을 나누어서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들의 신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수준에서 기술되고 있으며, 이러한 신화가 오히려 조직적이고 깊은 영적인 차원을 가지는 성경의 창조기사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b. 가나안의 신화
이집트 문명과 앗수르-바벨론의 문명 사이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학과 종교적인 형태가 있었음이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Ebla에 관한 기록들과 Ugarit에서 발굴된 토판 문서들이다.
(1) Ebla - Akkad의 Naram-Sin(2291-2255 B.C.)은 그의 할아버지 Sargon 처럼 서쪽을 정벌하였던 기록을 Ur에 남겼는데 그곳에 Ebla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1964년에 발굴이 된 Tell Mardikh이며, 2만개에 가까운 토판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기록된 언어는 셈어에 가까우나 오히려 히브리어에 가까운 독특성 때문에 Eblaite라고 불리고 있다.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을 (2400-2250B.C.) 다스렸던 Ebla에는 약 26만명의 인구가 살았으며, Naram-Sin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높은 문명을 구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발견된 문서들에 의하면 그곳에 약 20여 가지의 신화들이 있었으며, 500에 달하는 신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신은 구약 성경에 Dagon으로 표기된 Dagan신이며, 곡물과 관계되는 풍요의 신이다. 이 신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국가의 신이었으며, Ebla에서는 주요 거리와 성문의 이름, 그리고 연중 첫 달의 이름으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셈 계통의 신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는 폭풍의 신 Hadad, 태양 신 Sipish, 흑사병의 신 Rashap, 전쟁과 사랑의 남성 신 Ashtar, 폭풍의 신 Baar, Ebla의 신 Dabir, Dagan 신의 배우자인 Belatu, Ashtar의 배우자 신 Ashtarte, 불의 여신 Ishatu 등이 있으며, ‘il’과 ‘ya’는 신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신들이 많았지만 특별히 Dagan 신에게는 ‘주(Lord)’라는 명칭과 ‘il’ ‘ya’의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가장 강한 신으로써 추앙되도록 하였다.
(2) Ugarit -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의 문서들에서 발견되는 시리아 지역의 도시로써 1929년에 발굴되었다. 이 도시는 후기 청동기시대(1500-1200B.C.)에 흥왕하였으며, 어떤 이유에 의해서 갑자기 사라졌다. 이 도시는 약 50 에이커에 달하였으며, 북쪽의 고 지대에서 두개의 큰 사원이 발굴되었다. 그 하나는 Baar을 섬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Dagan을 섬기던 곳이었다. 두 사원 사이에는 사제들이 거하던 큰 집이 있었으며, 도서실과 학교로 보이는 시설이 발견되었다. 도서실에서 수천개의 토판이 발견되었고 종교 의식에 관계되는 것들도 많이 있어서 Ugarit의 만신들에 대한 자료가 판독되었다. 이 문서들에 의하면 그들의 가장 높은 신은 ‘il’ 즉 ‘ib’, ‘ilu(m)’, ‘el’ 등으로 불리는 신이며, 어떤 곳에서는 ‘아버지’로 또 어떤 곳에서는 ‘황소(Bull)’라는 이름이 주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어떤 힘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써, 왕, 현자, 거룩, 영원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El’신과 신들의 집단이 두 강의 근원인 한 산에 거하며, 북쪽 어느 곳에 있는 우주적인 산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El’이라는 신 명칭은 물론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쓰였고 의미도 비슷한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근본적인 신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며, 가나안의 신 개념은 오히려 다음 V장에서 다룰 내용과 매우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Baar과 관계된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어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기술되는 Baar 신화를 접할 수가 있다.

