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및 근대 기독교와 우주관(2) -성경 해석학의 발전과 우주관
1) 성경 해석과 문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적,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초대 교회는 헬라 문화의 상황가운데에서 복음을 이해시키면서도 그 본래의 메시지를 보존하는 두 가지의 일을 추구하면서 이원론적 헬라 사상에서 발단된 이단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신교 정통주의는 그 당시 교회의 타락성을 공격하면서 계몽기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신학을 형성하였다. 그 뒤를 이은 경건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또는 많은 현대 신학들도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기독교 메시지를 현실적 문화 상황에 맞도록 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시대마다 문화적 요구의 흐름이 신학을 이끌어 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상황가운데서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본다. 교회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상황에 맞게 해석하면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사명을 갖는다.
인류는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문화적 상황속에 처해 있다. 시대마다 사상과 생각이 다르듯이 문화적 상황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도 달라져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먼저 그 상황들을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하며, 해당되는 카테고리 내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각각의 문화적인 편견을 탐구하고 성경적인 보편성을 발견하여 초문화적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출현한다. 특별한 문화적인 환경에 의하여 조성되는 이질적인 언어가운데 메시지가 표현되더라도, 공통적인 인간성에 근거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신학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개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전하시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서 두 차원 사이에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차이를 초월하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질적인 문화간에 대화할 때에도 각각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서로간에 메시지에 대한 의미의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와 함께, 그 메시지를 받았던 사람들의 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메시지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주권아래 기록한 성경을 인간의 문화적 상황하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무조건 인간의 상황에 마추어서 교회가 해석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기준을 세울 것인가 하는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성경 해석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 역사가 길지는 못하였다.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의사 전달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제한 조건들과 전달의 방편들이다. 사람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표정이나 억양, 감정등 수많은 조건들이 함께 이루어지며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단 문서로 기록되면 거기에는 오직 글자만이 있을 뿐 이차적인 전달 수단들은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전달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며, 참된 해석의 방편에는 이러한 이차적 수단들을 재현하는 노력이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2) 성경 해석학과 신학
성경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은 ‘해석자’란 의미를 가진 헬라어 ‘hermeneu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요 웅변의 수호자인 ‘Hermes’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고대의 헬라 시대에는 옛날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들보다 진리의 근원에 더 가까이 접근한 위치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으므로 이들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록 문서들은 특별한 경외와 세심한 배려로 해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성경을 해석하게 된 학문적인 기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의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이어 받았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정확한 원리를 깨달아 적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여, 성경 해석학을 기독교 신학 연구의 중요한 분야로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 해석방법에 있어서 축어적 해석, 비유적 해석, 유추적 해석, 영적(또는 신비적, 초자연적)해석 등 여러가지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학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 방법에 대한 규율이 있었으며, 이 규율에 따라 신중히 평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계몽기까지 교회내에서 계속되었으며, 오늘날의 보수적인 개신교단들에서도 아직 이러한 해석 방법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경 해석학은 상황이나 언어, 역사 문화와 같은 보편적인 것들을 다루는 일반 성경 해석학과, 수사나 상징, 시, 예언, 예표, 교의적 교훈, 그리고 다양한 문학적 형태등 특수한 것을 취급하는 특수 성경 해석학이 있다.
성경 해석학은 신학 또는 다른 학문을 전제로 하여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방법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원문을 찾아내는 원문 비평에 근거를 두어야하며, 원문 해석은 성경 해석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방향의 신학이든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바로 원문 해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성경 해석법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또한 신앙공동체의 밖에 있으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충분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성서 해석자는 진리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크리스찬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학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생활, 교회의 사업 그리고 교회의 사명에 대한 근간이 된다.
3) 해석학의 역사적 발전
a. 유대주의의 성경 해석(B.C.458-A.D.550)
유대에서의 성경 해석의 시초는 에스라부터였다고 여겨진다. 포로기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회개 운동과 함께, 모세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적절한 해석과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평민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원문을 아람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뒤따랐다. 또한 특기할만한 초기의 유대 집단 사회로는 쿰란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일종의 은둔자의 집단으로서 유대 사회의 주류에서 분리되어 나온 단체였으며, 종말론에 근거를 두고 자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공동 생활과 종교적인 실천을 강조하였다.
