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편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 제102편 종교적 신앙의 기초▶
종교의 진짜 본성
101:0.1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는, 진화하는 미개인의 원시적 두려움으로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당당하게 의식하는 그런 문명화된 필사자의 숭고하고 비길 데 없는 신앙 해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01:0.2 종교는 점진적 사회 진화에서 생기는 선진{先進} 윤리와 도덕의 선구자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는 단순한 도덕 운동이 아님에도, 종교가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모습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 및 도덕적 추진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종교는 사람의 진화하는 본성에 반드시 영감을 주지만, 그 진화의 비결은 아니다.
101:0.3 종교, 즉 인격체의 확신과_신념은, 믿지 않는 물질 정신에 잉태된, 절망이라는 피상적으로 모순된 논리를 반드시 타파할 수 있다. 순수하고 참된 내적{內的} 음성, 바로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 정말로 있다. 그리고 영의 이런 인도는 인간 양심의 윤리적 자극과는 다르다. 종교적으로 확신하는 느낌은 감정적 느낌 이상{以上}이다. 종교가 주는 확신은, 정신의 이성{理性}을 초월하고, 심지어 철학의 논리조차 초월한다. 종교는, 신앙과 신뢰와 확신이다.
101:0.2 종교는 점진적 사회 진화에서 생기는 선진{先進} 윤리와 도덕의 선구자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는 단순한 도덕 운동이 아님에도, 종교가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모습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 및 도덕적 추진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종교는 사람의 진화하는 본성에 반드시 영감을 주지만, 그 진화의 비결은 아니다.
101:0.3 종교, 즉 인격체의 확신과_신념은, 믿지 않는 물질 정신에 잉태된, 절망이라는 피상적으로 모순된 논리를 반드시 타파할 수 있다. 순수하고 참된 내적{內的} 음성, 바로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 정말로 있다. 그리고 영의 이런 인도는 인간 양심의 윤리적 자극과는 다르다. 종교적으로 확신하는 느낌은 감정적 느낌 이상{以上}이다. 종교가 주는 확신은, 정신의 이성{理性}을 초월하고, 심지어 철학의 논리조차 초월한다. 종교는, 신앙과 신뢰와 확신이다.
1. 참 종교
101:1.1 참 종교는, 자연스런 증명으로 이치가 도출되거나 입증될 수 있는 철학 신념 체계가 아니며, 몽상적 신비주의 신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경이라는 막연한 느낌 같은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체험도 아니다. 종교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지만, 내부 관점에서는 대체로 이성적이다. 종교는 인간 철학의 논리에서 도출되지 않지만, 필사자의 체험으로서는 대체로 논리적이다. 종교는, 진화적으로 유래된 도덕적 존재의 의식{意識} 속에서 신성{神性}을 체험하는 것이며; 시간세계에서 영원한 실체들을 맛보는 참된 체험, 즉 아직 육체 속에 있는 동안에 영적 만족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101:1.2 사고 조율사는, 자신을_표현할 통로가 될 특별한 장치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종교적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표현할 수 있는 신비스런 종교 기능도 없다. 필사 정신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장치를 통해서 이 체험을 겪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조율사가 변함없이 내주하고 있는 물질 정신과 직접 통신{通信}하려고 시도할 때 왜 어려움을 겪는지, 한 가지 설명이 있다.
101:1.3 신성한 영은, 느낌이나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장 높고 최고로 영성화된 사고 영역에서, 필사적 사람과 접촉한다. 너희를 하나님께로인도하는 것은, 너희의 느낌이 아니라, 너희의 사고다. 정신의 눈만으로 이 신성한 본성을 감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식별하고, 내주하는 조율사의 음성을 듣는 정신은, 순결한 정신이다.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주{主}를 볼 수 없다.” 그런 모든 내적이고 영적인 친교를 영적 통찰력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진화하는 아들들의 관념, 이상, 통찰력, 및 영적 분투 한가운데서, 그리고 이것들에 의거하여 조율사와 진리의 영이 역할을 하는 동안, 이 둘의 합동 작용이 사람의 정신에 주는 감명{感銘}으로부터, 그런 종교 체험이 생긴다.
101:1.4 그래서 종교는, 시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나 통찰력으로 존속하고 번창한다. 이것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독특한 체험을 습득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인류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에서 새롭고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 가장 높은 종교 체험은, 믿음과 전통과 권세에 속하는 예전 행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종교는, 숭고한 느낌과 순전히 신비스런 감정의 소산물도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 정신에 내주하는 영의 영향과 영적으로 친교하는 심원{深遠}하고 실제적인 체험이며, 그런 체험이 심리학 용어로 정의 내릴 수 있는 한, 종교는 다만, 순전히 개인적인 그런 체험의 실체로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실체를 맛보는 체험에 불과하다.
101:1.5 종교는 물질적 우주론을 합리적으로 고찰한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종교는 사람의 정신_체험에서 기원되는, 전적으로 이성적인 통찰력의 창조물이다. 종교는 신비적 명상으로 잉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격리되어 묵상함으로 잉태되지도 않으나, 늘 다소 신비스러우며, 순전히 지적인 이성과 철학적 논리 형식으로 항상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참된 종교의 싹은, 사람의 도덕 의식{意識}의 영역에서 기원되며, 사람의 영적 통찰력, 즉 하나님을_갈망하는 필사 정신 속에서, 하나님을_드러내는 사고 조율사가 현존한 결과로 발생되는, 인간 인격의 그 기능이 성장함에 따라서 드러난다.
101:1.6 신앙은 도덕적 통찰력과 가치기준의 양심적인 판별력을 결합하고, 선재{先在}하던 진화적 의무 감각이 참된 종교 계통을 완성시킨다. 종교 체험은 결과적으로, 어떤 하나님 의식 그리고 믿는 인격체가 생존한다는, 의심할 여지없는 확신을 초래한다.
101:1.5 종교는 물질적 우주론을 합리적으로 고찰한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종교는 사람의 정신_체험에서 기원되는, 전적으로 이성적인 통찰력의 창조물이다. 종교는 신비적 명상으로 잉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격리되어 묵상함으로 잉태되지도 않으나, 늘 다소 신비스러우며, 순전히 지적인 이성과 철학적 논리 형식으로 항상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참된 종교의 싹은, 사람의 도덕 의식{意識}의 영역에서 기원되며, 사람의 영적 통찰력, 즉 하나님을_갈망하는 필사 정신 속에서, 하나님을_드러내는 사고 조율사가 현존한 결과로 발생되는, 인간 인격의 그 기능이 성장함에 따라서 드러난다.
101:1.6 신앙은 도덕적 통찰력과 가치기준의 양심적인 판별력을 결합하고, 선재{先在}하던 진화적 의무 감각이 참된 종교 계통을 완성시킨다. 종교 체험은 결과적으로, 어떤 하나님 의식 그리고 믿는 인격체가 생존한다는, 의심할 여지없는 확신을 초래한다.
101:1.7 그리하여, 종교적 열망과 영적 충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그런 본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그런 본성과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는 확신으로 몹시 감동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가 밝혀준 결과로 말미암은 진화적 의무 및 책임 감각이 사람의 도덕적 본성에 아주 깊은 인상을 줌으로써,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될 권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바로 그 정신의 위치와 바로 그 혼의 태도에 마침내 도달한다.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그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혼속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심원한
존재--곧 신성한 조율사--에게 충실하지 않음을 입증할 것이라고, 그런 계몽되고 훈련받은 개인들의 철학을 뛰어넘는 더 높은 지혜가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가르쳐준다.
2. 종교의 실상
101:2.1 종교의 실상은, 이성적이고 평범한 인간의 종교 체험으로 온전히 이뤄진다. 그리고 오직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과학적인 것이라고, 또는 심지어 심리적인 것이라고, 언제든지 간주할 수 있다. 계시가 계시임을 증명하는 것은, 인간이 체험하는 바로 이 사실이다: 외견상 서로 갈라지는 자연 과학, 그리고 종교에 관한 신학, 이 두 가지를 일관되고 논리적인 하나의 우주 철학이 되도록, 즉 일치되고 완전한 해석이 되도록 계시가 과학과 종교를 합성함에 따라서, 정신을 조화시키고 영을 만족시키는데, 물질 속에서, 정신들과 함께, 그리고 영에게, 무한자가 자신의 뜻과 계획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 몹시 알고 싶어 하는 필사 정신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하여, 이런 해석이 인간 체험 속에서 대답한다.