d. 성경의 우주관과 이스라엘의 우주관
창세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창조 기사 또는 우주관은 고대의 다른 우주관과는 매우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즉 말씀에 의해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설명은 다른 어느 창조 설화들에서도 그 비슷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약이 형성되던 시기의 이스라엘에도 다양한 우주관들이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은 문헌들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러한 신화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여러 신들이 싸우다가 그 중의 한 신이 승리를 하여 다른 신들을 지배하면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근동과 이스라엘의 신화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색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성경의 창조 기사를 능가할 만한 것은 없었으며, 성경의 첫 번째 권으로 기록됨으로써 그 권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많은 상징들과 함께 아주 간략하면서도 신앙적인 풍부한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의 불가사의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한 사고와 언어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창세기의 기자는 많은 상징과 숫자들을 도입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원초적인 신앙 고백으로써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 중심 사상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확실한 목적을 가지시고 의도적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해 계시면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그 우주는 자존(self-existing)하시고 자족(self-sufficient)하시는 유일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7일간의 창조 예표는 고대에 이미 고착된 것으로써, 기원전 21세기의 남부 메소포타미아 라가쉬의 구데아 왕(King Gudea of Lagash)은 7일간의 축제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우가릿 문서에도 7일간의 기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경우가 많이 있다. 이들의 한가지 공통된 것은 6일간 사건들이 진행되다가 마지막 7일째에 최고 절정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7일간의 창조 기사는 매 하루 하루마다 다른 활동이 있으며 7일째에는 아무런 활동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모든 설화들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다.
구약 성경은 창조주와 피조 세계를 이어주는 우주관을 토대로하여, 창조주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그 기록을 시작하고 있다. 그들의 고백에 있어서 참된 우주관을 배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며, 모든 기초가 그 위에 놓여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주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 참된 우주관의 발견이 없다면, 성경의 해석이나 신 개념의 발전에 큰 장애가 있을 것이다.


4) 구약 성경의 신관
구약 성경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강조되는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다. 이 하나님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상징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용어들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 따라서 또는 그들이 살고 있던 역사와 문화의 시대에 따라서 달랐다. 하나님 이해의 신학적 진리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구약 성경의 자료만으로 모든 해답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나, 민족과 시대의 소산으로 기록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기초석을 이루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오토 바압의 저서 “구약 성서 신학”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의 개념을 토대로 하여 구약 성경의 하나님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a. 살아 계시는 하나님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가장 전형적인 용어는 ‘살아계신’ 이라는 말이다. 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독특한 신관이다. 이것은 역사가운데 행동하시고, 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시며, 인간들가운데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침으로써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신다. 이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대조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신들은 거짓 신들이며 예배자들이 요구하는 구원에 대하여는 전혀 무력하다고 한다. 예레미야 10:10은 살아계시는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의 신이시고, 구원할 수 없는 우상들은 참으로 생명이 없는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다. 서약할 때 사용되는 히브리 신명에 대해서 “살아 계신”을 의미하는 형용사가 적어도 60회 이상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이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히브리 기자들은 무력한 우상과 그 당시의 다른 신들을 조소함으로써 순수한 유일 신관의 기초를 세웠다. 그것은 추상적 사색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실제로 경험한 사실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구약가운데 하나님이 역사의 신으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데에서 오는것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그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성취하실것이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투철한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b. 인격적 신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인격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단순한 행동과 의식을 훨씬 초월한 인격적 생명이시다. 블레셋의 바알이라는 신들이 농업과 생식의 여러 과정을 관리하는 풍요의 신들 즉 자연 현상에 관련된 신들이었던데에 반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신인동형론적 기능을 암시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은 결단하시고 걸어가시고 말씀하시고 미워하시고 책망하시고 분노하시고 질투하시고 자기가 선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인격의 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그리이스의 신화처럼 자칫 하나님을 인간과 구별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겠으나,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합리적으로 행동하시면서도 동시에 합리적인 원리를 초월하신 존재자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이 때때로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선택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원리를 스스로 가지시고 스스로 결정하시는 최고의 인격적 신이시다.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이신 또 하나의 특징은 윤리적 자유와 자율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인간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끊임없이 찾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윤리적인 자유를 보았다.

c. 거룩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 관념이 명확하게 되고 그의 특성이 명료하게 됨에 따라 절대자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거룩’의 관념이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성성(聖性)의 근원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속된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거룩’의 개념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 하나님의 절대성은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는 신의 우주 편재론은 수용되지만 범신론은 절대적으로 배격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열광적으로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도는 거룩하시니 민족들에게 알리라고 외친다. 하나님의 이 성성은 신뢰의 근거가 되며 따라서 그를 의지하려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초인간적 능력이 되신다. 만일 이 능력 또는 성성이 없었다면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성성은 그의 원수들에게 대하여 파괴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다.영광과 최고의 권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성성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와 자기 민족의 원수를 일치시켜 생각하였던 그들의 선민 의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각시키면서, 모든 문제의 근원을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성 부족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거룩’의 문제는 변함없이 히브리인들의 신학적 중심이 되었으며, 민족들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모세 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시가서, 예언서들에서 내포하고 있는 관념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하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거룩성’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d. 영적 하나님
속죄를 통하여 인간의 생명과 관계를 갖고계시는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시고 거룩하신 이 하나님은 또한 영적존재이심을 구약 성경은 증거 한다.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영’이라는 개념의 단어는 ‘루아흐’이며, 성경의 여러 자료에 의하면 ‘예언하는 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신에 감동된 자’인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지도자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지위에 필요한 자격을 주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사무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주었다. 하나님의 영의 본질을 연구해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은 예언자들에게 목적과 용기를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인간이 소유하는 산 영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신앙과, 이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맥락이 전체의 구약 성경에서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원리이며, 악한 영은 강렬한 감정과 변태적 행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활동이 따르는 생명과 질서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다고 믿어졌다.

