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20-30절에는 부자 청년과 베드로 두 사람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기록돼 있는데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그리하면” 이라는 조건과 다른 하나는 “그런즉”이라는 단어로, 포기하는 것에 대한 보상의 문제다. 부자 청년 관원에게 예수께서 “소유물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조건을 제시하고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는 보상을 약속했다. 이 대화를 들은 베드로는 자신은 이미 이 조건을 실천했으므로 “무엇을 보상으로 주실 것인지” 예수께 질문했다. 이것을 그들만 아니라 성도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주님을 위해 물질이나 시간을 포기하겠으니” “~을 주셔야 됩니다.”
이러한 성도의 태도가 당위성을 갖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실제 행동으로 무슨 보상을 주셨나?”
사람은 보편적으로 보상이 더 커야만 포기한다. 만약 손해나 본전치기가 예상된다면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보상 받기 원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더 큰 부자 되기 원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선언했다. 제자들은 대단히 충격 받았다. 그들은 왜 놀랐을까? 베드로의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들 역시 이 세상에서의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셨나? 이 세상에서 어떤 보상 주셨나?
애고보서 1:14-16절(“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에서 증거하듯, 이 세상에서의 보상을 바라면서 포기할 때 반드시 사탄이 개입한다. 만족스런 보상을 받지 못하면 “섭섭”한 마음이 생기고, 만족스럽게 보상 받으면 “더 큰 보상에 대한 욕심과 야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천국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이다.
반면에 예수의 행동 즉 삶 자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때 이 세상에서 더 크게 보상받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보상은 세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화”였다. 같은 말씀이 마가복음 10:28-30에 기록돼 있는데, 보상의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다(“28.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금세에 있어”라 했으니, 이 세상에서 보상받는다는 약속일터인데, 그 내용들을 100배나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약속을 받은 베드로 역시 세상에서는 아무 보상 없이 복음 전하다 결국 순교했다. 예수 자신은 십자가에서 무참히 돌아가셨다. 따라서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라는 말씀은 후대에 인위적으로 첨부됐거나, 천국에서의 보상을 잘못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의 제자란 예수의 행동을 본받는 자, 본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다. 무엇이든 주를 위해 포기하거나 희생할 때,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서 보상받기를 더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상받더라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사명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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