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때 많은 사람이 나와서 환영했고 마치 왕처럼 예우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누가복음 19:41)” 왜 우셨을까? 예루살렘이 곧 파괴될 것을 알지만 미리 막아줄 능력이 없어서였을까?
그렇다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성도 개인이 당하게 될 고난과 고통에 대해 예수님은 지금 어떤 입장인가? 고난과 고통을 미리 막아줄 능력이 없으신가? 그럴 뜻이 없으신가? 그래서 그러한 성도를 바라보며 울고 계실까?
41절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셨다”고 기록돼 있다. “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면밀히 실펴보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루살렘의 과거는 왕과 귀족 대 제사장 계급과 선지자 사이의 투쟁 그리고 일반 백성의 고난으로 점철돼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현재는 축제의 모습인데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는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로마와 결탁했고 반대세력을 죽이면서 백성을 무지 속에 가둬두고 있었다. 이 순간 이후의 미래는 선민의식으로 인해 복음을 온전히 거부하고 선동과 항쟁을 계속하다가 로마의 침공을 받아 멸망당하게 되며 백성은 극도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 뿐만 아니라 백성 개개인의 운명을 세밀하게 살피고 완전하게 인식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인식 속에서 우셨다. 누구를 향한 눈물이었을까? 예루살렘 성? 로마? 유대인 지도자? 아니다. 우매한 백성과 선지자들을 행한 눈물이었다. 마태복음 13장 24-30절의 소위 “가라지 비유”를 보면 예수는 자비의 창조주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아직 아버지의 때 즉 심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직접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우실 수밖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최고 관심은 진리 편에 서서 살고자 하는 성도 개개인이며, 아직 심판의 때가 임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이다.
신실한 성도 역시 고난당하고 핍박당할 가능성이 있다. 즉시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께서 보고 계신다. 성도 개개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면밀히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가 울고 계신다. 성도가 당하는 억울한 고난과 핍박을 마음에 새기고 계시기 때문이다. 셋째, 권고 받는 날에 대해 예수가 말씀하신다. 그 날 알기를 거부한 자들은 원인과 이유를 모르는 채 고난 속에서 원망하다 멸망당할 것이다. 반면에 그 날에 대해 알게 된 자들은 견딜 수 있고, 피할 길로 안내받으며, 천국에서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후 70년 경 유대인의 항쟁을 로마 티투스 장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전이 완전히 파괴됐다. 예수의 눈물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예루살렘 가까이 오셔서 보시고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 마음에 새기고 끝날까지 신앙으로 승리해야 할 것이다.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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