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편 종교의 사회적 문제 ∥ 제101편 종교의 진짜 본성▶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100:0.1 역동적인 종교 생활 체험은, 평범한 개인을, 이상주의적 능력을 지닌 인물로 변화시킨다. 종교는 각 개인의 진보를 촉진시킴으로써 전체의 진보에 공헌하며, 각 개인의 진보는 전체의 성취를 통하여 증대된다.
100:0.2 다른 종교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은 서로의 영적 성장을 자극한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곧 주관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객관적 매력--에 토양을 제공하고, 더욱이 최상의 주관적 만족감을 낳는다. 그리고 종교는 일상생활의 진부한 고역{苦役}을 고상하게 만든다.
100:1.1 종교는 의미의 성장과 가치기준의 향상을 가져오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評價}를 절대불변 수준으로 높일 때, 반드시 악{惡}이 생겨난다. 어린이는 즐거움의 크기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하며; 성숙도는 개인의 즐거움 대신, 더 높은 의미를 찾는 정도, 즉 다양해진 생활환경과 시공우주 관계에서 최고 개념에 충성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100:1.2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성장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고착{固着}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의미의 성장을 위한 준비가, 서로 다른 시대에, 계속되는 문화에서, 그리고 증진하는 문명의 진행 단계에서 이뤄져야한다. 편견과 무지가 성장의 주요 방해요소다.
100:1.3 성장하는 모든 어린이에게 그의 종교 체험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진부한 어른의 체험을 그에게 강요하지 말라. 확립된 교육 체제를 통하여 매년 진보되는 것이 반드시 지적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영적 성장은 더욱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라.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성품의 발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장은 단지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진행되는 정도로 참되게 표시된다. 참다운 교육의 성장은, 이상{理想}의 향상, 가치기준을 더 깊이 음미함, 가치기준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최상의 가치기준에 더욱 충실함으로 표시된다.
100:1.4 어린이는 오직 어른 지인{知人}들의 충실함으로만 영구적으로 감명 받으며; 교훈이나 본보기조차 오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충실한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며;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일으키는 실체다. 지금 충실하게 살면--즉 성장하면--,그 결과가 나중에 반드시 따라올 것이다. 올챙이가 개구리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100:0.2 다른 종교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은 서로의 영적 성장을 자극한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곧 주관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객관적 매력--에 토양을 제공하고, 더욱이 최상의 주관적 만족감을 낳는다. 그리고 종교는 일상생활의 진부한 고역{苦役}을 고상하게 만든다.
1. 종교적 성장
100:1.1 종교는 의미의 성장과 가치기준의 향상을 가져오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評價}를 절대불변 수준으로 높일 때, 반드시 악{惡}이 생겨난다. 어린이는 즐거움의 크기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하며; 성숙도는 개인의 즐거움 대신, 더 높은 의미를 찾는 정도, 즉 다양해진 생활환경과 시공우주 관계에서 최고 개념에 충성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100:1.2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성장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고착{固着}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의미의 성장을 위한 준비가, 서로 다른 시대에, 계속되는 문화에서, 그리고 증진하는 문명의 진행 단계에서 이뤄져야한다. 편견과 무지가 성장의 주요 방해요소다.
100:1.3 성장하는 모든 어린이에게 그의 종교 체험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진부한 어른의 체험을 그에게 강요하지 말라. 확립된 교육 체제를 통하여 매년 진보되는 것이 반드시 지적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영적 성장은 더욱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라.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성품의 발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장은 단지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진행되는 정도로 참되게 표시된다. 참다운 교육의 성장은, 이상{理想}의 향상, 가치기준을 더 깊이 음미함, 가치기준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최상의 가치기준에 더욱 충실함으로 표시된다.
100:1.4 어린이는 오직 어른 지인{知人}들의 충실함으로만 영구적으로 감명 받으며; 교훈이나 본보기조차 오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충실한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며;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일으키는 실체다. 지금 충실하게 살면--즉 성장하면--,그 결과가 나중에 반드시 따라올 것이다. 올챙이가 개구리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100:1.5 종교적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토양{土壤}은, 자아를_실현하는 진취적 생활, 타고난 성향의 조화, 호기심 발동 및 타당한 모험심 향유, 만족감 체험, 주목하고 경계하도록 자극하는 두려움의 작용, 경이감의_매력, 그리고 겸손, 즉 자신이 보잘 것 없음을 정상으로 의식하는 것 등을 전제로 한다. 성장은 또한, 개성의 발견과 그에 따른 자기_비평--곧 양심--에 입각하는데, 이는 사람이, 자신의 가치와_습성, 즉 개인의 이상{理想}에 따라서 스스로를 비평하는 것이, 정말로 양심이기 때문이다.
100:1.6 종교 체험은 육체의 건강과 유전된 기질과 사회 환경에, 현저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현세의 조건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몰두하는 혼이 이룩하는 내면의 영적 진보를 막지 못한다. 정상적인 모든 필사자 속에는, 그들이 특별히 억압하지만 않으면 기능을 발휘할, 성장과 자아_실현을 향한 어떤 타고난 본능적 욕구가 있다. 영적 성장 잠재력을 갖는 이 구조적 재능을 육성하는 확실한 기법은, 최상의 가치에 대해서 전심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100:1.7 종교는, 증여되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또는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최종 가치를 더욱 탐구하는 데 비례하여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따라서 포괄적인 성장은, 의미가 누적되고 가치기준이 계속_확장하면서 높아진 결과로 일어난다. 그러나 숭고함 자체는, 항상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100:1.8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교적 습관은, 질서 있는 영적 성장에 기여한다. 누구든지, 영적 자극에 호의적으로 반응하도록, 일종의 영적 조건반사를 일으키도록, 종교적 성향을 개발할 수 있다. 종교적 성장을 도와주는 습관에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세련된 감수성,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삶을 인식함, 시공우주의 의미에 대한 깊은 명상, 경건한 문제 해결, 자신의 영적 삶을 다른 동료들과 나눔, 이기심을 회피함, 신성한 자비를 이용하지 않음,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살기 등이 있다. 종교적 성장의 요소는 의도적일지 모르나, 성장 자체는 반드시 무의식적{無意識的}이다.