마카비시대부터 헤롯시대 말기까지 유대의 성경 해석은 각기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던 두 사람의 랍비에 의한 일련의 논쟁으로 특징지워진다. 힐렐과 삼마이라는 이 두 랍비 학파는 유대인의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었다. 삼마이는 곧은 엄격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반면에 힐렐은 주위환경 여건에 따라 주어지는 요인들을 강조하였다.
주후 약 10년부터 550년까지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유대의 성경 해석자들에 의해 저술되었고, 성경 원문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해석된 것을 다시 해석하여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로 발전되었다.
지중해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는 필로(Philo)가 가장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는 풍유적인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헬라 철학에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b. 교부 시대의 성경 해석(A.D.95-590)
교부 시대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초기의 신경이 채택되었고, 정경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수많은 교의적 대립에 의해 정통과 이단이 구별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를 체계화하면서, 유대적 전통의 뿌리에서 헬라와 로마 문화로 옮겨 가는 전환기가 되었으며, 성경 해석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이 있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라는 견지에서 성경을 해석하였고, 이그나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된 신앙심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말시온은 구약 성경을 용인하지 않고 누가복음외에는 복음의 어느 것도 용인하지 않는 등 극단적인 반 유대적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순교자 져스틴은 구약 성경을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레니우스는 건전한 역사적 투시력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이끌었던 판테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은 창조적인 사상가로 꼽히는데, 특히 오리겐이 성경 연구와 성경 해석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풍유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하였으며, 원문 비평, 일반적인 성경연구, 변증법, 인간적인 학식과 지식등 전반적인 것들을 도입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한편 안디옥 학파에는 데오빌로, 크리소스톰, 디오도르 등의 학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역사적인 해석을 강조하였으며 은유적인 방법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신학적인 논쟁 특히 네스토리아 학파와의 논쟁과 동서방 교회의 분리와 함께 안디옥 학파는 영향력을 잃고,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취하는 풍유적 해석방법이 보편적이 되었다.
제롬은 초기에는 풍유적인 해석방법만을 취했으나 여러 가지의 해석방법을 수용하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풍유적인 해석방법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그의 철학과 신학에 끼친 지대한 공헌에 비해 성경 해석학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c. 중세 시대의 성경 해석(600-1340)
중세의 교회 전통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통치 수단이었으며, 성경적인 기록 문서들과 교부들의 기록 문서들은 권위와 힘을 가진 교회의 요구에 의해 사용될 뿐이었다. 모든 지성적 사상은 철학적인 신학과 신학적인 철학에 의하여 통제되었으며, 위대한 성경적인 학풍은 불가능한 시대였다.이 시기의 성경이 일반 백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교회의 언어로써만 명맥을 유지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수도사들의 필사와 번역의 작업은 학문의 불꽃을 활활 타게 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기에도 신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것은 풍유적인 성경 해석방법이었으며, 중세 말엽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요 철학자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풍유적인 해석 방법에서 탈피하여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하였다.
