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가장 심각한 문제였으며, 철학자가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추구해 왔다. 문제는 그가 그 목적에 대해서 날카롭게 자각하였느냐, 아니면 희미하게 그저 지나쳐 가는 생각으로 삼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진실되게 탐구하려는 노력이 신학 또는 철학에 의해 표현되었다. 원시 종교들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본다면, 인간 내면 세계에 대한 문제와 자연 및 우주 현상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주에 관한 연구였다. 인간 내면의 세계 즉,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사후의 존재에 관한 것이라든가 하는 문제들도 우주적인 개념에 비추어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곤란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창조의 기사일 것이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실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한도 내에서 밖에는 알지못하는 것이기에, 이 문제는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끄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이들은 이 문제를 억지로 풀어보려고 하다가 스스로 올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며, 이단 사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인간이 알 수 있도록 해석하는 학문이 성경 해석학이며, 지난 20세기 동안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어떠한 해석의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야기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서설을 비롯한 최근의 학문들에서도 어떠한 가설을 전제로 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가설들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으며, 그 가설 위에 세운 학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과연 얼마나 진실된 것을 말할 수가 있는가?
또 한편으로는 오역의 위험성 때문에, 아예 문제를 시도해 보지도 않으려는 도피적인 태도가 있다. 도전을 피하기 위하여 그저 전통적인 견해 몇 가지를 두서없이 이야기하면서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이니까 아무 소리하지 말고 그저 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며, 조금이라도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시도하려고 하면 이단의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여서 아예 금기시 하는 태도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인간에게 주실 때 인간이 알지 못하는, 알아서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사실들을 그토록 어려운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주시지는 않으셨지 않겠는가? 또한 유대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에 그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인 배경을 토대로 하여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의심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고 있으며, 문서설에서 구약성경 기록의 배경이었다고 성경 비평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벨론에도 분명한 우주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경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은 민족들의 설화를 볼 때, 그 속에도 나름대로 우주적인 어떤 개념이 들어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밖의 어떤 세상을 동경하면서, 자기 민족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인류와 우주의 관계는 인간 사고 속에서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즉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니 창조된 우주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깊은 것이다. 물론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시려는 목적에서 이 우주가 필요하게 되었겠지만, 하나님과 우주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할 것이요, 우주에 대한 추구가 없다면 천국에 대한 집착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분명히 공간적인 제약속에서 활동하셨으며, 부활하신 모습은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속에서 인간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승천하시는 모습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공간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밖에 또 다른 어떤 공간이 있어서, 이곳과 그곳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는 분명히 인류의 구원에 대한 섭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우주에 대한 개념없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수 없으며, 반면에 우주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인간의 해석 능력도 확대되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확대된 계시도 더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감정 그리고 지성과 철학에 기초하는 종교들은 ‘지성적인 종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참 종교’는 아니다. 궁극적인 실체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뿐이며, 영적인 경험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하나의 도덕률에 불과할 것이다. 참 종교는 개인의 궁극적인 운명이 확실히 성취되는 것이어야 하며, 우주적인 실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지성적 종교’가 아니라 ‘참 종교’이다. 우주 속에서 궁극적으로 추구되는 실체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확실히 계시되었고, 말씀으로 ‘계셨던’ 즉,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즉 확실한 실체로써 인간과 함께 존재하셨으며,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고’ 즉 지금이나 영원히 존재하시고 있으며, 구원얻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게’된다는 것은 우주성과 실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복음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곤란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창조의 기사일 것이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실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한도 내에서 밖에는 알지못하는 것이기에, 이 문제는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끄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이들은 이 문제를 억지로 풀어보려고 하다가 스스로 올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며, 이단 사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인간이 알 수 있도록 해석하는 학문이 성경 해석학이며, 지난 20세기 동안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어떠한 해석의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야기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서설을 비롯한 최근의 학문들에서도 어떠한 가설을 전제로 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가설들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으며, 그 가설 위에 세운 학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과연 얼마나 진실된 것을 말할 수가 있는가?
또 한편으로는 오역의 위험성 때문에, 아예 문제를 시도해 보지도 않으려는 도피적인 태도가 있다. 도전을 피하기 위하여 그저 전통적인 견해 몇 가지를 두서없이 이야기하면서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이니까 아무 소리하지 말고 그저 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며, 조금이라도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시도하려고 하면 이단의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여서 아예 금기시 하는 태도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인간에게 주실 때 인간이 알지 못하는, 알아서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사실들을 그토록 어려운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주시지는 않으셨지 않겠는가? 또한 유대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에 그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인 배경을 토대로 하여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의심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고 있으며, 문서설에서 구약성경 기록의 배경이었다고 성경 비평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벨론에도 분명한 우주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경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은 민족들의 설화를 볼 때, 그 속에도 나름대로 우주적인 어떤 개념이 들어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밖의 어떤 세상을 동경하면서, 자기 민족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인류와 우주의 관계는 인간 사고 속에서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즉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니 창조된 우주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깊은 것이다. 물론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시려는 목적에서 이 우주가 필요하게 되었겠지만, 하나님과 우주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할 것이요, 우주에 대한 추구가 없다면 천국에 대한 집착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분명히 공간적인 제약속에서 활동하셨으며, 부활하신 모습은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속에서 인간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승천하시는 모습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공간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밖에 또 다른 어떤 공간이 있어서, 이곳과 그곳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는 분명히 인류의 구원에 대한 섭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우주에 대한 개념없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수 없으며, 반면에 우주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인간의 해석 능력도 확대되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확대된 계시도 더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감정 그리고 지성과 철학에 기초하는 종교들은 ‘지성적인 종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참 종교’는 아니다. 궁극적인 실체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뿐이며, 영적인 경험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하나의 도덕률에 불과할 것이다. 참 종교는 개인의 궁극적인 운명이 확실히 성취되는 것이어야 하며, 우주적인 실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지성적 종교’가 아니라 ‘참 종교’이다. 우주 속에서 궁극적으로 추구되는 실체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확실히 계시되었고, 말씀으로 ‘계셨던’ 즉,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즉 확실한 실체로써 인간과 함께 존재하셨으며,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고’ 즉 지금이나 영원히 존재하시고 있으며, 구원얻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게’된다는 것은 우주성과 실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복음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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