100:1.9 그렇지만, 종교적 성장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특징은, 그 성장이 인간 지능의 잠재의식 영역으로 가정되는 곳에서 작용하는 활동임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필사 정신의 초의식 수준에서 이뤄지는 창조적 활동임을 뜻한다. 의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성장하는 현실을 깨닫는 체험은, 초월의식 기능이 실존한다는, 하나의 명확한 증거다.
100:2.1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된 영적 권세와 생생한 영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달려있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계속 맺음에: 즉 자신이 영적 은인{恩人}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데 달려있다. 영적 진보는, 완전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자들의 자아_의식,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전심으로 행하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영적으로 부족함을 지적으로 깨달음에 달려있다.
100:2.2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는 의미를 식별하고, 그리고 나서 가치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증거는, 사랑으로 인해 자극받고, 사심 없는 섬김으로 활성화되고, 신성{神性}에 속하는 완전한 이상{理想}을 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 지배되는, 인간의 인격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런 체험 전체가 종교의 실체이며, 단순한 신학적 믿음과 대조된다.
100:2.3 종교는, 우주에 대해 영적으로 반응하는, 개화되고 현명한 기법이 되는 체험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다. 영화롭게 된 그런 종교는, 인간 인격의 3가지 수준, 즉: 지적 수준과 모론시아 수준과 영적 수준에서; 정신에 대해, 진화하는 혼 속에서, 그리고 내주{內住}하는 영과 함께, 작용할 수 있다.
100:2.4 영성{靈性}은 곧바로, 한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친근한지, 그리고 동료 존재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재는 척도가 된다. 영성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 하고, 의미에 담겨있는 진리를 알아보고, 가치기준에서 선함을 발견하는 역량을 증진시킨다. 영적 발달은, 발달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결정되고, 사랑의 이기적 특성을 제거하는 만큼 즉시 이뤄진다.
100:2.5 실제 영적 상태는, 신격에 도달한 정도, 즉 조율사와 동조{同調}되는 정도와 같다. 궁극의 영성 성취는, 실체가 최고점에 도달함, 즉 하나님처럼 되는 최고점과 일치한다. 영생{永生}이란, 무한한 가치기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100:2.6 인간이 자아를_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한다. 노력할만한 가치를 갖는 유일한 실체는, 신성하고 영적이고 영원한 것이다. 필사적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인간적 애정을 만족시킬 권리가 있으며;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 충성함으로써 유익을 얻지만; 이런 것들은, 공간을 초월하게 돼있는, 시간을 극복하게 돼있는, 그리고 신성한 완전성과 완결성취자 봉사라는 영원한 운명을 성취하게 돼있는 불멸{不滅}의 인격을 그 위에 건축하기 위한 영원한 기초가 아니다.
100:1.8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교적 습관은, 질서 있는 영적 성장에 기여한다. 누구든지, 영적 자극에 호의적으로 반응하도록, 일종의 영적 조건반사를 일으키도록, 종교적 성향을 개발할 수 있다. 종교적 성장을 도와주는 습관에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세련된 감수성,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삶을 인식함, 시공우주의 의미에 대한 깊은 명상, 경건한 문제 해결, 자신의 영적 삶을 다른 동료들과 나눔, 이기심을 회피함, 신성한 자비를 이용하지 않음,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살기 등이 있다. 종교적 성장의 요소는 의도적일지 모르나, 성장 자체는 반드시 무의식적{無意識的}이다.
100:1.9 그렇지만, 종교적 성장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특징은, 그 성장이 인간 지능의 잠재의식 영역으로 가정되는 곳에서 작용하는 활동임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필사 정신의 초의식 수준에서 이뤄지는 창조적 활동임을 뜻한다. 의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성장하는 현실을 깨닫는 체험은, 초월의식 기능이 실존한다는, 하나의 명확한 증거다.
2. 영적 성장
100:2.1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된 영적 권세와 생생한 영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달려있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계속 맺음에: 즉 자신이 영적 은인{恩人}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데 달려있다. 영적 진보는, 완전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자들의 자아_의식,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전심으로 행하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영적으로 부족함을 지적으로 깨달음에 달려있다.
100:2.2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는 의미를 식별하고, 그리고 나서 가치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증거는, 사랑으로 인해 자극받고, 사심 없는 섬김으로 활성화되고, 신성{神性}에 속하는 완전한 이상{理想}을 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 지배되는, 인간의 인격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런 체험 전체가 종교의 실체이며, 단순한 신학적 믿음과 대조된다.
100:2.3 종교는, 우주에 대해 영적으로 반응하는, 개화되고 현명한 기법이 되는 체험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다. 영화롭게 된 그런 종교는, 인간 인격의 3가지 수준, 즉: 지적 수준과 모론시아 수준과 영적 수준에서; 정신에 대해, 진화하는 혼 속에서, 그리고 내주{內住}하는 영과 함께, 작용할 수 있다.
100:2.4 영성{靈性}은 곧바로, 한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친근한지, 그리고 동료 존재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재는 척도가 된다. 영성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 하고, 의미에 담겨있는 진리를 알아보고, 가치기준에서 선함을 발견하는 역량을 증진시킨다. 영적 발달은, 발달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결정되고, 사랑의 이기적 특성을 제거하는 만큼 즉시 이뤄진다.
100:2.5 실제 영적 상태는, 신격에 도달한 정도, 즉 조율사와 동조{同調}되는 정도와 같다. 궁극의 영성 성취는, 실체가 최고점에 도달함, 즉 하나님처럼 되는 최고점과 일치한다. 영생{永生}이란, 무한한 가치기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100:2.6 인간이 자아를_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한다. 노력할만한 가치를 갖는 유일한 실체는, 신성하고 영적이고 영원한 것이다. 필사적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인간적 애정을 만족시킬 권리가 있으며;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 충성함으로써 유익을 얻지만; 이런 것들은, 공간을 초월하게 돼있는, 시간을 극복하게 돼있는, 그리고 신성한 완전성과 완결성취자 봉사라는 영원한 운명을 성취하게 돼있는 불멸{不滅}의 인격을 그 위에 건축하기 위한 영원한 기초가 아니다.