101:2.2 이성은 과학의 방법이며; 신앙은 종교의 방법이며; 논리는 철학이 시도하는 기법이다. 정신이 중재하여 물질과 영의 실체와 관계를 납득함에 통일을 이루는 기법을 제공함으로써, 계시는 모론시아 관점의 부재{不在}를 보정한다. 그리고 참된 계시는 결코, 과학을 사악한 것으로, 종교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또는 철학을 비논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101:2.3 이성은 과학의 연구를 통해 자연을 거꾸로 추적하여 최초 원인에 이를 수 있으나, 과학의 최초 원인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바꾸는 데는 종교적 신앙이 요구되며; 그런 신앙, 그런 영적 통찰력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계시가 추가로 요구된다.
101:2.4 인간의 생존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는 두 가지 기본 이유가 있다:
101:2.5 1. 인간의 체험, 개인의 확신, 내주하는 사고 조율사가 시작하여 어떻게든지 마음 속에 새긴 희망과 신뢰감.
101:2.6 2. 진리의 영이 몸소 직접 섬김으로 인한, 신의 아들들이 이 세상에 증여됨으로 말미암은, 또는 기록된 말씀의 계시를 통하여 진리가 계시됨.
101:2.7 과학은 최초 원인을 가정함으로써 그 논리와_탐색을 끝낸다. 종교는 구원의 하나님을 확신하기 전에는 신앙으로 날아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과학의 식별력 있는 연구는, 절대자의 실체와 실존을 논리적으로 제시한다. 종교는, 인격을 생존시키는 하나님이 실존하시고 실체이심을 거리낌 없이 믿는다. 형이상학이 완전히 실행하지 못한 것, 그리고 심지어 철학마저 부분적으로 하지 못한 것을 계시가 해주는데; 다시 말해서, 과학에서 이 최초 원인과 종교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은 아주 동일한 신격임을 확언한다.
101:2.8 이성은 과학을 증명하고, 신앙은 종교를 증명하고, 논리는 철학을 증명하지만, 계시는 오직 인간의 체험으로만 확인된다. 과학은 지식을 낳으며; 종교는 행복을 가져오며; 철학은 통일을 이룩하며; 우주 실체에 이르는 이 삼자일체 접근법이 체험으로 조화되는 것을 계시가 확인한다.
101:2.9 자연을 숙고하는 것은, 자연의 하나님, 즉 그 운행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은 오직 물질과 운행과 생기를--곧 생명을-- 드러낸다. 물질과 에너지의 결합은, 어떤 조건 아래서 살아있는 형태를 겉으로 나타내는데, 그러나 자연의 생명이 현상으로는 그렇게 비교적 연속적이지만, 개체에게는 아주 일시적이다. 자연은, 인간_인격의 생존을 논리적으로 믿을만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혼 속에서, 처음부터 바로 이 인격적 하나님을 이미 발견했다.
101:2.10 신앙이 혼 속에 하나님을 드러낸다. 계시는, 진화 세계에서 모론시아 통찰력의 대용품이며, 신앙이 사람의 혼 속에 나타내는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람이 자연에서도 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계시는, 물질계와 영계 사이, 심지어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 즉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큰 간격에 다리를 놓는 데 성공한다.
101:2.11 자연을 숙고하는 것이, 지성적 안내와 심지어 생생한 통제 방향을 논리적으로 지시하지만, 어떤 만족스런 방법으로도,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자연은,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우주를 간주하지 못하도록 막을만한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는 없지만,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그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연구는 우주에 대한 더 높고 더 영적인 해석과 전적으로 양립한다.
101:2.12 계시는, 획기적인 현상으로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며; 개인적인 인간 체험으로서는 연속으로 일어난다. 필사자의 인격 안에서, 아버지의 조율사 선물로서, 아들의 진리의 영으로서, 그리고 우주적 영의 거룩한 영으로서 신성{神性}이 작용하며, 한편 이런 세 가지 초인적 재능은 인간의 체험적 진화 속에서 지존자의 섬김으로서 통합된다.
101:2.13 참 종교는, 실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고, 도덕 의식이 낳은 신앙_산물이며, 독단적 교리로 이뤄진 어떤 기관에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참 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영 자신이 우리 영에게 증거하는” 체험으로 이뤄진다. 종교는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영적 통찰력과 혼의 숭고한 신뢰에 있다.
101:2.14 너의 가장 깊은 본성이--곧 신성한 조율사가-- 네 속에 의{義}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 즉 신성한 완전성을 향한 어떤 갈망을 창출한다. 종교는, 신에게 도달하려는 이런 내적 충동을 인식하는 신앙의 행위이며; 구원받는 길, 즉 인격이 생존하고, 참되고 선하다고 네가 간주하게 된 모든 가치가 생존하는 기법이라고 네가 의식하게 되는, 그런 혼의 신뢰, 그런 확신이 이처럼 생긴다.
101:2.15 종교에 대한 깨달음은, 위대한 배움이나 현명한 논리에 따라서 이뤄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영적 통찰이며,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종교 교사 가운데 일부, 그리고 심지어 선지자까지도 때때로 세상의 지혜를 왜 그토록 적게 소유했는가에 대한 그 이유다. 종교적인 신앙은, 배운 자에게나 못 배운 자에게나 똑같이 유효하다.
101:2.16 종교는 언제든지 그 자체의 비평가와 재판관이 돼야하며; 외부에서는 이해하기는커녕, 전혀 관찰할 수도 없다.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너의 유일한 확신은, 영적인 것에 대한 너의 믿음과 체험에 관한 너 자신의 통찰력에 있다. 비슷한 체험을 이미 했던 어떤 동료에게든지, 하나님의 인격 또는 실체에 대하여 논의할 필요가 없으며, 한편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 확신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사람과 어떤 가능한 논쟁을 하더라도, 진정으로 설득할 수는 결코 없다.
101:2.17 심리학은 사회 환경에 대해서 종교가 반응하는 현상을 연구하려고 정말로 시도할 수는있겠지만, 종교의 작용과 실제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이르기까지 파고들기를 바랄 수는 결코 없다. 신앙의 영역이고 계시의 기법인 신학만이, 종교 체험의 본성과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지성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
101:2.17 심리학은 사회 환경에 대해서 종교가 반응하는 현상을 연구하려고 정말로 시도할 수는있겠지만, 종교의 작용과 실제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이르기까지 파고들기를 바랄 수는 결코 없다. 신앙의 영역이고 계시의 기법인 신학만이, 종교 체험의 본성과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지성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
3. 종교의 특질
101:3.1 종교는,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배움 없는 데서도 존속된다. 잘못된 우주론과 그릇된 철학으로 오염됐음에도, 종교는 여전히 살아있으며; 심지어 형이상학의 혼란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종교의 역사적 변천 내내, 그리고 그 변천을 통해서, 인간이 진보하고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것, 즉: 윤리적 양심과 도덕의식{意識}이 늘 존속한다.
101:3.2 신앙의_통찰, 즉 영적 직관{直觀}은, 사고 조율사와 관련된 시공우주 정신이 기증한 것인데, 이 조율사는 아버지가 사람에게 수여한 선물이다. 영적 이성, 즉 혼{魂}의 지성은 거룩한 영이 기증한 것인데, 창조적 영이 사람에게 수여한 선물이다. 영적 철학, 즉 영 실체들을 깨닫는 지혜는 진리의 영이 기증한 것인데, 이 진리의 영은 증여 아들이 사람의 자손에게 합동으로 수여한 선물이다. 그리고 이런 영{靈} 재능들을 조정하고 서로 연합시키는 것이, 사람을 잠재적 운명을 가진 영 인격체로 만든다.
101:3.3 원시적이고 미발달된 형태로 있는 바로 이 영 인격을 조율사가 점유하고 있는 것이, 육체가 자연사를 겪은 뒤에 생존한다. 생명 활동이 중단됨으로써 물질계와 영계의 그런 일시적 동반자 관계가 분리될 때, 영에서 기원된 이 혼합 실재는 인간의 체험과 결합하여, 신의 아들들이 마련한 생명의 길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로 이뤄진 물질 자아의 분해 이후에 (조율사의 보호를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101:3.4 사람의 혼은, 종교적 신앙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솟아나는 혼의 본성이 지닌 잠재적 신성을 나타내는데, 독자적 방식으로 지적이고 시험하는 어떤 견디기 어려운 사회 상황에 반응하도록, 그 신앙이 필사자 인격을 유도한다. 진정한 영적 신앙(곧 참된 도덕의식)은 다음과 같이 드러나는데, 그 신앙은:
101:3.5 1. 타고난 불리한 동물적 성향이 있음에도, 윤리와 도덕이 진보하도록 만든다.
101:3.6 2. 쓰라린 실망과 압도적 패배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탁월한 신뢰를 창출한다.
101:3.7 3. 자연의 역경과 물리적 재난에도, 강한 용기와 확신을 발생시킨다.
101:3.8 4. 어쩔 수 없는 질병과 심지어 격렬한 육체적 고난에도, 설명할 수 없는 평정과 지속적인 평온을 나타낸다.
