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20-24절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행동을 엿볼 수 있는데, 고을마다 권능을 똑같이 베푸시지 않았고, 혹은 많이 혹은 적게 베푸셨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단에 있는 마을들이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풀었는데 회개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그 마을 사람들이 회개치 않을 것을 몰랐기 때문에 권능을 그토록 많이 베푸셨을까?
예수의 행동을 살펴보면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 그리고 누가복음 8장의 “씨 뿌리는 자 비유”처럼 효과가 기대되지 않는 마을에서도 권능을 베푸셨다. 누구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 베푸셨으며 오직 결과로 판단하셨다. 또한 기대하는 결과 이뤄지지 않아도 미리 포기하지는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부족한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진리다.
예수께서 권능을 베푸시는 목적 즉 기대하는 결과는 분명하다. “회개”다. 예수가 말씀한 회개란 어떤 의미인가? 한마디로 “진리 즉 천국복음을 깨닫고 삶이 변화됨”이다. 권능을 체험하고도 회개치 않는다는 것은 삶이 변화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주님께 책망 받고 화를 당하게 되며 심판의 대상이 되어 음부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오히려 회개치 않았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회개하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 큰 기적 베풀어서라도 회개시키기 원한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 큰 기적을 체험했다고 자랑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회개치 않는다면...
예수님은 왜 믿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권능을 베푸는 행동을 했을까? 요한복음 6장 38-40절(“38.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에 비춰보면, 아버지께서 주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시기 위해서였으며 구별 기준은 회개 즉 하나님 뜻에 맞추는 삶의 변화였다. 더 큰 기적 체험에만 관심을 두고 삶이 변화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자이고, 하나님 뜻대로 삶이 변화되어가는 자가 하나님이 주신 자다.
심판의 날은 삶의 내용에 대해 결산하는 날이며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게 될 날이다. 하나님을 속일 자는 아무도 없다.
크게 4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겠다: 부류-1: 권능 체험하지 못하고 회개치 않은 자(하나님 뜻에 따라 반드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부류-2: 권능을 체험하고도 회개치 않는 자(이미 심판을 받았다.) 부류-3: 권능을 체험하고 회개한 자(복된 자!) 부류-4: 권능 체험치 않았음에도 회개하는 자(가장 복된 자!!!)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 체험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 것인가?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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