100:2.7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심오한 확신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을 알고 천국을 믿는 자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들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느냐?” 현세의 안전은 무너지기 쉬우나, 영적 확실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의 역경, 이기심, 잔인함, 증오, 원한, 및 시기심의 큰 물결이 필사자의 혼을 휩쓸 때, 너희는 하나의 내적 요새, 즉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영의 성곽이 존재한다는 확신 속으로 안전하게 피할 수 있으며; 적어도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내주하는 영에게 자신의 혼을 완전히 맡기는 모든 인간에게 확실히 적용된다.
100:2.8 그런 영적 달성이 이뤄지고 나면, 점차 성장하여 확립되든지, 또는 특정한 위기로 인해 확립되든지 상관없이, 새로운 가치 기준의 발달은 물론, 인격의 새로운 적응이 일어난다. 영으로 태어난 그런 개인은 확실한 동기를 삶에 다시 부여받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열정이 사라지고 가장 열망하는 희망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태연히 기다릴 수 있으며; 그런 재난이 단지, 새롭고 더 웅대한 수준의 우주 달성이라는 더 고상하고 영속적인 실체를 높여주기에 앞서, 사람이 현세에 창조한 것을 파괴하는, 방향을 수정하는 격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100:2.8 그런 영적 달성이 이뤄지고 나면, 점차 성장하여 확립되든지, 또는 특정한 위기로 인해 확립되든지 상관없이, 새로운 가치 기준의 발달은 물론, 인격의 새로운 적응이 일어난다. 영으로 태어난 그런 개인은 확실한 동기를 삶에 다시 부여받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열정이 사라지고 가장 열망하는 희망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태연히 기다릴 수 있으며; 그런 재난이 단지, 새롭고 더 웅대한 수준의 우주 달성이라는 더 고상하고 영속적인 실체를 높여주기에 앞서, 사람이 현세에 창조한 것을 파괴하는, 방향을 수정하는 격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3. 최상의 가치에 관한 여러 개념
100:3.1 종교는, 변함없고 행복 넘치는 정신의 평안을 얻는 기법이 아니며; 역동적 봉사를 위하여 혼을 체계화하는 추진력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돌보는 충성된 봉사에 자아성{自我性} 전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고 목표 달성, 즉 영원한 보상에 필수적인 어떤 값이든지 지불한다. 종교적 충성심에는 완벽한 헌신이 있는데, 이것은 최고로 숭고하다. 이런 충성심은 사회적으로 효력있고 영적으로 진보적이다.
100:3.2 종교인에게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최고의 실체에 접근하고 신성한 가치를 깨닫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인간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선과 악을 결정하지 않으며; 도덕적 가치기준은 소망의 실현이나 감정적 좌절감에서 자라나지 않는다.
100:3.3 가치기준을 고려할 때, 너희는 가치 있는 것과 가치를 갖는 것의 차이를 반드시 구분해야한다. 너희는 유쾌하게 활동하는 것과, 늘 점진적으로 더욱 높아지는 인간 체험 수준에서 유쾌한 활동을 의미 있게 통합하고 더 낫게 실현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해야한다.
100:3.4 의미는, 체험이 가치에 덧붙이는 무엇이며; 가치기준을 식별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혼자서만 누리는 순전히 이기적인 만족은, 의미를 실질적으로 평가절하 하는, 상대적 악{惡}에 가까운 무의미한 향락을 암시할지도 모른다. 실체들이 의미 있고 심적으로 연결될 때, 정신이 그런 관계들을 인식하고 식별할 때, 가치기준은 체험에 의거한다.
100:3.5 가치기준은 결코 정적{靜的}일 수 없으며; 실체는 변화, 즉 성장을 의미한다. 성장이 없는 변화, 즉 의미를 확장함과 가치를 높임이 없는 변화는 무가치하다--곧 잠재적 악이다. 어떤 체험이든지, 시공우주에 적응이 잘 돼있을수록,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 가치는 관념적 환상이 아니며; 실재하지만, 반드시 관계라는 실상에 의존한다. 가치기준은 항상 실제적인 동시에 잠재적이다--곧 과거의 무엇이 아니라, 현재의 무엇, 그리고 앞으로 있을 무엇이다.
100:3.6 실제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결합은, 성장, 즉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단순한 진보가 아니다. 진보는 항상 의미심장하지만, 성장이 없으면 비교적 무가치하다. 인생에서 최고로 값진 것은, 가치기준이 성장함, 의미가 향상됨, 그리고 이 두 체험이 시공우주에서 서로 관계있음을 깨닫는 데 있다. 그런 체험은, 하나님을_의식함과 동등하다. 그런 필사자는, 자연을 초월하지는 않더라도 정말로 인간을 초월하고 있으며; 불멸의 혼{魂}이 진화하고 있다.
100:3.7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지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는 있다. 육체의 성장이거나 지적 성장이거나 영적 성장이거나 상관없이, 성장은 반드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사랑은 이렇게 성장하며; 창조되거나 만들어지거나 구매될 수 없으며; 사랑은 자라야한다. 진화는 성장을 일으키는 시공우주 기법이다. 사회의 성장은 법으로 보장할 수 없으며, 도덕의 성장은 경영을 개선해서 이룰 수 없다. 사람이 기계를 만들 수 있으나, 기계의 참된 가치는 반드시 인간의 문화와 개인의 평가로 도출해야한다. 사람이 성장에 유일하게 기여하는 것은, 자기 인격의 온 힘--곧 살아있는 신앙--을 동원하는 것이다.