101:3.9 5. 부당한 대우와 가장 지독한 불법 앞에서도, 인격의 신비로운 평정과 침착성을 유지시킨다.
101:3.10 6. 암담하게 닥치는 숙명이 잔인한 듯 보이고, 겉보기에 자연 세력이 인간의 복지에 전혀 냉담한 듯해도, 궁극에 승리하는 신에 대한 신뢰를 유지시킨다.
101:3.11 7. 모든 논리가 불리하게 논증함에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속시키고, 다른 모든 지적 궤변을 성공적으로 견뎌낸다.
101:3.12 8. 그릇된 과학의 현혹시키는 교훈과 불합리한 철학의 능란한 기만에 상관없이, 혼이 생존할 것이라는 담대한 신앙을 계속 나타낸다.
101:3.13 9. 현대의 복잡하고 편파적인 문명이 주는 압도적인 부담에 상관없이, 살아가고 승리한다.
101:3.14 10. 인간의 이기심, 사회적 적대감, 산업의 탐욕, 및 정치적 부적응에도, 이타주의{利他主義}가 계속 존속하도록 기여한다.
101:3.15 11. 악과 죄가 현존한다는 당혹스러움에 상관없이, 우주의 통일과 신성한 안내에 대한 숭고한 믿음을 확고히 신봉하게 한다.
101:3.16 12. 무슨 일이 있든지 아무 상관없이, 줄곧 하나님께 경배 드린다. “하나님이 나를 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담대히 선언한다.
101:3.17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신성한 영 또는 그의 속에 거주하는 영들을 갖고 있음을 세 가지 현상으로 아는데: 첫째, 개인의 체험--곧 종교적 신앙--으로; 둘째, --개인적 및 인종적-- 계시로; 셋째, 진짜 인간 실존의 실제 괴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앞에 상술한 열두 가지의 영{靈}다운 행적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사람의 물질 환경에 대한 그런 색다르고 부자연스런 반응을 놀랍게 표명하는 것으로 이를 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더 있다.
101:3.18 그리고 종교의 영역에서 신앙의 바로 그런 생생하고 활발한 행적이, 인간 본성 중에서 최고의 재능, 즉 종교 체험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그 체험이 영적 실체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필사적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한다.
4. 계시의 한계
101:4.1 기원{起源}에 대해서, 심지어 물리적 기원에 대해서도 너희 세계가 대개 무지하기 때문에, 때때로 우주론에 지침을 주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에 항상 말썽을 일으켰다. 계시의 법칙은, 노력 없이 얻은 지식, 즉 미성숙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 조항으로 우리를 크게 방해했다. 계시된 종교의 일부분으로서 제시된 우주론은, 모두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써먹지 못하게 돼있다. 따라서, 그런 계시를 공부하는 훗날의 연구자들은, 계시에 제시된 관련된 우주론이 외견상 잘못됐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 계시가 담고 있을지 모르는 참된 종교적 진리의 어떤 요소든지 다 폐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101:4.2 진리의 계시에 참여하는 우리가, 감독관들이 내리는 지시사항으로 엄격히 제한받고 있음을, 인류는 이해해야한다. 1,000년 동안에 이뤄질 과학의 발견을 앞지를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계시자들은, 계시 명령의 일부를 형성하는 지시사항에 따라서 행동해야한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며, 그것은 지금뿐 아니라 미래에도 항상 그럴 것이다. 이 일련의 계시 발표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종교의 진리는, 다가오는 시대의 기록에서 계속 유효하겠으나, 자연 과학에 관련된 우리의 진술 가운데 다수는,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발견과 부가적 과학 발달에 따라서 교정돼야 할 필요성에 봉착할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발전의 결과를 지금도 예견하지만, 인간적으로 발견되지 못한 그런 사실을 본 계시 기록에 포함시키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금지돼있다. 계시가 반드시 영감{靈感}받을 필요는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본 계시의 우주론은 영감 받은 것이 아니다. 이 우주론은, 현재의 지식을 조정하고 분류하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것으로 제한된다. 신성하거나 영적인 통찰력은 선물인 반면, 인간의 지혜는
진화해야한다.
101:4.3 진리는 언제나 하나의 계시인데: 내주하는 조율사가 활동한 결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자기계시이며; 획기적 시대의 계시는, 어떤 다른 천상{天上}의 매개체나 집단이나 인격체가 역할을 함으로 제시될 때다.
101:4.4 결국, 종교는 그 열매로, 즉 종교 자체에 본래부터 있는 신성한 탁월성을 나타내는 방법과 정도에 따라서 판단돼야한다.
101:4.5 계시가 변함없이 영적 현상일지라도, 진리는 다만 상대적으로 영감{靈感}받을지도 모른다. 우주론과 관련된 설명은 결코 영감 받지 않았으나, 그런 계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적어도 일시나마 지식을 뚜렷이 설명하므로, 굉장한 가치가 있다:
101:4.6 1. 권위 있게 오류를 없앰으로써 혼돈을 줄임.
101:4.7 2. 이미 알려졌거나 곧_알려지게_돼_있는 사실과 관찰결과를 조정함.
101:4.8 3. 먼 과거에 있었던 획기적 진행사항들과 관련된, 잃어버린 지식의 중요한 조각들을 복구함.
101:4.9 4. 다른 방법으로 획득한 지식에서 분실된, 지극히 중대한 공백을 채우게 될 정보를 제공함.
101:4.10 5. 수반하는 계시 속에 담긴 영적 교훈을 밝히는 그런 방법으로 시공우주 자료를 제시함.
101:5.1 영이 획득하는 진리 중에서 진화적 오류를 분류하고 가려내는 필수 작업을 할 때, 계시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절약하는 기법이다.
101:5.2 과학은 사실을 취급하며; 종교는 오직 가치기준에만 관심을 쏟는다. 정신은, 계몽된 철학을 통해서 사실과 가치기준, 이 두 의미를 통합시키려 애쓰고, 이렇게 하여 완성된 실체 개념에 도달한다. 과학은 지식의 영역이고, 철학은 지혜의 영역이고, 종교는 신앙 체험의 분야임을 기억해라. 그럼에도 종교는 다음과 같은 두 국면에서 형태화된다:
101:5.3 1. 진화 종교. 원시적 경배 체험, 즉 정신에서 파생된 종교.
101:5.4 2. 계시된 종교. 영에서 파생된, 우주에 대한 태도; 영원한 실체들이 보존되고, 인격이 생존하고, 궁극에 시공우주 신격에 도달하고, 그 신격의 목적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음을 확신하고 믿는 것. 조만간에 진화 종교가 영적으로 확장된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예정된 것은, 우주 계획의 일부분이다.
101:5.5 과학과 종교 둘 다, 논리적 추론을 위해 일반적으로 용인된 어떤 기초를 가정{假定}하면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철학 역시, 다음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하고 그 경력을 시작해야한다:
101:5.6 1. 물질적인 몸.
101:5.7 2. 혼 또는 심지어 내주하는 영까지 포함하는, 인간의 초물질 국면.
101:5.8 3. 인간의 정신, 즉 영과 물질 사이에, 물질계와 영계 사이에, 서로 교통하고 서로 상관하는 장치.
101:5.9 과학자는 사실을 모아서 정리하고, 철학자는 관념들을 조화시키며, 한편 선지자는 이상{理想}을 높인다. 느낌과 감정은, 종교의 변함없는 부수물이지만,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체험에 대한 느낌일지 모르지만, 느끼는 체험이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본질적으로는, 논리(곧 합리화)뿐 아니라 감정(곧 느낌)도 종교 체험의 일부분이 아니지만, 개인 정신 상태와 기질의 성향에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실체를 꿰뚫는 영적 통찰력을 촉진하는 신앙 연습과 다양하게 관련될지도 모른다.
101:5.10 진화 종교는, 진화하는 사람 안에서 경배하는 버릇을 만들고 육성하는 일을 맡은, 지방우주 정신 보조체가 부여한 재능이 성취한 것이다. 그런 원시 종교는 윤리와 도덕, 즉 인간의 의무 감각에 직접 관련된다. 그런 종교는 양심의 보증에 입각하며, 비교적 윤리가 있는 문명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101:5.11 개인적으로 계시된 종교는, 낙원 삼위일체의 세 인격체를 대표하는 증여 영들의 후원을 받으며, 특히 진리의 확장에 관여한다. 진화 종교는 개인이 개인의 의무 관념을 알아듣도록 만들며; 계시된 종교는 사랑하기를, 즉 황금률을 더욱 강조한다.
