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3, 2011

현대 및 미래 기독교와 우주관(1)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 이해

현대 및 미래 기독교와 우주관(1)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 이해

칼빈은 하나님의 이해의 범위를 철저히 기록된 성경에로 돌려놓고자 하였다. 물론 창조의 섭리와 자연을 통한 계시의 가능성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매우 조심스럽게 하나의 가능성만을 열어놓은데 불과하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성경의 범위내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예 부흥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의 물결은 그러한 제한을 고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동안 하나님이 주신 진리인것처럼 여겨오던 사실들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이 과학적 증명에 의해 밝혀지면서, 전통적인 교리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성경은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부인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사태는 심각해진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철학적인 방법, 역사적인 방법, 사회학적인 방법 등 전혀 새로운 세속적인 시도들이 도입되면서, 신학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조직 신학의 각론들이 제각기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신학자마다 다른 하나님, 다른 성경, 다른 의미의 단어들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혼란의 주된 원인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각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서로 다른 데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1) 칸트의 인간학적 하나님 이해
하나님의 존재의 ‘인간학적 논증’은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존재, 인간의 도덕적 양심의 존재와 객관적 도덕적인 세계 질서의 개념이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논증의 방식은 칸트의 형이상학의 혁명과 같이 시작되었으며, 전통적인 인식론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인식의 과정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결과 하나님의 존재의 인식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식은 경험이며, 경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물의 인식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 오성을 거쳐 이성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경험의 과정에서 인식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고 현상일 뿐이다. 결국 이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경험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존재인 사물 자체 또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 존재의 인식을 승인하였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식론적 근거는 줄 수가 없지만 다만 도덕적 요청의 형식으로 인정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신앙이나 계시의 이름으로, 또는 이성의 이름으로 논증하던 유신론적 전통에 대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인식의 영역이 아니고 도덕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칸트 이후의 신학 체계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낙관주의적, 진화론적인 그리스도교를 이루기도 하였다.


2) 칼 바르트의 하나님 이해
신정통주의의 거장 칼 바르트의 지배적인 명제는, 하나님은 그 스스로 증거하시며, 하나님 자신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 자신이 제시하신다고 한다. 그의 신학의 독특성은 모든 교리가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보여지며,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주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무대로 형성되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참된 존재는 계시되고, 그 안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계시되며, 그에 의해서 요구는 만들어지고 약속은 성취된다. 이러한 동일한 관점에서 바르트는 창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으로 해석한다.


3) 불트만의 하나님 이해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길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 신학에서와 같이 교의학의 내용으로써 혹은 신학의 특수 구분으로서 자연 신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연 신학이 교의학의 소극적 가치로서 또는 신앙의 적극적 해석으로써 신학적 과제로서 불가결한 요소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연 지식은 하나의 질문이지 대답이 아니다. 신앙만이 그 질문에 대답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므로써 신앙은 자연 신학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자연 신학은 신앙밖에 있는 존재의 해석, 즉 불 신앙에 대한 신앙의 해석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성서의 주석은 다른 문서의 해석과 같이 편견이 없는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주석은 무전제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주석자는 특수한 질문을 가지고 성경 본문에 접근하게 되며, 그 본문이 갖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어떤 개념을 이미 갖고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이 전제를 “전이해”라고 하면서 케리그마 이해에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이해하였다. 인간 속에 지워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개념이 하나님 인식의 근본 전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4) 폴 틸리히의 하나님 이해
틸리히에 의하면 신 존재의 논증이나 증명은 그것으로써 신 존재 문제의 논증에 성공하였다든지 증명하였다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만 질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속에 있는 무한자의 의식이 신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안으로 경험되는 비존재의 위협이 비존재를 극복하는 존재의 질문과 불안을 극복하는 용기에 대한 질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하나님에 관한 우주론적 질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의 논증은 “인간은 하나님의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존재론적 분석일뿐이며 인간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그가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궁극적 실재(하나님)에 대한 추구는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성의 깊이’, ‘신비적 아프리오리’, ‘존재의 질문’으로써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궁극적 실재 즉 존재 자체에 속해 있고, 또 존재 자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현재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틸리히에 있어서 존재론적 질문은 인간의 상황의 기본 형태이고, 이 질문의 존재론적 상황은 존재 자체인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하고, 하나님의 추구를 불가피하게 한다.


5) 몰트만의 하나님 이해
1960년대 후반에 와서 문화적 상황과 신학의 언어는 변하였다. 인간 개인의 실존에 대한 관심이나 초월에 대한 관심보다는 역사, 미래, 희망 등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신의 죽음의 신학은 물러가고 종말, 미래의 지평에서 신학이 전개되는 미래학파라고도 불리는 희망의 신학 운동이 지배적이 되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그 출발점이 되었다. 칸트 이후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관념론적 세계관, 실존주의적 상황에서 인간학적으로 말하려고 하였던 현대 신학은 이제 미래와 희망의 관점위에서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였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존재 논증의 문제를 오늘의 하나님의 문제로서 보려고 한다. 오늘의 하나님의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이며, 오늘의 역사의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를 묻게 한다고 하였다.
복음을 우주론적 형이상학으로 해석한 옛 우주론적 신학은 이제 과학적 우주론이 활짝 열린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신화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비쳐질뿐이라고 하면서, 케리그마가 입었던 유신론적인 세계관 배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라고 단언하였다. 하나님의 존재의 우주론적 논증이 지나고 나서 신학에 새로이 들어왔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심리학적 논증(테카르트)’, ‘도덕적 논증(칸트)’, ‘실존적 논증(키에르케고올)’등 이었다. 그러나 몰트만은 인간학적 신학위에서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의 중요한 방향 전환을 보았다. 그는 묵시 문학적 종말론을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 즉 “희망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 하나님의 존재, 그의 완전한 동일성의 왕국은 오고 있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들을 살펴본 바와 같이, 철학적 사고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던 그들의 하나님 이해는 이제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으며, 개념적인 성경 해석의 범위안에 갇혀있던 자신을 과감히 탈피해 보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을 발견하게 된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틸리히 역시 개념적 정의에 머물러 있다는 현대 신학계에,그 하나님 본체에 대해 추구해 보고자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신학적 조류와 분야들에 의해 ‘신학’이 발전되었을지는 몰라도, 정작 그 모든 신학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별로 그렇지 못하였던것이 사실이다. 틸리히의 말대로 신학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신학의 지류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지고, 전체성으로써의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다시 세워져야 할 때라고 본다. 이제는 철학의 시녀가 되는 신학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을 포함한 인류 사회 전체의 학문과 진리탐구 의지를 통합하는, 전체성으로써의 우주적 신학이 성립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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