4. 성장의 문제
100:4.1 종교 생활은 헌신적인 삶이며, 헌신적인 삶은 독창적이고 자발적인 창조적 생활이다. 새로운 종교 통찰력은 갈등에서 생겨나며, 갈등은 예전에 열등하게 반응하던 경향 대신, 새롭고 더 낫게 반응하는 습관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새로운 의미는 오직 갈등 한가운데서만 일어나며; 갈등은, 우수한 의미에 내포된 더 높은 가치를 지지하지 않는 경우에만 지속된다.
100:4.2 종교적 혼란은 피할 수 없으며; 심령의 갈등과 영적 동요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생활 기준을 체계화할 때, 정신의 철학 영역에 상당한 소란이 발생한다. 투쟁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진실하고 고결한 것들을 위한 충성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영적 시력이 밝아지고 시공우주 통찰력이 증진되는 데는 수고가 수반된다. 그리고 인간 지능은, 이 세상에 실존하는 비영적{非靈的} 에너지를 먹고 살다가 젖을 떼듯이 떨어져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나태한 동물적 정신은, 시공우주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는 데 필요한 수고를 몹시 싫어한다.
100:4.3 그러나 종교 생활에서 중대한 문제는, 사랑이 지배함으로 그 인격체의 혼의 능력들을 통합하는 과제에 있다. 건강과 심적{心的} 능률과 행복은, 육신 체계, 정신 체계, 그리고 영 체계가 통합될 때 발생한다. 사람이 건강과 건전함에 대해서는 많이 이해하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깨닫는 바가 거의 없다. 가장 고상한 행복은, 영적 진보와 뗄 수 없을 만큼 연결돼있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 즉 너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가져온다.
100:4.4 육체 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감각이 물체의 실존을 밝혀주며; 정신은 의미를 지닌 실체를 발견하지만; 영적 체험은 생애의 참된 가치관을 각 개인에게 드러낸다. 인간의 이런 높은 수준의 삶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사람을 이타적으로 사랑함으로 달성된다. 너희가 동료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사람에게 그런 높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동역자들의 동기를 발견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누가 너를 짜증나게 한다면, 분노의 느낌을 일으킨다면, 너는 그의 관점, 즉 그런 불쾌한 행을 하게 된 이유를 분별하기 위해 동정심을 갖고 노력해야한다. 일단 너의 이웃을 이해하면, 너는 인내할 수 있게 되고, 이 아량이 자라서 우정이 되고, 무르익으면 사랑이 될 것이다.
100:4.5 동굴에서 살던 시대의 원시적인 너희 조상 가운데 하나의 모습--곧 키가 작고, 흉하고, 불결하고, 고함치는 인간 괴물이 다리를 벌리고, 막대기를 들고, 정면을 사납게 바라보면서 증오심과 악의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상상해보라. 그런 모습은 사람의 신성한 존엄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그림을 확대시켜보자. 힘찬 이 인간 앞에, 날카로운_송곳니를 가진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그 사람의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너는, 그런 모습이 인간 종족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고 곧 알아채겠지만, 그 사람은 두 그림 속에서 같은 주인공이다. 너는 오직 두 번째 그림에서만 넓어진 시야의 덕을 보고 있다. 너는 그 속에서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헤아린다. 네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 받을 만한 것이 된다. 네가 동료들의 동기를 헤아릴 수만 있다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쉬워질까. 동료들을 알 수만 있다면, 너는 결국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00:4.6 너는 단순히 의지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너의 동료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네 이웃의 동기와 감상을 속속들이 이해함으로써만 생겨난다. 네가 매일 한 사람씩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네가, 매일 또는 매주, 동료 가운데 한 사람씩 더 이해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것이 너의 역량의 한계라면, 너는 분명히 사회화돼갈 것이고, 너의 인격을 진정으로 영성화시켜갈 것이다. 사랑은 전염성이 있으며, 인간의 헌신이 지성적이고 현명할 때에는, 사랑이 미움보다 더 매력 있다. 그러나 참되고 이타적인 사랑만이 정말로 전염된다. 각 사람이 역동적 애정의 중심점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랑이라는 이 친절한 바이러스는 곧 인류의 다정다감한 감정_흐름에 널리 침투하여, 모든 문명 세계가 사랑으로 휩싸이고, 사람의 형제관계가 실현되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5. 회심과 신비주의
100:5.1 세상에는 길 잃은 혼들이 가득한데, 그들은 신학적 감각에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방향지시 면에서 길을 잃었고, 좌절감을 느끼는 철학 시대의 이론과 종파들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한다. 종교 권세에 복종하는 대신, 어떻게 삶의 철학을 세우는지를 배운 사람이 너무 적다. (강바닥이 강은 아닐지라도, 성장의 경로인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100:5.2 종교적 성장의 진보는,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서 조화로, 불확실성으로부터 확신하는 신앙으로, 혼돈 된 시공우주 의식으로부터 인격 통합으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속박된 상태로부터 신성한 아들신분의 해방으로 이끈다.
100:5.3 최고의 이상{理想}에 대한 충성심의 고백--곧 하나님을_의식함을 심령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깨달음--은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성장일지도 모르며, 아니면 위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시점에서 때때로 체험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그 중대한 날에, 바로 그런 갑작스럽고 장엄한 회심을 체험했다. 가우타마 싯다르타는, 홀로 앉아서 궁극적 진리의 신비를 꿰뚫어보고자 하던 그 밤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여러 다른 사람도 유사한 체험을 했으며, 갑작스런 회심 없이 영적 진보를 이룩한 참된 신자도 많이 있었다.
100:5.3 최고의 이상{理想}에 대한 충성심의 고백--곧 하나님을_의식함을 심령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깨달음--은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성장일지도 모르며, 아니면 위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시점에서 때때로 체험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그 중대한 날에, 바로 그런 갑작스럽고 장엄한 회심을 체험했다. 가우타마 싯다르타는, 홀로 앉아서 궁극적 진리의 신비를 꿰뚫어보고자 하던 그 밤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여러 다른 사람도 유사한 체험을 했으며, 갑작스런 회심 없이 영적 진보를 이룩한 참된 신자도 많이 있었다.