101:5.12 진화된 종교는 전적으로 신앙에 의존한다. 계시는, 신성과 실체에 관해 확장된 진리가 제시된다는 추가된 보장을 받고, 실제 체험이라는 훨씬 가치 있는 증거를 갖고 있으며, 이 체험은, 진화로 얻은 신앙과, 계시에 속하는 진리, 이 두 가지가 실무에서 실용적으로 합동한 결과로서 누적된다. 인간의 신앙과 신성한 진리의 그런 실무 합동이, 모론시아 인격을 실제로 획득하러 가는 길에서 바람직한 성품을 점유하게 한다.
101:5.13 진화 종교는 신앙을 확신시키고 양심을 확증시켜줄 뿐이며; 계시 종교는 신앙의 확신뿐 아니라 계시된 실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진리를 제공한다. 종교에서 셋째 단계, 즉 종교 체험에서 셋째 국면은, 모론시아 상태와 상관이 있으며, 이것은 모타를 더 확고히 붙잡는 것이다. 모론시아 진보에서는, 계시된 종교의 진리가 점점 더 확장되며; 너희는, 최상의 가치기준, 신성한 선함, 보편적 관계, 영원한 실체, 및 궁극의 운명에 대한 진리를 점점 더 알게 될 것이다.
101:5.14 모론시아 진보 전반에 걸쳐서, 진리의 확신이 신앙의 확신을 점차 대체시킬 것이다. 너희가 마침내 실제 영 세계 속으로 부름 받게 되면, 순수한 영 통찰력이 주는 확신은, 신앙과 진리 대신 작용하거나, 또는 도리어 인격체가 확신하는 그전에 있었던 이런 기법과 더불어, 그리고 그 위에 덧붙여서 작용할 것이다.
101:6.1 계시된 종교의 모론시아 국면은 생존 체험과 상관이 있으며, 그 국면의 큰 욕구는, 영이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또한 더욱 윤리적으로 봉사하도록 재촉하는 부름과 관련하여, 더 강한 경배 욕구도 있다. 모론시아 통찰력은, 칠중존재, 지존자, 그리고 심지어 궁극자에 대한 늘_확장하는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101:6.2 맨 처음에 물질 수준에서 시작할 때부터, 온전한 영 상태를 달성할 때까지, 모든 종교 체험 전반에 걸쳐서, 조율사는 지존자가 실존하는 실체임을 개인적으로 깨닫는 비결이며; 바로 이 조율사는 또한 너희 신앙이 초월적으로 궁극자에게 도달하는 비결도 확보하고 있다. 진화하는 사람의 체험적 인격은, 실존적인 하나님의 조율사 본질과 하나가 되어, 최상의 실존을 완성할 잠재력이며, 이것은 선천적으로, 선험적{先驗的}인 인격이 초월유한{超越有限} 결말에 이르기 위한 기초다.
101:6.3 도덕적 의지는, 사리에 맞는 지식에 기초하고, 지혜로 인해 증대되고, 종교적 신앙이 인정한 결정을 포함한다. 그런 선택은 도덕적 본성의 행동이고 도덕적 인격이 실존한다는 증거인데, 도덕적 인격은 모론시아 인격의 선구자이고, 결국에는 참된 영 신분의 선구자다.
101:6.4 진화로 얻는 유형의 지식은, 원형질 기억 물질이 축적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피조물의 의식{意識} 가운데 가장 원시적인 형태다. 지혜는, 연합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원형질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포함하며, 그런 현상은 인간의 정신을 단순한 동물 정신과 구분시킨다. 동물도 지식이 있으나, 지혜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만이 소유한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영, 즉 사고 조율사와 진리의 영을 그런 정신에게 수여함으로써, 지혜를_부여받은 개인이 진리를 이용할 수 있다.
101:6.5 유란시아에 증여됐을 때, 그리스도 미가엘은 세례 받을 때까지 진화 종교의 영향 아래서 살았다. 그때부터 십자가형 사건이 끝나기까지, 그는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의 혼합된 안내에 따라서 일을 진행해갔다. 그가 부활한 그날 아침부터 승천이 있을 때까지는, 물질 세계로부터 영 세계까지, 필사 과도기에 해당하는 모론시아 생애의 여러 단계를 지나갔다. 미가엘은 승천한 후에, 지존성 체험, 즉 지존자를 체득함에 정통한 존재가 됐고; 네바돈에서 지존자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는 무제한의 수용력을 소유한 유일한 인격자가 됐기 때문에, 자신의 지방우주에서, 그리고 그 우주에 대하여, 최상의 주권을 가진 지위를 즉시 달성했다.
101:6.6 사람이었으나 궁극에 융합하고 그 결과로 생긴 내주하는 조율사와 하나됨--곧 사람과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이 합성함--은, 잠재적으로는 그를 지존자의 살아있는 한 부분이 되게 했고, 그런 한때 필사 존재로 하여금 지존자를 위하여, 그리고 지존자와 함께, 우주 봉사의 궁극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영원한 장자상속권을 확립하게 했다.
101:6.7 계시는 필사적 사람에게 이렇게 가르치는데, 시간 진행이라는 수단으로 공간을 거치는 그런 장엄하고도 흥미로운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을 관념과_결정으로 체계화해야하며; 그다음에 사람은, 냉정한 여러 관념을, 심지어 관념으로서 대단히 이치에 맞고, 이상으로서 무척 논리적인 그런 개념들까지 포함하여, 점점 더 실용적이지만 그럼에도 숭고한 이상으로 변화시키는 고귀한 과제에 끊임없이 지혜를 이용하라고 명령해야하며, 그리하여 조율사가 그 개념들을 감히 혼합하고 영화{靈化}시켜서, 아들들의 진리 영이 행동하기 위하여 이처럼 준비된, 실제 인간의 보충물이 되도록 이 개념들을 유한한 정신 속에서 그런 연합에 소용되게 만드는데, 이 진리 영은, 시_공간에 현시되는 낙원 진리--곧 보편적 진리--의 표현이다. 관념_결정과 논리적 이상과 신성한 진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의로운 성품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것은, 모론시아 세계들의 계속_확장하고 점점 더 영적인 실체에, 필사자가 친숙해지는 데 필수 조건이다.
101:6.8 예수의 교훈은, 조화롭게 조정된 지식, 지혜, 신앙, 진리, 및 사랑을 아주 넘치게 담고 있어서, 현세의 평안, 지적 확신, 도덕적 계몽, 철학적 안정성, 윤리적 민감성, 하나님_의식, 그리고 개인의 생존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완벽하게 동시에 제공하는, 첫 유란시아 종교를 설립했다. 예수의 신앙은, 인간 구원의 완결성, 즉 필사자가 우주에서 달성하는 궁극점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줬는데, 다음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101:6.9 1.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신분임을 개인적으로 깨달음으로써, 물질의 족쇄로부터 구원됨.
101:6.10 2. 지적 속박으로부터 구원됨: 사람이 진리를 알면, 진리가 그를 자유하게 함.
101:6.11 3. 영적 무지로부터 구원됨, 즉 필사 존재들의 우애{友愛}를 인간이 깨닫고, 모든 우주 피조물이 형제관계인 것을 모론시아적으로 자각함; 영적 실체를 봉사함으로_발견하고, 영 가치기준이 선함을 섬김으로_드러냄.
101:6.12 4. 우주의 여러 영 수준을 달성함으로, 그리고 하보나의 조화와 낙원의 완전성을 결국 깨달음으로, 자아의 미완성으로부터 구원됨.
101:6.13 5. 자아로부터의 구원, 즉 지존자 정신의 시공우주 수준에 도달하고, 자아를_의식하는 다른 모든 존재의 달성에 어울리게 됨으로써, 자아_의식의 한계로부터 해방됨.
101:4.3 진리는 언제나 하나의 계시인데: 내주하는 조율사가 활동한 결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자기계시이며; 획기적 시대의 계시는, 어떤 다른 천상{天上}의 매개체나 집단이나 인격체가 역할을 함으로 제시될 때다.
101:4.4 결국, 종교는 그 열매로, 즉 종교 자체에 본래부터 있는 신성한 탁월성을 나타내는 방법과 정도에 따라서 판단돼야한다.
101:4.5 계시가 변함없이 영적 현상일지라도, 진리는 다만 상대적으로 영감{靈感}받을지도 모른다. 우주론과 관련된 설명은 결코 영감 받지 않았으나, 그런 계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적어도 일시나마 지식을 뚜렷이 설명하므로, 굉장한 가치가 있다:
101:4.6 1. 권위 있게 오류를 없앰으로써 혼돈을 줄임.
101:4.7 2. 이미 알려졌거나 곧_알려지게_돼_있는 사실과 관찰결과를 조정함.
101:4.8 3. 먼 과거에 있었던 획기적 진행사항들과 관련된, 잃어버린 지식의 중요한 조각들을 복구함.
