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물 위로 걸었다는 성경 내용을 불신자들도 많이 안다. 그러나 기독교인 조차 기적적인 모습에만 집중하고 열광해 온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는 불가능한 능력을 인간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가 재촉하는 바람에 제자들끼리 배를 타고 건너다 풍랑을 맞아 고통당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실 수 없었나?” “풍랑이 일어나지 않게 하실 수 없었나?” “빨리 배를 타도록 재촉하지 말았어야 되지 않나?” 이런 의문이 생기면, 예수는 무능하거나 무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인간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본 결과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신 아들임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에 기록된 이 사건의 핵심은 창조주 예수의 입장에서 바라봐야만 파악될 수 있다. 예수는 두려워 떨고 있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했다. 비난 또는 책망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앙의 중요성과 참 의미를 일깨우기 위해서였을까?
의심 즉 염려와 좌절은 믿음(신앙)이 없다는 증거다. 믿음(신앙)은 저절로 생기지 않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생겨난다. 어느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용기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고난과 맞붙어 싸우고 실망에 대처할 필요가 있는 어떤 환경 속에서 양육돼야 한다.
신앙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의 정신은 그것이 믿을 수 있는 것보다 항상 적게 아는 골치 아픈 곤경에 처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충성심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배반당하고 버림받을 가능성 한 가운데서 꿋꿋해야 한다.
기쁨(행복한 만족감)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고통스런 양자택일과 고난의 가능성이 항상 현존해 체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영생 쟁취에 신앙이 유일한 필수요소임을 아는 예수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나? 그래서 예수의 행동이 때로는 사랑 없는 야박한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신앙이 생기고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그리고 더 심각한 풍랑(고난과 역경)에 직면해야 더 성숙해지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어떤 경우든 염려나 의심을 하지 않아만 되는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즉시 손을 내미셨을” 것이다. 믿음이 흔들려서 물에 빠질지라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즉시 손을 내밀어 너를 건져줄 것이라”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내가 즉시 손을 내밀어 너를 건져줄 것이라” “네가 불공평함의 희생자일지라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라 내가 즉시 손을 내밀어 너를 건져줄 것이라”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어떤 상황이든 신앙만 있으면 예수님이 반드시 즉시 손 내미신다.
예수께서 재촉하여 배를 타게 하지 않았다면 신앙이 생길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을지도 모른다. 풍랑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막아줬다면 신앙이 증명될 기회가 박탈되었을 것이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막아줬다면 신앙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도 박탈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행동을 더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더 깊은 통찰로 이해하고 감사함으로써 신앙이 성숙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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