100:5.4 소위 종교적 회심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된 극적 현상 대부분은 본질상 완전히 심리적인 것이었으나, 때로는 영적으로 기원되는 체험이 일어나기도 한다. 영 달성을 향해서 심령적으로 상승하여 도달하는 어떤 수준에서든지 절대로 온전히 정신을 기울일 때, 즉 신성한 개념에 인간이 충성하는 동기가 완벽할 때에는, 믿는 그 필사자의 초의식적 정신이 갖는, 집중되고 정화된 목적에 동조하려고, 내주하는 영이 갑자기 내려와서_잡아채는 현상이 무척 자주 발생한다. 그리고 순전히 심리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요소들 속에서 회심을 성립시키는 것은, 바로 지적 현상과 영적 현상을 통합하는 그런 체험이다.
100:5.5 그러나 감정 자체만으로는 잘못된 회심이며; 느낌뿐 아니라 신앙도 가져야한다. 그런 심령 활성화가 불완전한 만큼, 그리고 그런 인간적_충성심의 동기부여가 미완성인 한, 회심 체험은 그 정도까지, 지적 실체와, 감정적 실체와, 영적 실체의 혼합이 될 것이다.
100:5.5 그러나 감정 자체만으로는 잘못된 회심이며; 느낌뿐 아니라 신앙도 가져야한다. 그런 심령 활성화가 불완전한 만큼, 그리고 그런 인간적_충성심의 동기부여가 미완성인 한, 회심 체험은 그 정도까지, 지적 실체와, 감정적 실체와, 영적 실체의 혼합이 될 것이다.
100:5.6 다른 면에서 통합된 지적 생활에 실제로 작용하는 전제{前提}로서, 이론적 잠재의식 정신을 인정하고 싶다면,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비슷한 영역인, 더 높은 지적 활동이 있는 초의식 수준을 가정해야하는데, 이 초의식 수준은, 내주하는 영 실재, 즉 사고 조율사와 바로 접촉할 수 있는 지대다. 이런 모든 심령적 고찰에서 큰 위험성은, 색다른 꿈을 포함해서 환상과 소위 신비로운 체험이라고 불리는 그것들이, 인간 정신에게 주는 신{神}의 전언{傳言}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시절에, 신성한 존재들은, 하나님을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그들이 신비로운 황홀경이나 병적 환상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100:5.7 회심을_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사고 조율사와 접촉할 수 있는 모론시아 지대에 더 잘 접근하는 방법은, 생생한 신앙과 진지한 경배, 즉 전심으로 하는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하는 방법이다. 인간 정신의 무의식 수준에서 급격히 솟아오르는 기억들 가운데 허다한 것이, 신의 계시나 영의 인도라고 잘못 생각돼왔다.
100:5.8 종교적 백일몽{白日夢}의 습관적 실행과 관련하여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신비주의는 때로 참된 영적 교류의 수단이었지만, 현실을 도피하는 기법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바쁜 현장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 아닐지 모르지만, 인격이 긴 기간 고립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망상적 의식{意識}의 무아지경 상태가 종교 체험으로 장려돼서는 안 된다.
100:5.9 신비스런 상태의 특질은, 비교적 수동적인 지능에 작용하면서 관심이 집중되는 선명한 격리지대들과 함께 의식이 산만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초의식인 영적 접촉 지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을 향해서 의식을 끌어내린다. 많은 신비주의자가, 정신 징후가 비정상으로 나타나는 수준까지 자신의 정신적 분리를 몰아갔다.
100:5.10 영적 명상 가운데 좀 더 건전한 태도는, 사려 깊은 경배와 감사드리는 기도에서 발견돼야한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후반에 일어났던 것처럼, 자신의 사고 조율사와 직접 교류하는 것을, 이른바 이 신비 체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비스런 교류의 개시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런 심령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비 상태는: 육체의 피로, 금식, 심령적 분리, 깊은 심미적 체험, 강렬한 성욕, 두려움, 불안, 분노, 그리고 격렬한 춤 등으로 촉진된다. 그런 예비적 준비 결과로 나타나는 부산물들 대부분은 잠재의식 정신에서 기원된다.
100:5.11 신비 현상이 일어날 조건이 아무리 호의적이더라도, 나사렛 예수께서는 낙원 아버지와 교류하기 위하여 그런 방법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이해해야한다. 예수께서는 잠재의식의 망상 또는 초의식의 환상을 겪지 않았다.
6. 종교 생활의 징후
100:6.1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는 방법이 뚜렷이 다를지 몰라도, 동기는 매우 비슷하다. 종교는 생명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며; 오히려 삶의 방식이다. 참 종교는 종교인이 자신에게,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하여, 최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실체에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의 뚜렷한 특질은: 최상의 가치기준에 의심 없이 충성하고,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최상의 가치에 대한 이런 종교적 헌신은, 신앙심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서, 그리고 비종교인들이 지지하는 운동에 열심히 충성을 바치는 데서 나타난다.
100:6.2 종교인이 용납하는 최고의 가치는, 저속하든지 거짓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종교적이다. 최상이라고 여겨지는 가치가 진짜 영적 값어치를 지닌 시공우주 실체인 바로 그 한도까지, 종교는 정말로 참되다.
100:6.3 인간이 종교적 충동에 반응하는 징후는 고귀하고 웅장한 특성을 띤다. 진지한 종교인은, 우주 시민임을 의식하고, 초인적 능력의 근원과 접촉함을 자각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뛰어나고 고상한 교제에 소속된다는 확신으로 감격하고 활력을 얻는다. 가장 높은 우주 목표--곧 최상의 목표--를 탐색하려는 충동으로 인해 자아의_가치를 더욱 의식{意識}하게 된다.