d. 종교 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1483-1564)
‘오직 말씀으로만’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성경 해석의 방법론과 해석에 대한 실제적 실천의 양면에 커다란 진보가 오게 되었다. 14 세기로부터 16세기의 문예 부흥과 16세기의 종교 개혁, 그리고 18세기의 계몽기는 성경 해석학자들의 관심을 변화시켰다. 문예부흥의 결과로 헬라 철학은 물론 고전과 고대 필사본에 관한 연구가 강조됨으로써 본래의 원문에 대한 연구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성경 해석학의 분위기가 생겼으며, 히브리어 문법과 사전이 만들어지고, 헬라어 신약 원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마틴 루터는 우선적으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중심적 주제에 관심을 두고, 풍유적 해석 방법을 버리고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의 중요한 개념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해석자가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해야만 성경 속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로교와 개혁 교회의 창시자인 칼빈은 조직적이고도 세심한 해석방법을 도입하였으며, 루터의 견해와 일치하였다. 벌코프는 종교 개혁시대의 본질적인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에 대한 모든 이해와 해석은 믿음의 유추와 일치되게 하고, 통일된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되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는 하였어도, 신조와 신앙 고백이 또 다른 권위를 갖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 개신 교회들에서 주석과 성경 해석은 다시 교의학의 시녀로 전락되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개신교 성경 해석학 분야에 괄목할 만한 세 가지 발전이 있었다. 첫째로 소시누스교(Socinians)는 성경이 합리적인 방법, 즉 이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로는 화란의 신학자 코체주스(Coccejus)를 들 수 있는데, 성경의 각 구절은 그 구절의 문맥에 비추어, 그리고 그 구절에 담겨진 사상과 저자의 목적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로 경건주의자들은 다양한 개신 교단들 사이에서의 모든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교의적인 성경 해석에 반대하여 성령의 감동아래에서 원문으로 된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성경 해석학에 큰 전환점이 이루어졌고, 거의 천년이 가깝도록 지배하고 있었던 풍유적 해석방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강조 사항으로 대치되었다. 첫째 원래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 원문에 대한 연구, 둘째 평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셋째 각 개인들은 그들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 종교 개혁 후 시대의 성경 해석(1588-1804)
종교 개혁 후 시대에는 성경의 원문적, 언어적,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큰 진전을 보았다. 또한 자연신론 자, 인문주의 자, 경험주의 자와 함께 발발한 합리주의는 성경 해석에 철학적인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합리주의 자들은 이성에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버리고 단지 일부분만을 용인하였으며, 경험주의 자들은 감각적 경험을 성경 해석의 표준으로 삼았다.
f. 19세기의 성경 해석
19세기에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교회에서보다는 독일에 있는 여러 대학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학문적인 경향이 더 많이 강조된 결과로 철학적 전제와 역사적 비평이 교회의 가르침보다도 중요시되게 되었다. 철학적 기반으로는 합리주의가 깔려 있었으며, 자유신학이 발전되었다. 또한 역사적 비평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문법학파와 역사적학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성경의 기원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았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경향으로 대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성경 해석학과 주석에 있어서의 세 가지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극단적인 합리주의의 경향은 자연주의적인 것, 신화적인 것, 변증법적인 것, 그리고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경향은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영감과 절대적인 무오성을 믿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엄격한 문법적 역사적 의미의 한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는 경향이었다.
19세기는 합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논쟁의 주제 였으나 원문을 결정하려는 연구는 매우 큰 업적이었다. 성경의 연구에 객관적인 비평 방법이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성경 해석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을 부정적인 발전으로 보았는데 역사적 비평 방법과 자연주의적 전제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로 볼 때 이들이 거의 대부분 이었지만 보수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하는 데에 실패하였고, 19세기의 영향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역사적인 비평 방법의 토대 위에 신 성경 해석학이 대두되게 되었다.
g. 20세기의 성경 해석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후로는 미국이 성경 및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면서 성경 연구와 해석학에도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합리주의의 이상이 무너지고 학구적 연구에 회의를 가지면서 실천 신학과 실용주의의 경향이 반영되게 되었다. 성경 원문보다는 해석자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으며, 철학적인 면보다는 언어적 역사적, 신학적인 견지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본격적인 성경 해석법의 발전은 종교 개혁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 해석의 방법들이 철학과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의 근간이 성경 해석방법에 있다고 한다면,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 해석에 따라 신학의 방향도 철학적으로 변하였다는 말이 된다.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영적인 문제를 철학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과연 옳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타당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철학 이외의 방법을 일체 도외시하였던 태도만큼은 편협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 기록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논쟁적인 성경 해석법은 배제되어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을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하려는 일부 과학자들의 태도는 전달되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과학적인 사실성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위험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성경 해석과 문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적,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초대 교회는 헬라 문화의 상황가운데에서 복음을 이해시키면서도 그 본래의 메시지를 보존하는 두 가지의 일을 추구하면서 이원론적 헬라 사상에서 발단된 이단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신교 정통주의는 그 당시 교회의 타락성을 공격하면서 계몽기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신학을 형성하였다. 그 뒤를 이은 경건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또는 많은 현대 신학들도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기독교 메시지를 현실적 문화 상황에 맞도록 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시대마다 문화적 요구의 흐름이 신학을 이끌어 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상황가운데서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본다. 교회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상황에 맞게 해석하면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사명을 갖는다.
