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가셨다. 그런데 마태복음 3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의 뜻에 이의를 제기했고, 예수께서 설득함으로써 결국 세례를 베푼 것으로 돼있다. 아무튼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세례를 받은 형국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평가는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아들”이었다. 예수가 무엇을 행하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 중에 누가 큰가? 당연히 주는 자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반대했던 것이다. 예수는 창조주시요 세례 요한은 피조물이다. 어떻게 세례 요한이 더 큰 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태복음 13장 12절(“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행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이 직접 높여주시므로 세례 받은 예수가 더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아버지에 의해 높아지는 아들이었기에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 성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기쁘시게 해 드리는 비결은 이러한 예수의 행동을 닮아감에 있다.
순종해야 할 때 억지로 하는 자가 있는 반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자가 있다. 누가 더 큰 사랑을 받고 더 큰 기쁨을 드리게 될까? 예수는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처럼 신앙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아들이었기에 아버지가 사랑하시고 기뻐하셨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기쁘시게 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창조주 예수는 왜 자발적으로 피조물에게 세례 받았을까? 예수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의” 즉 바름의 기준은 피조물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이 “의”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다 “불의”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를 생각할 수 있다. “영혼의 의”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믿음으로 구원받음)인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육신의 의”도 이뤄야 비로소 “모든 의”가 된다. 왜 그럴까? 육신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의란 자연 법칙을 비롯한 창조섭리이며, 세상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도다. 이 육신의 법도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우신 사명자이므로, 인자이신 예수도 세례 요한에게서 육신의 세례 받음이 마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 역시 영혼의 의뿐 아니라 육신의 의도 이루기 위해 노력함이 마땅하다. 하나님만 잘 믿으면 세상살이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하다.
하나님의 아들(자녀)인 성도에게 최고의 복은 무엇일까? 오래 사는 것? 부자 되는 것? 출세? 존경받으면? 이런 것들은 아무리 많이 누린다 해도 죽으면 끝이다. 영생을 믿는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기쁘시게 해드린 자녀가 받는 영원한 복이 최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의 행동 본받아, 영혼의 의와 육신의 의를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 이뤄가는 것이 참 신앙일 것이다.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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