101:4.9 4. 다른 방법으로 획득한 지식에서 분실된, 지극히 중대한 공백을 채우게 될 정보를 제공함.
101:4.10 5. 수반하는 계시 속에 담긴 영적 교훈을 밝히는 그런 방법으로 시공우주 자료를 제시함.
5. 계시로 확대된 종교
101:5.1 영이 획득하는 진리 중에서 진화적 오류를 분류하고 가려내는 필수 작업을 할 때, 계시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절약하는 기법이다.
101:5.2 과학은 사실을 취급하며; 종교는 오직 가치기준에만 관심을 쏟는다. 정신은, 계몽된 철학을 통해서 사실과 가치기준, 이 두 의미를 통합시키려 애쓰고, 이렇게 하여 완성된 실체 개념에 도달한다. 과학은 지식의 영역이고, 철학은 지혜의 영역이고, 종교는 신앙 체험의 분야임을 기억해라. 그럼에도 종교는 다음과 같은 두 국면에서 형태화된다:
101:5.3 1. 진화 종교. 원시적 경배 체험, 즉 정신에서 파생된 종교.
101:5.4 2. 계시된 종교. 영에서 파생된, 우주에 대한 태도; 영원한 실체들이 보존되고, 인격이 생존하고, 궁극에 시공우주 신격에 도달하고, 그 신격의 목적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음을 확신하고 믿는 것. 조만간에 진화 종교가 영적으로 확장된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예정된 것은, 우주 계획의 일부분이다.
101:5.5 과학과 종교 둘 다, 논리적 추론을 위해 일반적으로 용인된 어떤 기초를 가정{假定}하면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철학 역시, 다음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하고 그 경력을 시작해야한다:
101:5.6 1. 물질적인 몸.
101:5.7 2. 혼 또는 심지어 내주하는 영까지 포함하는, 인간의 초물질 국면.
101:5.8 3. 인간의 정신, 즉 영과 물질 사이에, 물질계와 영계 사이에, 서로 교통하고 서로 상관하는 장치.
101:5.9 과학자는 사실을 모아서 정리하고, 철학자는 관념들을 조화시키며, 한편 선지자는 이상{理想}을 높인다. 느낌과 감정은, 종교의 변함없는 부수물이지만,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체험에 대한 느낌일지 모르지만, 느끼는 체험이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본질적으로는, 논리(곧 합리화)뿐 아니라 감정(곧 느낌)도 종교 체험의 일부분이 아니지만, 개인 정신 상태와 기질의 성향에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실체를 꿰뚫는 영적 통찰력을 촉진하는 신앙 연습과 다양하게 관련될지도 모른다.
101:5.10 진화 종교는, 진화하는 사람 안에서 경배하는 버릇을 만들고 육성하는 일을 맡은, 지방우주 정신 보조체가 부여한 재능이 성취한 것이다. 그런 원시 종교는 윤리와 도덕, 즉 인간의 의무 감각에 직접 관련된다. 그런 종교는 양심의 보증에 입각하며, 비교적 윤리가 있는 문명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101:5.11 개인적으로 계시된 종교는, 낙원 삼위일체의 세 인격체를 대표하는 증여 영들의 후원을 받으며, 특히 진리의 확장에 관여한다. 진화 종교는 개인이 개인의 의무 관념을 알아듣도록 만들며; 계시된 종교는 사랑하기를, 즉 황금률을 더욱 강조한다.
101:5.12 진화된 종교는 전적으로 신앙에 의존한다. 계시는, 신성과 실체에 관해 확장된 진리가 제시된다는 추가된 보장을 받고, 실제 체험이라는 훨씬 가치 있는 증거를 갖고 있으며, 이 체험은, 진화로 얻은 신앙과, 계시에 속하는 진리, 이 두 가지가 실무에서 실용적으로 합동한 결과로서 누적된다. 인간의 신앙과 신성한 진리의 그런 실무 합동이, 모론시아 인격을 실제로 획득하러 가는 길에서 바람직한 성품을 점유하게 한다.
101:5.13 진화 종교는 신앙을 확신시키고 양심을 확증시켜줄 뿐이며; 계시 종교는 신앙의 확신뿐 아니라 계시된 실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진리를 제공한다. 종교에서 셋째 단계, 즉 종교 체험에서 셋째 국면은, 모론시아 상태와 상관이 있으며, 이것은 모타를 더 확고히 붙잡는 것이다. 모론시아 진보에서는, 계시된 종교의 진리가 점점 더 확장되며; 너희는, 최상의 가치기준, 신성한 선함, 보편적 관계, 영원한 실체, 및 궁극의 운명에 대한 진리를 점점 더 알게 될 것이다.
101:5.14 모론시아 진보 전반에 걸쳐서, 진리의 확신이 신앙의 확신을 점차 대체시킬 것이다. 너희가 마침내 실제 영 세계 속으로 부름 받게 되면, 순수한 영 통찰력이 주는 확신은, 신앙과 진리 대신 작용하거나, 또는 도리어 인격체가 확신하는 그전에 있었던 이런 기법과 더불어, 그리고 그 위에 덧붙여서 작용할 것이다.
6. 점진적 종교 체험
101:6.1 계시된 종교의 모론시아 국면은 생존 체험과 상관이 있으며, 그 국면의 큰 욕구는, 영이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또한 더욱 윤리적으로 봉사하도록 재촉하는 부름과 관련하여, 더 강한 경배 욕구도 있다. 모론시아 통찰력은, 칠중존재, 지존자, 그리고 심지어 궁극자에 대한 늘_확장하는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101:6.2 맨 처음에 물질 수준에서 시작할 때부터, 온전한 영 상태를 달성할 때까지, 모든 종교 체험 전반에 걸쳐서, 조율사는 지존자가 실존하는 실체임을 개인적으로 깨닫는 비결이며; 바로 이 조율사는 또한 너희 신앙이 초월적으로 궁극자에게 도달하는 비결도 확보하고 있다. 진화하는 사람의 체험적 인격은, 실존적인 하나님의 조율사 본질과 하나가 되어, 최상의 실존을 완성할 잠재력이며, 이것은 선천적으로, 선험적{先驗的}인 인격이 초월유한{超越有限} 결말에 이르기 위한 기초다.
101:6.3 도덕적 의지는, 사리에 맞는 지식에 기초하고, 지혜로 인해 증대되고, 종교적 신앙이 인정한 결정을 포함한다. 그런 선택은 도덕적 본성의 행동이고 도덕적 인격이 실존한다는 증거인데, 도덕적 인격은 모론시아 인격의 선구자이고, 결국에는 참된 영 신분의 선구자다.
101:6.4 진화로 얻는 유형의 지식은, 원형질 기억 물질이 축적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피조물의 의식{意識} 가운데 가장 원시적인 형태다. 지혜는, 연합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원형질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포함하며, 그런 현상은 인간의 정신을 단순한 동물 정신과 구분시킨다. 동물도 지식이 있으나, 지혜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만이 소유한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영, 즉 사고 조율사와 진리의 영을 그런 정신에게 수여함으로써, 지혜를_부여받은 개인이 진리를 이용할 수 있다.
101:6.5 유란시아에 증여됐을 때, 그리스도 미가엘은 세례 받을 때까지 진화 종교의 영향 아래서 살았다. 그때부터 십자가형 사건이 끝나기까지, 그는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의 혼합된 안내에 따라서 일을 진행해갔다. 그가 부활한 그날 아침부터 승천이 있을 때까지는, 물질 세계로부터 영 세계까지, 필사 과도기에 해당하는 모론시아 생애의 여러 단계를 지나갔다. 미가엘은 승천한 후에, 지존성 체험, 즉 지존자를 체득함에 정통한 존재가 됐고; 네바돈에서 지존자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는 무제한의 수용력을 소유한 유일한 인격자가 됐기 때문에, 자신의 지방우주에서, 그리고 그 우주에 대하여, 최상의 주권을 가진 지위를 즉시 달성했다.
101:6.6 사람이었으나 궁극에 융합하고 그 결과로 생긴 내주하는 조율사와 하나됨--곧 사람과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이 합성함--은, 잠재적으로는 그를 지존자의 살아있는 한 부분이 되게 했고, 그런 한때 필사 존재로 하여금 지존자를 위하여, 그리고 지존자와 함께, 우주 봉사의 궁극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영원한 장자상속권을 확립하게 했다.
