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 속에는 잔을 옮기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를 묻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과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였고 그리하여 그 죽음을 모면하려고 아버지께 기도하였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만약에 그 해석이 맞는다면, 예수님은 아주 분명한 거짓말장이이며, 더 심하게 표현하면 '사기꾼'이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 적어도 3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여 장사된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면,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해 놓고, 결정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니 오직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그 죽음을 모면하려고 땀 방울이 피 방울 되는 듯이 그토록 처절하게 기도하였다면, 그 예수의 말씀을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있으며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진정한 사람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느낌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기도 속에는 무언가 심오한 어떤 의미와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잔"의 의미가 무엇인가? 오직 "고난의 잔"인가? 오직 심판에 따른 진노를 의미할 뿐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앞에 언급한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다른 "잔"의 의미가 있다.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욥기, 에스겔, 하박국 등 여러 곳에 "진노의 잔"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시편 116:13에는 "구원의 잔"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을 마신다"는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육신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구원과 진노의 심판이 완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그 당시 입장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이제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부활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과 진노의 계획이 완결되는 것이다. 십나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순간이 바로 눈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남겨진 구원 사역을 제자들에게 넘겨주고 예수님은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셔야만 된다. 그런데, 3년 이상이나 가르치고 함께 생활하였던 제자들은 여전히 준비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12 사도들 중 하나는 자신을 배반하여 적에게 팔아버렸다. 다른 11명도 "내가 팔 자입니까?"라고 주님께 물어볼 정도로 신앙이 온전치 못하였다. 가장 앞장서고 큰 소리 치는 베드로는 곧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적에게 붙잡히게 되면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게 되어 있다. 자,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판단은 무엇일까? 물론 이 순간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이루어 왔지만, 이 절체절명의 "때"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분명한 뜻이 확인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하고 행하였다. 그렇다면, 구원과 진노가 완결되는 이 "때"야말로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게 일치되는지에 대해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응답을 앋기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이다. "지금이 그 때입니까? 지금이 그 때라면,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염려를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인간의 한탄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죽음을 모면해보려고 아버지께 매달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 기도는 아버지의 뜻 앞에 심판과 구원의 때에 대한 자신의 뜻을 완전하게 맞추는 위대하고도 장엄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응답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2천 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인 것이다.(K)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 속에는 잔을 옮기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를 묻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과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였고 그리하여 그 죽음을 모면하려고 아버지께 기도하였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만약에 그 해석이 맞는다면, 예수님은 아주 분명한 거짓말장이이며, 더 심하게 표현하면 '사기꾼'이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 적어도 3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여 장사된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면,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해 놓고, 결정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니 오직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그 죽음을 모면하려고 땀 방울이 피 방울 되는 듯이 그토록 처절하게 기도하였다면, 그 예수의 말씀을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있으며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진정한 사람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느낌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기도 속에는 무언가 심오한 어떤 의미와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잔"의 의미가 무엇인가? 오직 "고난의 잔"인가? 오직 심판에 따른 진노를 의미할 뿐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앞에 언급한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다른 "잔"의 의미가 있다.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욥기, 에스겔, 하박국 등 여러 곳에 "진노의 잔"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시편 116:13에는 "구원의 잔"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을 마신다"는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육신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구원과 진노의 심판이 완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그 당시 입장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이제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부활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과 진노의 계획이 완결되는 것이다. 십나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순간이 바로 눈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남겨진 구원 사역을 제자들에게 넘겨주고 예수님은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셔야만 된다. 그런데, 3년 이상이나 가르치고 함께 생활하였던 제자들은 여전히 준비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12 사도들 중 하나는 자신을 배반하여 적에게 팔아버렸다. 다른 11명도 "내가 팔 자입니까?"라고 주님께 물어볼 정도로 신앙이 온전치 못하였다. 가장 앞장서고 큰 소리 치는 베드로는 곧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적에게 붙잡히게 되면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게 되어 있다. 자,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판단은 무엇일까? 물론 이 순간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이루어 왔지만, 이 절체절명의 "때"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분명한 뜻이 확인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하고 행하였다. 그렇다면, 구원과 진노가 완결되는 이 "때"야말로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게 일치되는지에 대해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응답을 앋기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이다. "지금이 그 때입니까? 지금이 그 때라면,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염려를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인간의 한탄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죽음을 모면해보려고 아버지께 매달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 기도는 아버지의 뜻 앞에 심판과 구원의 때에 대한 자신의 뜻을 완전하게 맞추는 위대하고도 장엄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응답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2천 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인 것이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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