100:6.4 자아는, 전부_포함하는 동기로 인한 흥미로운 충동에 굴복했으며, 그 동기는 강화된 자아_훈련을 강요하고, 감정의 갈등을 줄여주고, 필사자의 생애를 정말로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준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병적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 및 초우주 목표를 달성하려는 도덕적 결정과 영적 열망과 관련하여, 필사자의 결점을 자연스럽게 의식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초인적 이상{理想}을 달성하려는 열정적인 이 노력의 특징은 반드시, 인내, 관용, 꿋꿋함, 및 아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100:6.5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살아있는 사랑, 즉 봉사하는 인생이다. 종교인이 순전히 현세적이고 진부한 많은 것들로부터 초연함은 결코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며, 그 초연함이 유머 감각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실존으로부터 아무 것도 빼앗지 않고, 오히려 인생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며; 새 유형의 열정과 열심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군의 기풍까지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이것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리고 인간이 충성하는 평범한 사회적 책무에 성실히 헌신함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극도로 위험하다.
100:6.6 종교 생활의 가장 놀랄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역동적이고 숭고한 평화인데, 이 평화는 모든 인간을 이해시키는, 즉 모든 의심과 혼란이 없음을 나타내는 시공우주의 균형이다. 그런 수준의 영적 안정성이 실망의 원인을 제거해준다. 그런 종교인은, “내가 확신하나니,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밖에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100:6.7 승리하는 영광을 실현하는 것과 관련된 보호받는 느낌이 있는데, 이런 느낌은 지존자의 실체를 파악한, 그리고 궁극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의식에 내재한다.
100:6.8 심지어 진화 종교도 충성심과 숭고함에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되는데, 그 종교가 참된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참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훌륭하다. 영적 선견지명이 증대됨으로 생기는 새로운 충성심은, 새로운 수준의 사랑과 헌신, 즉 봉사와 교제를 창출하며; 증진시킨 이 모든 사회적 전망은,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사람이 형제관계인 것을 더욱 크게 의식하게 한다.
100:6.9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 사이의 독특한 차이점은 새로운 특성의 신성한 지혜인데, 이 지혜는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덧붙여진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들 안에서, 그리고 그 종교들과 함께 얻은 체험은, 더 한층 증여하는 신성한 지혜와 시공우주 통찰력을 차후에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100:7.1 유란시아의 보통 필사자는, 나사렛 예수께서 육체 속에 머무는 동안에 획득한, 그 완벽한 성품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없겠으나, 필사 신자는 누구든지, 예수의 인간성이 완전하게 된 계통을 따라서, 강력하고 통합된 인간성을 개발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주님의 인격자의 독특한 특색은, 그 인격자의 완전성보다는 대칭성, 즉 그 인격자의 절묘하고 균형 잡힌 통합이었다. 예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어떤 사람의 예인데, 그는 예수를 고소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님을 향하여 손짓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다.
100:7.2 예수의 끊임없는 친절이 사람의 가슴을 감동시켰지만, 신념이 굳은 그의 강력한 성품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정말로 진실했으며; 그의 안에는 위선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는 허식{虛飾}이 없었으며; 항상 매우 참신한 진실됨이 있었다. 겉치레로 자신을 낮춘 적이 없었고, 결코 체면 차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진리를 실천했다. 그가 바로 진리였다. 구원하는 진리를 그의 세대에게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실했다.
100:7.3 그러나 주님은 무척 이성적이었고, 무척 사귀기 쉬운 분이었다. 그는 어떤 섬김을 베풀든지 대단히 실용적이었으며, 한편 그의 모든 계획은 정당하다고 인정된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기형적이거나, 불규칙적이거나, 괴벽스런 모든 경향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변덕스럽거나 유별나거나 병적으로 흥분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어떤 가르침이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항상 비범한 예의바름과 관련된 절묘한 분별이 있었다.
100:7.4 사람의 아들은 항상 무척 침착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를 대적하는 적들도 그에게 진지한 존경심을 보였으며; 그가 나타나는 것을 무서워하기조차 했다. 예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성한 열정으로 가득 찼지만, 결코 광신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적극적이었으나 결코 경솔하지 않았다. 상상력이 풍부했으나 언제나 실용적이었다. 인생의 실체를 솔직하게 대면했으나, 결코 침체되거나 단조롭지 않았다. 용감했으나 무모하지 않았으며; 신중하면서도 비열하지 않았다. 연민의 정이 깊었으나 감상적이지 않았으며; 독특했지만 괴벽스럽지 않았다. 경건하면서도 거룩한 척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우 침착했는데, 아주 완전하게 통합됐기 때문이다.
100:7.5 예수의 독창성은 억압되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편협한 인습에 사로잡힘으로 방해받지 않았다. 확실한 자신감으로 말씀했고, 완전한 권세로 가르쳤다. 그러나 훌륭한 독창성이 있었어도, 그의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의 교훈에 들어있는 진리의 보배를 경시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의 교훈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두려움과 제물 대신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었다.
100:7.6 예수께서는 대단히 폭넓은 견해를 가졌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추종자들에게 간곡히 타일렀다. 그에게는 편협함이 없었다. 그의 동정적 심성은, 온 인류, 심지어 한 우주까지 포용했다. 그는 항상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초청했다.
100:7.7 예수의 경우에,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 정말로 맞는 말이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가장 숭고하게 신뢰했다. 어린아이가 육신의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아버지를 신뢰했다. 그의 신앙은 완전했지만 오만한 적이 결코 없었다. 가혹한 자연현상이 어떻게 밀려오든지, 또는 사람의 이 세상 복지에 얼마나 무관심하든지, 예수께서는신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실망당할 염려가 없었고 박해에 영향 받지 않았다. 그는 외견상 실패에 흔들리지 않았다.