101:6.7 계시는 필사적 사람에게 이렇게 가르치는데, 시간 진행이라는 수단으로 공간을 거치는 그런 장엄하고도 흥미로운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을 관념과_결정으로 체계화해야하며; 그다음에 사람은, 냉정한 여러 관념을, 심지어 관념으로서 대단히 이치에 맞고, 이상으로서 무척 논리적인 그런 개념들까지 포함하여, 점점 더 실용적이지만 그럼에도 숭고한 이상으로 변화시키는 고귀한 과제에 끊임없이 지혜를 이용하라고 명령해야하며, 그리하여 조율사가 그 개념들을 감히 혼합하고 영화{靈化}시켜서, 아들들의 진리 영이 행동하기 위하여 이처럼 준비된, 실제 인간의 보충물이 되도록 이 개념들을 유한한 정신 속에서 그런 연합에 소용되게 만드는데, 이 진리 영은, 시_공간에 현시되는 낙원 진리--곧 보편적 진리--의 표현이다. 관념_결정과 논리적 이상과 신성한 진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의로운 성품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것은, 모론시아 세계들의 계속_확장하고 점점 더 영적인 실체에, 필사자가 친숙해지는 데 필수 조건이다.
101:6.8 예수의 교훈은, 조화롭게 조정된 지식, 지혜, 신앙, 진리, 및 사랑을 아주 넘치게 담고 있어서, 현세의 평안, 지적 확신, 도덕적 계몽, 철학적 안정성, 윤리적 민감성, 하나님_의식, 그리고 개인의 생존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완벽하게 동시에 제공하는, 첫 유란시아 종교를 설립했다. 예수의 신앙은, 인간 구원의 완결성, 즉 필사자가 우주에서 달성하는 궁극점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줬는데, 다음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101:6.9 1.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신분임을 개인적으로 깨달음으로써, 물질의 족쇄로부터 구원됨.
101:6.10 2. 지적 속박으로부터 구원됨: 사람이 진리를 알면, 진리가 그를 자유하게 함.
101:6.11 3. 영적 무지로부터 구원됨, 즉 필사 존재들의 우애{友愛}를 인간이 깨닫고, 모든 우주 피조물이 형제관계인 것을 모론시아적으로 자각함; 영적 실체를 봉사함으로_발견하고, 영 가치기준이 선함을 섬김으로_드러냄.
101:6.12 4. 우주의 여러 영 수준을 달성함으로, 그리고 하보나의 조화와 낙원의 완전성을 결국 깨달음으로, 자아의 미완성으로부터 구원됨.
101:6.13 5. 자아로부터의 구원, 즉 지존자 정신의 시공우주 수준에 도달하고, 자아를_의식하는 다른 모든 존재의 달성에 어울리게 됨으로써, 자아_의식의 한계로부터 해방됨.
101:6.14 6. 시간으로부터의 구원, 즉 하나님을_인식하고 하나님을_섬기면서 끊임없이 진보하는 영원한 생명을 성취함.
101:6.15 7. 유한으로부터의 구원, 즉 지존자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신격과 완전한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함으로 피조물은 유한절대의 완결성취자_이후 수준에서 초월적으로 궁극자를 발견하려고 애씀.
101:6.16 일곱 가지로 구성된 그런 구원은, 만유의 아버지에 대한 궁극적 체험의 실현을 완료하고 완성하는 것에 상당한다. 가능성 면에서,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종교 체험에서 신앙의 실체에 담겨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의 신앙이, 심지어 근본원리를 초월하는 실체들로부터 자양분을 받았고, 그 실체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며; 예수의 신앙은,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시공우주에서 겉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주의 절대 상태에 접근했다.
101:6.17 필사적 사람은, 예수의 신앙을 사유{私有}함으로써, 시간세계에서 영원성 실체들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종국{終局}의 아버지를 발견했으며, 아버지를 발견하는 바로 이 체험을 따라서, 육체 속에서 필사 인생을 사는 형제들이 자신을 좇아올 수 있게 했다. 예수께서 당시에 그랬듯이, 그들도 자신의 현재 상태 그대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이 체험에서 똑같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미가엘의 마지막 증여 결과로 새로운 여러 가능성이 네바돈 우주에서 실현됐고, 이것들 가운데 하나는, 만유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영원성의 길을 새롭게 비추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공간의 여러 행성에서 사는 첫 생애에서, 심지어 물질적인 살과 피로 구성된 필사자도 거쳐 갈 수 있는 길이다. 예수는 신성한 유산을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새 생명의 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그 유산은 요청만 하면 사람의 것이 되리라고 아버지께서 선포하셨다. 인류가 겪는, 심지어 성스러운 인류가 겪는 신앙 체험의 시작과 끝이, 예수 안에서 풍성하게 드러난다.
101:6.15 7. 유한으로부터의 구원, 즉 지존자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신격과 완전한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함으로 피조물은 유한절대의 완결성취자_이후 수준에서 초월적으로 궁극자를 발견하려고 애씀.
101:6.16 일곱 가지로 구성된 그런 구원은, 만유의 아버지에 대한 궁극적 체험의 실현을 완료하고 완성하는 것에 상당한다. 가능성 면에서,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종교 체험에서 신앙의 실체에 담겨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의 신앙이, 심지어 근본원리를 초월하는 실체들로부터 자양분을 받았고, 그 실체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며; 예수의 신앙은,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시공우주에서 겉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주의 절대 상태에 접근했다.
101:6.17 필사적 사람은, 예수의 신앙을 사유{私有}함으로써, 시간세계에서 영원성 실체들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종국{終局}의 아버지를 발견했으며, 아버지를 발견하는 바로 이 체험을 따라서, 육체 속에서 필사 인생을 사는 형제들이 자신을 좇아올 수 있게 했다. 예수께서 당시에 그랬듯이, 그들도 자신의 현재 상태 그대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이 체험에서 똑같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미가엘의 마지막 증여 결과로 새로운 여러 가능성이 네바돈 우주에서 실현됐고, 이것들 가운데 하나는, 만유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영원성의 길을 새롭게 비추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공간의 여러 행성에서 사는 첫 생애에서, 심지어 물질적인 살과 피로 구성된 필사자도 거쳐 갈 수 있는 길이다. 예수는 신성한 유산을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새 생명의 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그 유산은 요청만 하면 사람의 것이 되리라고 아버지께서 선포하셨다. 인류가 겪는, 심지어 성스러운 인류가 겪는 신앙 체험의 시작과 끝이, 예수 안에서 풍성하게 드러난다.
7. 종교에 관한 개인의 철학
101:7.2 종교에 관한 철학은, 관념과 실험적 생활이 모두 동역자들을 흉내 내려는 경향에 따라서 변경되는 바와 같이, 이 두 가지의 기본적 성장으로부터 진화한다. 철학적 결론의 건전성은, 목적에 대한 민감성과 평가의 정확성, 그리고 관련된 예리하고 정직하고 분별력 있는 사고{思考}에 달려있다. 도덕적으로 비겁한 사람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 사고를 결코 성취할 수 없으며; 새로운 수준의 체험을 시작하고, 알려지지 않은 지적 생활 분야의 탐구를 시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101:7.3 새 체계의 가치기준이 곧 성립되며; 원칙과 표준의 새로운 공식화가 성취되며; 기질과 이상{理想}이 다시 모양을 갖추며; 인격있는 하나님 개념이 이뤄지고,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확장되는 개념들이 뒤따른다.
101:7.4 종교의 생활 철학과 비종교의 생활 철학 사이의 큰 차이는, 인정된 가치기준의 본성과 수준에, 그리고 충성심의 대상에 있다. 종교 철학의 진화에는 네 국면이 있다: 그런 체험은 전통과 권위에 굴복하기로 체념하면서 그저 순응하는 체험이 될 수 있다. 아니면 그 철학은 단지 일상의 삶을 안정시키기에 충분한 정도에서 사소한 달성에 만족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런 우발적 수준에서 일찍부터 성장이 멈춘다. 그런 필사자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셋째 집단은, 논리로 지적 수준까지 진보하지만, 문화에 노예 상태가 된 결과로 거기서 침체에 빠진다. 문화적 속박의 무자비한 손아귀에 그토록 견고히 붙들려있는 대단한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문화적 속박을, 과학이라고 거짓되게 부르는 유물론적 속박으로 대체시키는 자들을 보는 것도, 똑같이 애처로운 일이다. 철학의 넷째 수준은 모든 틀에 박히고 전통적인 불리한 조건으로부터 해방을 달성하고, 정직하게, 충성되게, 용감하게, 그리고 진실되게 감히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간다.
101:7.5 어떤 종교 철학이든지 그 까다로운 시험은, 물질 세계의 실체와 영적 세계의 실체 사이를 구별 하는가 못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지적 노력을 기울이고 사회에 봉사할 때 그 실체들이 하나 된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건전한 종교 철학은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혼동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순전히 이적{異蹟}을 바라는 심미적 종파를 종교 대용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101:7.6 철학은, 대체로 양심을 일깨우는 옛 이야기였던 원시 종교를, 시공우주 실체의 높아지는 가치를 맛보는 생생한 체험으로 변형시킨다.