인류는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문화적 상황속에 처해 있다. 시대마다 사상과 생각이 다르듯이 문화적 상황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도 달라져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먼저 그 상황들을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하며, 해당되는 카테고리 내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각각의 문화적인 편견을 탐구하고 성경적인 보편성을 발견하여 초문화적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출현한다. 특별한 문화적인 환경에 의하여 조성되는 이질적인 언어가운데 메시지가 표현되더라도, 공통적인 인간성에 근거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신학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개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전하시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서 두 차원 사이에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차이를 초월하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질적인 문화간에 대화할 때에도 각각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서로간에 메시지에 대한 의미의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와 함께, 그 메시지를 받았던 사람들의 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메시지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주권아래 기록한 성경을 인간의 문화적 상황하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무조건 인간의 상황에 마추어서 교회가 해석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기준을 세울 것인가 하는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성경 해석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 역사가 길지는 못하였다.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의사 전달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제한 조건들과 전달의 방편들이다. 사람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표정이나 억양, 감정등 수많은 조건들이 함께 이루어지며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단 문서로 기록되면 거기에는 오직 글자만이 있을 뿐 이차적인 전달 수단들은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전달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며, 참된 해석의 방편에는 이러한 이차적 수단들을 재현하는 노력이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2) 성경 해석학과 신학
성경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은 ‘해석자’란 의미를 가진 헬라어 ‘hermeneu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요 웅변의 수호자인 ‘Hermes’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고대의 헬라 시대에는 옛날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들보다 진리의 근원에 더 가까이 접근한 위치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으므로 이들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록 문서들은 특별한 경외와 세심한 배려로 해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성경을 해석하게 된 학문적인 기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의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이어 받았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정확한 원리를 깨달아 적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여, 성경 해석학을 기독교 신학 연구의 중요한 분야로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 해석방법에 있어서 축어적 해석, 비유적 해석, 유추적 해석, 영적(또는 신비적, 초자연적)해석 등 여러가지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학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 방법에 대한 규율이 있었으며, 이 규율에 따라 신중히 평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계몽기까지 교회내에서 계속되었으며, 오늘날의 보수적인 개신교단들에서도 아직 이러한 해석 방법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경 해석학은 상황이나 언어, 역사 문화와 같은 보편적인 것들을 다루는 일반 성경 해석학과, 수사나 상징, 시, 예언, 예표, 교의적 교훈, 그리고 다양한 문학적 형태등 특수한 것을 취급하는 특수 성경 해석학이 있다.
성경 해석학은 신학 또는 다른 학문을 전제로 하여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방법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원문을 찾아내는 원문 비평에 근거를 두어야하며, 원문 해석은 성경 해석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방향의 신학이든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바로 원문 해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성경 해석법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또한 신앙공동체의 밖에 있으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충분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성서 해석자는 진리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크리스찬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학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생활, 교회의 사업 그리고 교회의 사명에 대한 근간이 된다.
3) 해석학의 역사적 발전
a. 유대주의의 성경 해석(B.C.458-A.D.550)
유대에서의 성경 해석의 시초는 에스라부터였다고 여겨진다. 포로기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회개 운동과 함께, 모세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적절한 해석과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평민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원문을 아람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뒤따랐다. 또한 특기할만한 초기의 유대 집단 사회로는 쿰란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일종의 은둔자의 집단으로서 유대 사회의 주류에서 분리되어 나온 단체였으며, 종말론에 근거를 두고 자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공동 생활과 종교적인 실천을 강조하였다.