100:6.4 자아는, 전부_포함하는 동기로 인한 흥미로운 충동에 굴복했으며, 그 동기는 강화된 자아_훈련을 강요하고, 감정의 갈등을 줄여주고, 필사자의 생애를 정말로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준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병적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 및 초우주 목표를 달성하려는 도덕적 결정과 영적 열망과 관련하여, 필사자의 결점을 자연스럽게 의식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초인적 이상{理想}을 달성하려는 열정적인 이 노력의 특징은 반드시, 인내, 관용, 꿋꿋함, 및 아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100:6.5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살아있는 사랑, 즉 봉사하는 인생이다. 종교인이 순전히 현세적이고 진부한 많은 것들로부터 초연함은 결코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며, 그 초연함이 유머 감각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실존으로부터 아무 것도 빼앗지 않고, 오히려 인생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며; 새 유형의 열정과 열심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군의 기풍까지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이것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리고 인간이 충성하는 평범한 사회적 책무에 성실히 헌신함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극도로 위험하다.
100:6.6 종교 생활의 가장 놀랄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역동적이고 숭고한 평화인데, 이 평화는 모든 인간을 이해시키는, 즉 모든 의심과 혼란이 없음을 나타내는 시공우주의 균형이다. 그런 수준의 영적 안정성이 실망의 원인을 제거해준다. 그런 종교인은, “내가 확신하나니,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밖에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100:6.7 승리하는 영광을 실현하는 것과 관련된 보호받는 느낌이 있는데, 이런 느낌은 지존자의 실체를 파악한, 그리고 궁극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의식에 내재한다.
100:6.8 심지어 진화 종교도 충성심과 숭고함에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되는데, 그 종교가 참된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참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훌륭하다. 영적 선견지명이 증대됨으로 생기는 새로운 충성심은, 새로운 수준의 사랑과 헌신, 즉 봉사와 교제를 창출하며; 증진시킨 이 모든 사회적 전망은,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사람이 형제관계인 것을 더욱 크게 의식하게 한다.
100:6.9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 사이의 독특한 차이점은 새로운 특성의 신성한 지혜인데, 이 지혜는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덧붙여진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들 안에서, 그리고 그 종교들과 함께 얻은 체험은, 더 한층 증여하는 신성한 지혜와 시공우주 통찰력을 차후에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7. 종교 생활의 절정
100:7.1 유란시아의 보통 필사자는, 나사렛 예수께서 육체 속에 머무는 동안에 획득한, 그 완벽한 성품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없겠으나, 필사 신자는 누구든지, 예수의 인간성이 완전하게 된 계통을 따라서, 강력하고 통합된 인간성을 개발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주님의 인격자의 독특한 특색은, 그 인격자의 완전성보다는 대칭성, 즉 그 인격자의 절묘하고 균형 잡힌 통합이었다. 예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어떤 사람의 예인데, 그는 예수를 고소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님을 향하여 손짓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다.
100:7.2 예수의 끊임없는 친절이 사람의 가슴을 감동시켰지만, 신념이 굳은 그의 강력한 성품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정말로 진실했으며; 그의 안에는 위선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는 허식{虛飾}이 없었으며; 항상 매우 참신한 진실됨이 있었다. 겉치레로 자신을 낮춘 적이 없었고, 결코 체면 차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진리를 실천했다. 그가 바로 진리였다. 구원하는 진리를 그의 세대에게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실했다.
100:7.3 그러나 주님은 무척 이성적이었고, 무척 사귀기 쉬운 분이었다. 그는 어떤 섬김을 베풀든지 대단히 실용적이었으며, 한편 그의 모든 계획은 정당하다고 인정된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기형적이거나, 불규칙적이거나, 괴벽스런 모든 경향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변덕스럽거나 유별나거나 병적으로 흥분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어떤 가르침이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항상 비범한 예의바름과 관련된 절묘한 분별이 있었다.
100:7.4 사람의 아들은 항상 무척 침착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를 대적하는 적들도 그에게 진지한 존경심을 보였으며; 그가 나타나는 것을 무서워하기조차 했다. 예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성한 열정으로 가득 찼지만, 결코 광신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적극적이었으나 결코 경솔하지 않았다. 상상력이 풍부했으나 언제나 실용적이었다. 인생의 실체를 솔직하게 대면했으나, 결코 침체되거나 단조롭지 않았다. 용감했으나 무모하지 않았으며; 신중하면서도 비열하지 않았다. 연민의 정이 깊었으나 감상적이지 않았으며; 독특했지만 괴벽스럽지 않았다. 경건하면서도 거룩한 척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우 침착했는데, 아주 완전하게 통합됐기 때문이다.
100:7.5 예수의 독창성은 억압되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편협한 인습에 사로잡힘으로 방해받지 않았다. 확실한 자신감으로 말씀했고, 완전한 권세로 가르쳤다. 그러나 훌륭한 독창성이 있었어도, 그의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의 교훈에 들어있는 진리의 보배를 경시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의 교훈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두려움과 제물 대신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었다.
100:7.6 예수께서는 대단히 폭넓은 견해를 가졌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추종자들에게 간곡히 타일렀다. 그에게는 편협함이 없었다. 그의 동정적 심성은, 온 인류, 심지어 한 우주까지 포용했다. 그는 항상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초청했다.
100:7.7 예수의 경우에,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 정말로 맞는 말이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가장 숭고하게 신뢰했다. 어린아이가 육신의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아버지를 신뢰했다. 그의 신앙은 완전했지만 오만한 적이 결코 없었다. 가혹한 자연현상이 어떻게 밀려오든지, 또는 사람의 이 세상 복지에 얼마나 무관심하든지, 예수께서는신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실망당할 염려가 없었고 박해에 영향 받지 않았다. 그는 외견상 실패에 흔들리지 않았다.
100:7.8 그는 사람들을 형제로서 사랑했고, 동시에 그들의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특성이 어떻게 다른지 헤아렸다. “그는 부지런히 선을 행하셨다.”
100:7.9 예수께서는 유별나게 쾌활한 사람이었으나,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늘 훈계한 말씀은, “활기찬 기분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런 확신 있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사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감동적으로 인정이 많았는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신념에 항상 진실했고, 아버지 뜻을 행하기에 헌신하는 동안, 당당하게 견고했다.