8. 신앙과 믿음
101:8.1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양식을 실현할 때, 믿음은 신앙의 수준에 도달했다. 어떤 가르침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며; 그것은 믿음에 불과하다. 또한 확신이나 신념도 신앙이 아니다. 정신 상태는 생활 방식을 실제로 지배할 때에만 신앙의 수준에 도달한다. 신앙은 개인적인 참된 종교 체험의 생생한 속성이다. 사람은 진리를 믿고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선함을 숭상하지만, 그것들을 경배하지는 않으며; 그런 구원하는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의인화된 분이고, 무한히 그 이상{以上}이시다.
101:8.2 믿음은 항상 제한하고 구속하며; 신앙은 확장하고 풀어준다. 믿음은 고정시키지만, 신앙은 해방시킨다. 그러나 살아있는 종교적 신앙은 고상한 믿음들의 연합 이상{以上}이며; 고귀한 철학 체계보다 크며; 영적 의미, 신성한 이상{理想}, 그리고 최상의 가치기준과 관련된 생생한 체험이며; 하나님을_알고 사람을_섬긴다. 믿음은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은 반드시 개인적이다. 신학적 믿음을 한 집단에게 제시할 수 있으나, 신앙은 오직 종교인 개인의 마음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101:8.3 신앙이 감히 현실을 부정하고 추종자에게 추측된 지식을 수여할 때, 신앙은 신뢰를 저버렸다. 신앙이 지적 성실성을 지키지 못하도록 조장하고, 최상의 가치기준과 신성한 이상{理想}에 바치는 충성심을 헐뜯을 때, 그 신앙은 배신했다. 신앙은 필사자의 인생에서 문제를_해결하는 임무를 결코 피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신앙은 편협함이나 박해 또는 옹졸함을 조장하지 않는다.
101:8.4 신앙은 창조적 상상력을 속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연구로 얻은 발견에 대해 불합리한 편견을 보이지도 않는다. 신앙은 종교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용맹스럽게 황금률을 실천하라고 종교인에게 강요한다. 신앙의 열정은 지식에 의거하며, 신앙의 분투는 장엄한 평안으로 이끄는 전주곡이다.
9. 종교와 도덕성
101:9.1 이전{以前}의 진화 종교가 창출하고 육성한 윤리적 책임을 지는 의무의 요구 사항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종교에서 공언{公言}된 어떤 계시든지 믿을 만하다고 여길 수 없다. 계시는 진화된 종교의 윤리적 시야를 반드시 확장시키며, 한편 전에 있었던 모든 계시의 도덕적 책무를, 일제히 어김없이 확대시킨다.
101:9.2 너희가 사람의 원시 종교에 대하여 (또는 원시인의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 판단을 내리는 자리에 앉는다고 가정할 때, 너희는 그런 미개인의 계몽된 정도와 양심의 상태에 따라서 그들을 판단하고, 그들의 종교 체험을 평가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너 자신의 지식과 진리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
101:9.3 모론시아 실체는, 사람의 가장 높은 윤리와 도덕 개념, 즉 인생의 가장 큰 가치와 우주의 가장 심오한 실체에 대한 사람의 가장 고상한 해석을 구성하는데, 참 종교는, 이 모론시아 실체를 믿지 않는 것이 그에게 옳지 못하리라고 그를 강력하게 설득하는, 혼 속에 있는 장엄하고 심원한 신념이다. 그리고 그런 종교는, 다만 영적 의식{意識}이 내리는 최고의 명령에 지적 충성을 바치는 체험이다.
101:9.4 아름다움을 추구함은, 오직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고 도덕 개념을 풍성하게 하는 범위 내에서만, 종교의 일부분이다. 예술은, 높은 영적 동기로부터 도출된 목적으로 확산될 때에만 종교적이다.
101:9.5 문명화된 사람의 계몽된 영적 의식은, 어떤 특정한 지적 믿음, 또는 어떤 한 가지 특별한 생활 방식에 관여하기보다, 오히려 생활에 관한 진실, 즉 필사자 실존에서 항상_반복되는 상황에 반응하는, 선하고 올바른 기법을 발견하는 데 관여한다. 도덕 의식은, 일상의 행위를 통제하고 안내하면서 사람이 지켜야한다고 의무가 요구하는, 윤리적이고 새로 나타나는 그 모론시아 가치기준을 인간이 인식하고 자각하는 데 적용되는 이름일 뿐이다.
101:9.6 종교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종교의 본성과 기능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실제 징후가 있다:
101:9.7 1. 종교의 영적 충동과 철학적 압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에 대한 그의 판단을 직접 밖으로 향하게 하여, 그의 동료의 용무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경향--곧 종교의 윤리적 반응--이 있다.
101:9.8 2. 종교는 인간 정신이 신성한 실체를 영적으로 의식{意識}하도록 만드는데, 그런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있는 여러 기존 개념에 기초하며, 그것으로부터 신앙을 통해서 도출되고 영적 가치가 있는 첨가된 개념들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종교는 필사자의 직무를 검열하며, 이것은 실제로, 시간세계의 증진된 실체와 더 오래 지속하는 영원성에 속하는 실체들을 믿는, 일종의 영화롭게 된 도덕적 신뢰와 확신이다.
101:9.9 신앙은, 도덕적 의식, 그리고 영속하는 실체에 대한 영적 개념을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종교는, 구원하는 기법, 즉 점진적인 모론시아 변화로,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하여, 사람이 현세의 자연 세계의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영적 세계의 숭고한 실체에 도달하는 통로가 된다.
101:10.1 지성적인 사람은, 자신이 자연에서 발생된 존재, 즉 물질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알며; 마찬가지로, 에너지 우주에서, 엄밀한 수준의 움직임과 균형상태 속에서는 개별 인격이 생존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또한 사람은 결코 물리적 인과법칙의 고찰을 통하여 영적 실체를 식별할 수도 없다.
101:10.2 인간은 또한, 자신이 관념적인 시공우주의 일부분임을 자각하지만, 개념이 필사자의 수명보다 길게 지속되더라도, 그 개념에 내재된 어떤 것도, 생각하는 그 인격체의 인격적 생존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논리와 이성의 가능성을 다 소모해도, 논리를 따르는 자 또는 추론하는 자에게는, 인격이 생존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101:10.3 물질 수준의 법칙은, 인과관계의 연속성, 즉 선행{先行}하는 행위에 대해서 결과가 끊임없이 반응한다고 규정하며; 정신 수준은 관념 작용의 연속성이 영구하다는 것, 즉 선재{先在}하는 생각들로부터 개념의 잠재력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이 두 수준 가운데 어느 것도, 탐구하는 필사자에게, 신분의 불공평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우주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불안, 즉 제한된 생명 에너지를 다 소모하면 소멸될 운명을 가진 일시적 인격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못한다.
101:10.4 오직 영적 통찰력에 이르게 하는 모론시아의 길을 통해서, 사람은 우주에서 자신의 필사자 신분 속에 타고난 족쇄를 언젠가 깨뜨릴 수 있다. 에너지와 정신은 낙원과 신격에게로 되돌아가지만, 사람의 에너지 재능도 정신 재능도, 그런 낙원 신격으로부터 직접 나오지 않는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만,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영적 의미에서, 낙원 아버지가 지금 사람에게 자질을 부여하고 내주하시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인류는, 종교 체험이라는 길을 통하여 참된 신앙을 실천하는 경우 외에는, 결코 신성{神性}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진리임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적으로 막힌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며, 죽음이 존재하는 물질 영역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있는 영적 영역으로 안전하게 안내받을 합리적 희망을, 사람에게 제공한다.
101:10.5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불변성과 철학적 보장을 제공하는 것, 즉 필사 존재를 신성한 존재와, 부분적 존재를 완전한 존재와, 사람을 하나님과 융합시킴으로써, 인간 생애를 안정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화된 것에 대한 사람의 개념이 현실성을 부여받는 것은, 종교 체험을 통해서다.
101:10.6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과학적 증명도 논리적 증명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이성 자체만으로는 종교 체험의 가치와 우수성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은 언제나 옳을 것이다: 하나님 뜻을 기꺼이 행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영적 가치기준의 확실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필사자의 수준에서 종교적 체험이 실체임을 증명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런 신앙은 물질세계라는 기계식 변속기{變速器}로부터, 그리고 지적 세계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잘못된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마련해주며; 신앙만이, 개별 인격이 계속 생존하는 것에 관해 필사자가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찾아낸 해결책이다. 사랑, 법칙, 통일, 및 점진적 신격 달성이 있는 보편적 창조에서, 신앙은 완성된 실체에 이르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통행증{通行證}이다.