마카비시대부터 헤롯시대 말기까지 유대의 성경 해석은 각기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던 두 사람의 랍비에 의한 일련의 논쟁으로 특징지워진다. 힐렐과 삼마이라는 이 두 랍비 학파는 유대인의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었다. 삼마이는 곧은 엄격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반면에 힐렐은 주위환경 여건에 따라 주어지는 요인들을 강조하였다.
주후 약 10년부터 550년까지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유대의 성경 해석자들에 의해 저술되었고, 성경 원문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해석된 것을 다시 해석하여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로 발전되었다.
지중해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는 필로(Philo)가 가장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는 풍유적인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헬라 철학에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b. 교부 시대의 성경 해석(A.D.95-590)
교부 시대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초기의 신경이 채택되었고, 정경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수많은 교의적 대립에 의해 정통과 이단이 구별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를 체계화하면서, 유대적 전통의 뿌리에서 헬라와 로마 문화로 옮겨 가는 전환기가 되었으며, 성경 해석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이 있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라는 견지에서 성경을 해석하였고, 이그나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된 신앙심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말시온은 구약 성경을 용인하지 않고 누가복음외에는 복음의 어느 것도 용인하지 않는 등 극단적인 반 유대적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순교자 져스틴은 구약 성경을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레니우스는 건전한 역사적 투시력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이끌었던 판테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은 창조적인 사상가로 꼽히는데, 특히 오리겐이 성경 연구와 성경 해석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풍유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하였으며, 원문 비평, 일반적인 성경연구, 변증법, 인간적인 학식과 지식등 전반적인 것들을 도입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한편 안디옥 학파에는 데오빌로, 크리소스톰, 디오도르 등의 학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역사적인 해석을 강조하였으며 은유적인 방법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신학적인 논쟁 특히 네스토리아 학파와의 논쟁과 동서방 교회의 분리와 함께 안디옥 학파는 영향력을 잃고,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취하는 풍유적 해석방법이 보편적이 되었다.
제롬은 초기에는 풍유적인 해석방법만을 취했으나 여러 가지의 해석방법을 수용하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풍유적인 해석방법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그의 철학과 신학에 끼친 지대한 공헌에 비해 성경 해석학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c. 중세 시대의 성경 해석(600-1340)
중세의 교회 전통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통치 수단이었으며, 성경적인 기록 문서들과 교부들의 기록 문서들은 권위와 힘을 가진 교회의 요구에 의해 사용될 뿐이었다. 모든 지성적 사상은 철학적인 신학과 신학적인 철학에 의하여 통제되었으며, 위대한 성경적인 학풍은 불가능한 시대였다.이 시기의 성경이 일반 백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교회의 언어로써만 명맥을 유지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수도사들의 필사와 번역의 작업은 학문의 불꽃을 활활 타게 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기에도 신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것은 풍유적인 성경 해석방법이었으며, 중세 말엽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요 철학자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풍유적인 해석 방법에서 탈피하여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하였다.
