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와 '진리'
'종교'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 "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능력을 믿고 숭배하여 삶의 평안을 추구하는 정신문화의 한 갈래"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영어로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 'religio'로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외경심과 의례(儀禮)행위"라는 뜻이다. 또한 한자어인 '종교(宗敎)'도 하늘을 뜻하는 갓머리 아래 3개의 다리를 가진 상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형상인 보일 시(示)를 써서 가르칠 교(敎)자와 결합하여 "하늘을 경배하는 으뜸 되는 이치를 가르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종교 구성의 3요소는 신앙의 대상, 신념체계, 종교집단(성직자와 신도로 구성)이며 그 위에 종교의례와 계율 등을 갖춘다. 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모든 민족과 문화에서 볼 수 있으며 고대일수록 정치나 예술 등 사회의 전 영역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 궁극적 가치체계가 되었다. 종교의 일반적 기능은 현실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인류의 문화 또는 문명과 함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물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민족마다 나라마다 또는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공통점이 있는,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일무이한 절대적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보편타당한 참 진리"의 단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직접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초로 삼는 기독교는 이러한 자연발생적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문화와 혼합된 체계를 갖추어 온 면에서 볼 때 '종교'의 형태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현대를 '종교다원주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모든 문화와 문명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종교' 역시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해야만 한다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특히 근자에 나라들 또는 민족들 간의 반목과 투쟁이 상당히 종교적인 갈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에서 슬로건으로 삼는 주제는 "어느 방향이나 길을 오르든지 결국 산꼭대기에 이르면 되는 것 가인가?"라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멋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리고 근본적인 면이나 입장에서는 서로 자신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 자세들을 볼 때, 그 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이미 그 꼭대기가 다르게 정해진, 서로 다른 산을 각 종교들이 올라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종교가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설령 꼭대기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그 종교의 근본을 이해하고 모든 결과물들을 지식적으로 전부 이해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그 종교의 최고 경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각 종교가 올라간 산꼭대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산꼭대기에 서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용납하자고 외칠지라도, 그것을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인간의 또 다른 헛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줄 뿐이며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출발점부터 존재한다. 각 종교들은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길이 달랐다. 추구하는 목적과 중간목표들이 다르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당연히 서로 합쳐지기에 불가능한 큰 계곡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게 될 뿐이다. 산봉우리가 하나이고 출발선이 같았다면, 중간에 올라가는 길이 동쪽 능선이든지 서쪽 계곡길이든지 상관없이 결국 모두가 산봉우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가 하나의 '주의/ism'으로써가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생명력 있는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각 종교들마다 동일한 목적 또는 추구하는 바를 향하여 다시 출발해야만 한다. 그 목적지는 어디인가?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참 진리'가 되어야만 한다. 종교를 추구하고 따라간 결과가 '참 진리'가 아닌 허상 또는 허구에 불과하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자기만이 그 '참 진리'를 배타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절대적인 그 '신격' 앞에서 진지한 '진리 탐구자'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한참 앞서가고 있는 달리기 선수와 반대로 한참 뒤쳐진 선수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결승점에 서 있는 심판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는 선수'와 '결승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선수'의 차이가 있을 뿐이듯이,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참 진리'이신 그 '신격'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방향이 똑바로 되어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만 있을 뿐일 것이다.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참 진리'이신 그 '신격'을 어떤 이름으로 표현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이름'은 피조물인 인간이 붙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분을 향한 진지하게 열린 마음과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열정 그리고 깨달은 바를 행함으로 실천하는 신앙심이 기본적으로 요구될 뿐이다. 그 '신격'은 인간이 스스로 발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실체이다. 오직 '계시'의 방편을 통해서 알려지고 증명되어야 한다. 그 '신격, 그 '참 진리' 앞에서, 모든 나라와 민족들, 모든 문화와 문명들, 그리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사고(思考)의 자세들이 하나의 산봉우리 즉 '참 진리'를 향하여 다시 새롭게 출발선에 서야만 할 것이다.(K)
