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뿌리 깊은 역사적 관계 속에서 유지됐다. 통일 왕국이 분열한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오늘날 시리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자기 백성을 그곳에 정착시킴으로써 완전한 통치를 이어가려 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유대인으로부터 멸시당하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귀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후 일부가 귀환하여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북왕국 출신 이스라엘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기 원했지만 유대인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 때부터 두 민족은 철천지 원수가 돼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 출신인 예수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행동을 보여줬다. 요한복음 4장 1-10절을 보면, 유대인은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들로 인하여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 멀리 돌아가야만 했지만,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통과해 지나갔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들이 모이는 장소인 우물곁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가까이 다가올 때 당연히 저주하며 쫓아버리든지 피하든지 해야만 함에도 오히려 가까이 오도록 허용했다.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으니, 유대인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사마리아 여인도 대단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조건, 상식, 환경, 전통 등 어떤 것에도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었나?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인 예수를 결코 만날 수 없는 처지였다. 자격 없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예수께서 모든 것을 초월해 만나주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잠재적 자녀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 뜻대로 양심과 윤리에 따라 선하게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야만 한다. 이스라엘은 십계명과 율법을 통해 이 진리를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진리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마태복음 5:17, 요한복음 15:10 참조)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고 못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저주로 끝내실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예수께 나아갈 수 없나? 세상과 종교인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정죄하고 자신만 복 받기 원한다. 마치 자신은 그러한 정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반면에 예수님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누구든 만나주고 대화하셨다.
요한복음 4장 1-10절의 예수님의 행동의 목적은 생수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더라도 생수를 받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생수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어떤 희생과 수고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 생수를 받지 못하거나 전달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세상에 이 생수가 전달되지 않음은 누구 때문일까?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 오늘날까지 중단 없이 생수를 쏟아부어주고 계시지만, 이 생수를 전달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생수를 받을 대상의 범위를 자기 뜻대로 정하여 배제시키려는 마음, 권위의식, 위압감의 성전(교회), 복잡한 교리, 예식, 성직 등을 더 중요시하면서 상대방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태도, 자신이 베풀기라도 하듯 거만함과 무시 그리고 굴복을 강요하는 자세 등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0:8 말씀(“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처럼 그렇게 행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수를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이 생수를 주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초월하는 행동을 하셨다. 예수 믿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가 잘 전달 될 수 있도록 예수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일상생활 중에도...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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