100:7.10 주님은 항상 관대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기를 늘 즐거워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또한, 끝없이 모든 관용을 베풀면서도, 결코 낭비하거나 지나치지 않았다. 너희가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한다고 가르쳤다.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다.”
100:7.11 그는 솔직했지만 항상 친절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숨김없었지만, 항상 친근했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울 만큼 솔직하면서도, 그는 어김없이 공평했다.
100:7.12 예수께서는 가끔 인간적 슬픔의 잔을 진하게 마시기도 했지만, 변함없이 쾌활했다. 실존하는 실체에 담대히 대면했고, 더욱이 천국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열정을 통제했으며; 열정이 그를 통제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일”에 무제한 헌신했다. 이런 신성한 열정 때문에, 영적이지 못한 형제들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으나, 지켜보던 온 우주는, 그를 온전한 사람의 본보기라고, 그리고 영적 삶의 고상한 표준에 헌신한 고귀한 인간 원형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의 통제된 열정은 전염성 있었으며; 동역자들은 그의 신성한 낙관주의를 나눠가질 수밖에 없었다.
100:7.13 이 갈릴리 사람은 슬픔에 잠긴 한 남자가 아니었으며; 기쁨이 넘치는 혼이었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고 늘 말씀했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할 때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깔린 골짜기”를 기꺼이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는 유쾌했지만 동시에 겸손했다.
100:7.9 예수께서는 유별나게 쾌활한 사람이었으나,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늘 훈계한 말씀은, “활기찬 기분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런 확신 있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사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감동적으로 인정이 많았는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신념에 항상 진실했고, 아버지 뜻을 행하기에 헌신하는 동안, 당당하게 견고했다.
100:7.10 주님은 항상 관대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기를 늘 즐거워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또한, 끝없이 모든 관용을 베풀면서도, 결코 낭비하거나 지나치지 않았다. 너희가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한다고 가르쳤다.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다.”
100:7.11 그는 솔직했지만 항상 친절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숨김없었지만, 항상 친근했다.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울 만큼 솔직하면서도, 그는 어김없이 공평했다.
100:7.12 예수께서는 가끔 인간적 슬픔의 잔을 진하게 마시기도 했지만, 변함없이 쾌활했다. 실존하는 실체에 담대히 대면했고, 더욱이 천국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열정을 통제했으며; 열정이 그를 통제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일”에 무제한 헌신했다. 이런 신성한 열정 때문에, 영적이지 못한 형제들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으나, 지켜보던 온 우주는, 그를 온전한 사람의 본보기라고, 그리고 영적 삶의 고상한 표준에 헌신한 고귀한 인간 원형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의 통제된 열정은 전염성 있었으며; 동역자들은 그의 신성한 낙관주의를 나눠가질 수밖에 없었다.
100:7.13 이 갈릴리 사람은 슬픔에 잠긴 한 남자가 아니었으며; 기쁨이 넘치는 혼이었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고 늘 말씀했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할 때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깔린 골짜기”를 기꺼이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는 유쾌했지만 동시에 겸손했다.
100:7.14 그의 용기는 그의 인내심에 못지않았다. 시기상조임에도 행동하라고 압력을 받았을 때, 오직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으며; 그의 침착성은 탁월했다. 그러나 종종 악에 분개했고, 죄를 참지 못했다.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항하도록, 강하게 감동된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그의 의분{義憤}은 결코 그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7.15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 말라”였다. 그의 용감성은 고상했고 그의 용기는 종종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분별력과 연결됐고, 이성으로 통제됐다. 그 용기는 신앙으로 말미암는 용기였고, 아무렇게나 확신하는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용감했으나, 결코 주제넘지 않았다.
100:7.16 주님은 공경의 본보기였다. 젊었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로 시작했다. 동료의 그릇된 경배조차 존중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거나 인간의 잘못된 믿음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참된 거룩함을 존중했으나, 동료에게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온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
100:7.17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하셨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는 어린아이와 친하게 사귀었다. 개인 생활에서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그럼에도 한 우주에서 온전하게 된 사람이었다. 동역자들은 자발적으로 그를 주님이라고 불렀다.
100:7.18 예수께서는 완전히 통합된 인격체였다. 그리고 그는,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오늘날 인간의 체험을 계속 통합시키고 있으며, 인간의 노력을 조화시키고 있다. 삶을 통합시키고, 성품을 고상하게 하고, 체험을 단순화시킨다. 그는 인간 정신에 들어가서 그 정신을 증진시키고 변형시키고 변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으면, 누구든지 새 피조물이요;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됐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참되다.
100:7.19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제시했음]
100:7.15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 말라”였다. 그의 용감성은 고상했고 그의 용기는 종종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분별력과 연결됐고, 이성으로 통제됐다. 그 용기는 신앙으로 말미암는 용기였고, 아무렇게나 확신하는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용감했으나, 결코 주제넘지 않았다.
100:7.16 주님은 공경의 본보기였다. 젊었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로 시작했다. 동료의 그릇된 경배조차 존중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거나 인간의 잘못된 믿음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참된 거룩함을 존중했으나, 동료에게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온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
100:7.17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하셨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는 어린아이와 친하게 사귀었다. 개인 생활에서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그럼에도 한 우주에서 온전하게 된 사람이었다. 동역자들은 자발적으로 그를 주님이라고 불렀다.
100:7.18 예수께서는 완전히 통합된 인격체였다. 그리고 그는,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오늘날 인간의 체험을 계속 통합시키고 있으며, 인간의 노력을 조화시키고 있다. 삶을 통합시키고, 성품을 고상하게 하고, 체험을 단순화시킨다. 그는 인간 정신에 들어가서 그 정신을 증진시키고 변형시키고 변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으면, 누구든지 새 피조물이요;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됐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참되다.
100:7.19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제시했음]
◀제99편 종교의 사회적 문제 ∥ 제101편 종교의 진짜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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