d. 종교 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1483-1564)
‘오직 말씀으로만’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성경 해석의 방법론과 해석에 대한 실제적 실천의 양면에 커다란 진보가 오게 되었다. 14 세기로부터 16세기의 문예 부흥과 16세기의 종교 개혁, 그리고 18세기의 계몽기는 성경 해석학자들의 관심을 변화시켰다. 문예부흥의 결과로 헬라 철학은 물론 고전과 고대 필사본에 관한 연구가 강조됨으로써 본래의 원문에 대한 연구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성경 해석학의 분위기가 생겼으며, 히브리어 문법과 사전이 만들어지고, 헬라어 신약 원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마틴 루터는 우선적으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중심적 주제에 관심을 두고, 풍유적 해석 방법을 버리고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의 중요한 개념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해석자가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해야만 성경 속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로교와 개혁 교회의 창시자인 칼빈은 조직적이고도 세심한 해석방법을 도입하였으며, 루터의 견해와 일치하였다. 벌코프는 종교 개혁시대의 본질적인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에 대한 모든 이해와 해석은 믿음의 유추와 일치되게 하고, 통일된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되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는 하였어도, 신조와 신앙 고백이 또 다른 권위를 갖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 개신 교회들에서 주석과 성경 해석은 다시 교의학의 시녀로 전락되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개신교 성경 해석학 분야에 괄목할 만한 세 가지 발전이 있었다. 첫째로 소시누스교(Socinians)는 성경이 합리적인 방법, 즉 이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로는 화란의 신학자 코체주스(Coccejus)를 들 수 있는데, 성경의 각 구절은 그 구절의 문맥에 비추어, 그리고 그 구절에 담겨진 사상과 저자의 목적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로 경건주의자들은 다양한 개신 교단들 사이에서의 모든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교의적인 성경 해석에 반대하여 성령의 감동아래에서 원문으로 된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성경 해석학에 큰 전환점이 이루어졌고, 거의 천년이 가깝도록 지배하고 있었던 풍유적 해석방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강조 사항으로 대치되었다. 첫째 원래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 원문에 대한 연구, 둘째 평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셋째 각 개인들은 그들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 종교 개혁 후 시대의 성경 해석(1588-1804)
종교 개혁 후 시대에는 성경의 원문적, 언어적,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큰 진전을 보았다. 또한 자연신론 자, 인문주의 자, 경험주의 자와 함께 발발한 합리주의는 성경 해석에 철학적인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합리주의 자들은 이성에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버리고 단지 일부분만을 용인하였으며, 경험주의 자들은 감각적 경험을 성경 해석의 표준으로 삼았다.
f. 19세기의 성경 해석
19세기에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교회에서보다는 독일에 있는 여러 대학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학문적인 경향이 더 많이 강조된 결과로 철학적 전제와 역사적 비평이 교회의 가르침보다도 중요시되게 되었다. 철학적 기반으로는 합리주의가 깔려 있었으며, 자유신학이 발전되었다. 또한 역사적 비평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문법학파와 역사적학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성경의 기원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았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경향으로 대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성경 해석학과 주석에 있어서의 세 가지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극단적인 합리주의의 경향은 자연주의적인 것, 신화적인 것, 변증법적인 것, 그리고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경향은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영감과 절대적인 무오성을 믿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엄격한 문법적 역사적 의미의 한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는 경향이었다.
19세기는 합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논쟁의 주제 였으나 원문을 결정하려는 연구는 매우 큰 업적이었다. 성경의 연구에 객관적인 비평 방법이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성경 해석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을 부정적인 발전으로 보았는데 역사적 비평 방법과 자연주의적 전제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로 볼 때 이들이 거의 대부분 이었지만 보수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하는 데에 실패하였고, 19세기의 영향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역사적인 비평 방법의 토대 위에 신 성경 해석학이 대두되게 되었다.
g. 20세기의 성경 해석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후로는 미국이 성경 및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면서 성경 연구와 해석학에도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합리주의의 이상이 무너지고 학구적 연구에 회의를 가지면서 실천 신학과 실용주의의 경향이 반영되게 되었다. 성경 원문보다는 해석자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으며, 철학적인 면보다는 언어적 역사적, 신학적인 견지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본격적인 성경 해석법의 발전은 종교 개혁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 해석의 방법들이 철학과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의 근간이 성경 해석방법에 있다고 한다면,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 해석에 따라 신학의 방향도 철학적으로 변하였다는 말이 된다.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영적인 문제를 철학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과연 옳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타당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철학 이외의 방법을 일체 도외시하였던 태도만큼은 편협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 기록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논쟁적인 성경 해석법은 배제되어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을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하려는 일부 과학자들의 태도는 전달되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과학적인 사실성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위험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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