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생적으로 육신의 만족과 쾌락을 통해 기쁨을 추구한다. 식욕, 물욕, 그리고 성욕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쾌락의 강도는 육신의 쇠락과 함께 약해지게 마련이지만, 정신이나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옛 쾌락을 다시 맛보기 원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강도 높은 다른 방법을 추구하다가, 몸을 망치고 절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패망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육신의 쾌락보다 더 강하고 지속적인 동시에 더 강력한 기쁨을 발견하고 맛본다면 어떻게 될까?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바보가 없을 것이다.
누가복음 2장은 소년 예수의 가족이 유월절에 성전을 방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12세쯤 되어 예루살렘 성전의 성인식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성인식 이전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책임지지만 성인식 이후에는 아버지가 책임지게 돼 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자, 남녀유별 전통에 따라 무리를 지어 길을 떠났다. 아마 서로 상대방이 아이를 챙길 것이라 생각하고 길을 떠났던 것 같다.
예수는 성전에 몰입돼 있었으므로 자기 일행이 길 떠난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예수의 부모는 길을 떠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이가 없음을 알고 찾아 나섰지만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이 때 소년 예수는 자신의 참 아버지 즉 하나님 아버지 집에 거함으로써 아버지 뜻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12살에 이미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성도는 어디서 이러한 기쁨을 찾고 있나?
누가복음 2장 46절은 아버지 집에서 예수가 한 행동들을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듣기였다. “아버지 집”의 의미는 “아버지와 교제하는 곳”이다. 아버지 집에 있다함은 아버지 집에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교제한다는 의미다. 그러면 듣기만 잘 하면 훌륭한 교제일까? 예수는 12세에 이미 그 수준 넘어섰다. 둘째는 선생들과 함께했다.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 학생으로서 대화에 동참했다. 선생을 무서워하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셋째로 질문했다. 수동적인 학생은 선생에게 묻기를 두려워한다. 능동적 사고나 연구 또는 판단하기를 싫어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무조건 듣게만 하고 묻지 못하게 한다면 능동적 학생을 키우지 못하는 나쁜 선생일 수밖에 없다. 넷째로, 소년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 집에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와 교제하는 기쁨이 비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이었다. 시편기자는 84편 10절과 27편 4절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고, 불평불만과 고통 속에서 원망하다 배신에 이를 수도 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행동과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크게 당황했다. 매우 신실한 신앙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들 입장에서 생각했기에 아들에게 불평불만하고 분노하며 야단치기까지 했다. 성도의 신앙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신앙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예수의 부모와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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