'종교'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 "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능력을 믿고 숭배하여 삶의 평안을 추구하는 정신문화의 한 갈래"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영어로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 'religio'로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외경심과 의례(儀禮)행위"라는 뜻이다. 또한 한자어인 '종교(宗敎)'도 하늘을 뜻하는 갓머리 아래 3개의 다리를 가진 상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형상인 보일 시(示)를 써서 가르칠 교(敎)자와 결합하여 "하늘을 경배하는 으뜸 되는 이치를 가르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종교 구성의 3요소는 신앙의 대상, 신념체계, 종교집단(성직자와 신도로 구성)이며 그 위에 종교의례와 계율 등을 갖춘다. 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모든 민족과 문화에서 볼 수 있으며 고대일수록 정치나 예술 등 사회의 전 영역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 궁극적 가치체계가 되었다. 종교의 일반적 기능은 현실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인류의 문화 또는 문명과 함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물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민족마다 나라마다 또는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공통점이 있는,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일무이한 절대적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보편타당한 참 진리"의 단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직접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초로 삼는 기독교는 이러한 자연발생적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문화와 혼합된 체계를 갖추어 온 면에서 볼 때 '종교'의 형태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현대를 '종교다원주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모든 문화와 문명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종교' 역시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해야만 한다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특히 근자에 나라들 또는 민족들 간의 반목과 투쟁이 상당히 종교적인 갈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에서 슬로건으로 삼는 주제는 "어느 방향이나 길을 오르든지 결국 산꼭대기에 이르면 되는 것 가인가?"라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멋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리고 근본적인 면이나 입장에서는 서로 자신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 자세들을 볼 때, 그 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이미 그 꼭대기가 다르게 정해진, 서로 다른 산을 각 종교들이 올라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종교가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설령 꼭대기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그 종교의 근본을 이해하고 모든 결과물들을 지식적으로 전부 이해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그 종교의 최고 경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각 종교가 올라간 산꼭대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산꼭대기에 서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용납하자고 외칠지라도, 그것을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인간의 또 다른 헛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줄 뿐이며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출발점부터 존재한다. 각 종교들은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길이 달랐다. 추구하는 목적과 중간목표들이 다르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당연히 서로 합쳐지기에 불가능한 큰 계곡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게 될 뿐이다. 산봉우리가 하나이고 출발선이 같았다면, 중간에 올라가는 길이 동쪽 능선이든지 서쪽 계곡길이든지 상관없이 결국 모두가 산봉우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가 하나의 '주의/ism'으로써가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생명력 있는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각 종교들마다 동일한 목적 또는 추구하는 바를 향하여 다시 출발해야만 한다. 그 목적지는 어디인가?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참 진리'가 되어야만 한다. 종교를 추구하고 따라간 결과가 '참 진리'가 아닌 허상 또는 허구에 불과하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자기만이 그 '참 진리'를 배타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절대적인 그 '신격' 앞에서 진지한 '진리 탐구자'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한참 앞서가고 있는 달리기 선수와 반대로 한참 뒤쳐진 선수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결승점에 서 있는 심판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는 선수'와 '결승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선수'의 차이가 있을 뿐이듯이,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참 진리'이신 그 '신격'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방향이 똑바로 되어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만 있을 뿐일 것이다.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참 진리'이신 그 '신격'을 어떤 이름으로 표현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이름'은 피조물인 인간이 붙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분을 향한 진지하게 열린 마음과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열정 그리고 깨달은 바를 행함으로 실천하는 신앙심이 기본적으로 요구될 뿐이다. 그 '신격'은 인간이 스스로 발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실체이다. 오직 '계시'의 방편을 통해서 알려지고 증명되어야 한다. 그 '신격, 그 '참 진리' 앞에서, 모든 나라와 민족들, 모든 문화와 문명들, 그리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사고(思考)의 자세들이 하나의 산봉우리 즉 '참 진리'를 향하여 다시 새롭게 출발선에 서야만 할 것이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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