e. 창조주 하나님, 우주적 하나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구약 성경에 있어서 최고로 강조되는 하나님의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장에서의 창조의 관념은 아직 발달되지 못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1장에서는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문서설에 의하면 창세기 2장은 기원전 약 850년경에 기록되었고, 창세기 1장은 그보다 약 400년경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보는데, 그들의 해석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창조 설화에 기록된 내용은 질서, 우주력, 지적 목적 그리고 거룩한 인격의 창조주 하나님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주변의 신화들과 설화들을 수집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전과 사상을 첨부하여 하나의 신앙 고백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으로 보더라도, 그들의 고백의 내용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어서 인간의 능력으로 표현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근자에 들어서 발견되고 있는 고고학적 자료들을 분석해 볼 때, 구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바벨론과 에집트 등지에 널리 퍼져있던 우주관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 비록 신화적인 형태로 기술되기는 하였으나, 우주 만물의 운행 원칙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신화적인 성격과 이스라엘 민족 신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던 그들의 하나님 이해는 이사야에 와서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오로지 이스라엘 성전에만 머무르시며, 이스라엘의 대적인 이방인들은 똑같이 하나님의 원수이어서 그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주시리라던 히브리인들의 기대는 유다의 최종적인 멸망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아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앙마져도 흔들렸을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현대 신학자들이 흔히 제2 이사야로 분류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였다. 그들이 믿어온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만을 위한 일개 민족적 신이 아니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히브리인들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을 것이다. 자기 민족들 간에 또한 이방인들의 구전되는 전승들 속에서 발견되었던 우주적 개념의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선포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세우신 하나님이 바로 그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상은 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편집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민족의 신앙적 반성보다는 오히려 선민 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열방 민족에게로 스며들어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 보다는 히브리 민족의 유지와 결속이 더욱 급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서 마져도 그 바뀌기 이전의 하나님 이해에 머물러 있는 모습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처럼, 그들의 하나님 이해는 바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그렇게 되지를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f.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유일성 개념은 본래 히브리 사상가들의 논리적인 분석을 통하여 도달된 결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하여 종교적으로 도달된 것이었다. 유일신의 개념은 그들을 선민 의식으로 이끌었으며, 선민 의식은 또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종교적인 생활을 통하여 점점 배타적인 성향으로 몰아갔다.
‘전 우주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이시다. 다른 어떠한 신들도 참 실재의 신은 아니다’라는 선포는 세계의 모든 사건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곤경을 통하여 도달한 결론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말들이다. 이 선언이 선포하는 진리는 살아계시며, 인격적이시고, 영적이시며, 거룩하신 그 유일의 하나님에 관한 구약 성경의 결론이다. 구약 성경이 기록되던 때에 여러 가지 구전들이나 전승들 또는 신화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하더라도, 유일신의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속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일신으로서 고백되는 하나님 앞에 당할 수 있는 신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은 진실로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이해를 살펴보았다. 분명해진 사실은 그들의 신앙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 권으로 집약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그 실감을 느끼기 힘들지만, 오랜 기 간에 걸쳐서 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갈 때에 그들의 하나님 이해는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 있지 않았다. 서론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이해는 그들의 경험적 범위의 확장과 함께, 특별히 예루살렘의 멸망 및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갔음을 이사야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선지자들의 외침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환경으로 발전해 갔다는 말이다. 그들의 상황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우주관의 제약속에서 계시가 주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에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한, 천국에 관한, 우주에 관한 계시가 완전하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지금까지도 계속 기록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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