101:10.7 종교는, 사람이 이상주의로 고립된 느낌 또는 영적으로 외로운 느낌을 효과적으로 치유하며; 믿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새롭고 의미심장한 우주의 한 시민으로서 해방시킨다. 종교는, 혼 속에서 식별할 수 있는, 흐릿하게 보이는 정의의 빛을 따를 때, 사람이 이렇게 함으로 무한자의 계획과 영원자의 목적과 한 편이 된다는 확신을 준다. 해방된 그런 혼은, 새로운 이 우주, 즉 자신의 우주에서 즉시 평안한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101:9.4 아름다움을 추구함은, 오직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고 도덕 개념을 풍성하게 하는 범위 내에서만, 종교의 일부분이다. 예술은, 높은 영적 동기로부터 도출된 목적으로 확산될 때에만 종교적이다.
101:9.5 문명화된 사람의 계몽된 영적 의식은, 어떤 특정한 지적 믿음, 또는 어떤 한 가지 특별한 생활 방식에 관여하기보다, 오히려 생활에 관한 진실, 즉 필사자 실존에서 항상_반복되는 상황에 반응하는, 선하고 올바른 기법을 발견하는 데 관여한다. 도덕 의식은, 일상의 행위를 통제하고 안내하면서 사람이 지켜야한다고 의무가 요구하는, 윤리적이고 새로 나타나는 그 모론시아 가치기준을 인간이 인식하고 자각하는 데 적용되는 이름일 뿐이다.
101:9.6 종교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종교의 본성과 기능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실제 징후가 있다:
101:9.7 1. 종교의 영적 충동과 철학적 압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에 대한 그의 판단을 직접 밖으로 향하게 하여, 그의 동료의 용무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경향--곧 종교의 윤리적 반응--이 있다.
101:9.8 2. 종교는 인간 정신이 신성한 실체를 영적으로 의식{意識}하도록 만드는데, 그런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있는 여러 기존 개념에 기초하며, 그것으로부터 신앙을 통해서 도출되고 영적 가치가 있는 첨가된 개념들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종교는 필사자의 직무를 검열하며, 이것은 실제로, 시간세계의 증진된 실체와 더 오래 지속하는 영원성에 속하는 실체들을 믿는, 일종의 영화롭게 된 도덕적 신뢰와 확신이다.
101:9.9 신앙은, 도덕적 의식, 그리고 영속하는 실체에 대한 영적 개념을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종교는, 구원하는 기법, 즉 점진적인 모론시아 변화로,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하여, 사람이 현세의 자연 세계의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영적 세계의 숭고한 실체에 도달하는 통로가 된다.
10. 사람을 해방시키는 종교
101:10.1 지성적인 사람은, 자신이 자연에서 발생된 존재, 즉 물질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알며; 마찬가지로, 에너지 우주에서, 엄밀한 수준의 움직임과 균형상태 속에서는 개별 인격이 생존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또한 사람은 결코 물리적 인과법칙의 고찰을 통하여 영적 실체를 식별할 수도 없다.
101:10.2 인간은 또한, 자신이 관념적인 시공우주의 일부분임을 자각하지만, 개념이 필사자의 수명보다 길게 지속되더라도, 그 개념에 내재된 어떤 것도, 생각하는 그 인격체의 인격적 생존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논리와 이성의 가능성을 다 소모해도, 논리를 따르는 자 또는 추론하는 자에게는, 인격이 생존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101:10.3 물질 수준의 법칙은, 인과관계의 연속성, 즉 선행{先行}하는 행위에 대해서 결과가 끊임없이 반응한다고 규정하며; 정신 수준은 관념 작용의 연속성이 영구하다는 것, 즉 선재{先在}하는 생각들로부터 개념의 잠재력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이 두 수준 가운데 어느 것도, 탐구하는 필사자에게, 신분의 불공평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우주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불안, 즉 제한된 생명 에너지를 다 소모하면 소멸될 운명을 가진 일시적 인격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못한다.
101:10.4 오직 영적 통찰력에 이르게 하는 모론시아의 길을 통해서, 사람은 우주에서 자신의 필사자 신분 속에 타고난 족쇄를 언젠가 깨뜨릴 수 있다. 에너지와 정신은 낙원과 신격에게로 되돌아가지만, 사람의 에너지 재능도 정신 재능도, 그런 낙원 신격으로부터 직접 나오지 않는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만,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영적 의미에서, 낙원 아버지가 지금 사람에게 자질을 부여하고 내주하시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인류는, 종교 체험이라는 길을 통하여 참된 신앙을 실천하는 경우 외에는, 결코 신성{神性}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진리임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적으로 막힌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며, 죽음이 존재하는 물질 영역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있는 영적 영역으로 안전하게 안내받을 합리적 희망을, 사람에게 제공한다.
101:10.5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불변성과 철학적 보장을 제공하는 것, 즉 필사 존재를 신성한 존재와, 부분적 존재를 완전한 존재와, 사람을 하나님과 융합시킴으로써, 인간 생애를 안정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화된 것에 대한 사람의 개념이 현실성을 부여받는 것은, 종교 체험을 통해서다.
101:10.6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과학적 증명도 논리적 증명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이성 자체만으로는 종교 체험의 가치와 우수성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은 언제나 옳을 것이다: 하나님 뜻을 기꺼이 행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영적 가치기준의 확실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필사자의 수준에서 종교적 체험이 실체임을 증명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런 신앙은 물질세계라는 기계식 변속기{變速器}로부터, 그리고 지적 세계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잘못된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마련해주며; 신앙만이, 개별 인격이 계속 생존하는 것에 관해 필사자가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찾아낸 해결책이다. 사랑, 법칙, 통일, 및 점진적 신격 달성이 있는 보편적 창조에서, 신앙은 완성된 실체에 이르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통행증{通行證}이다.
101:10.7 종교는, 사람이 이상주의로 고립된 느낌 또는 영적으로 외로운 느낌을 효과적으로 치유하며; 믿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새롭고 의미심장한 우주의 한 시민으로서 해방시킨다. 종교는, 혼 속에서 식별할 수 있는, 흐릿하게 보이는 정의의 빛을 따를 때, 사람이 이렇게 함으로 무한자의 계획과 영원자의 목적과 한 편이 된다는 확신을 준다. 해방된 그런 혼은, 새로운 이 우주, 즉 자신의 우주에서 즉시 평안한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101:10.8 네가 그런 신앙의 변환을 체험할 때, 너는 더 이상 엄밀한 시공우주에 맹종하는 노예가 아니며, 오히려 만유의
아버지의 해방되고 의지를 지닌 아들이다. 그런 해방된 아들은, 일시적 실존의 종말이라는 냉혹한 운명에 대항하여 더 이상 홀로 싸우지 않으며; 모든 자연 현상, 즉 자기에게 절망적으로 대항하는 불평등과 더 이상 싸우지 않으며; 희망 없는 환상을 신뢰하거나, 공상적인 어떤 오류에 신앙을 고정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무력하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는다.
101:10.9 이제는 오히려, 실존의 부분적인 그림자에 대해서 실체가 승리하는 싸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지원한다. 마침내 모든 피조물은, 영원한 생명과 신성한 신분을 달성하려는 숭고한 투쟁에서, 거의 제한이 없는 우주의 모든 거룩한 단체와 하나님이 자기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신앙으로 해방된 그런 자녀는, 영원성에 속하는 최상의 세력들 및 신성한 인격체들과 같은 편에서 시간세계의 싸움에 확실하게 지원했으며; 저희가 가는 길에 이제는 천체들도 저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저희는 마침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며, 모든 것은, 물질적으로 고립된 불확실성으로부터, 영원히 영적으로 진보하는 확실성으로 변환됐다. 심지어 시간 자체도, 공간의 움직이는 찬란한 모습 위에 낙원 실체들이 던진, 영원 세계의 그림자가 될 뿐이다.
101:10.9 이제는 오히려, 실존의 부분적인 그림자에 대해서 실체가 승리하는 싸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지원한다. 마침내 모든 피조물은, 영원한 생명과 신성한 신분을 달성하려는 숭고한 투쟁에서, 거의 제한이 없는 우주의 모든 거룩한 단체와 하나님이 자기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신앙으로 해방된 그런 자녀는, 영원성에 속하는 최상의 세력들 및 신성한 인격체들과 같은 편에서 시간세계의 싸움에 확실하게 지원했으며; 저희가 가는 길에 이제는 천체들도 저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저희는 마침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며, 모든 것은, 물질적으로 고립된 불확실성으로부터, 영원히 영적으로 진보하는 확실성으로 변환됐다. 심지어 시간 자체도, 공간의 움직이는 찬란한 모습 위에 낙원 실체들이 던진, 영원 세계의 그림자가 될 뿐이다.
101:10.10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제시했음]
◀제100편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 제102편 종교적 신앙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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