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2:24-34,39-46
(24)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신앙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기도와 경배”다.
성도의 기도 목록을 보면, 대개 “내가 원하는 ~을 주십시오” 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을 해주십시오”인 것 같다. 아버지 뜻을 묻는 내용은 기도 말미에 잠깐 내비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도 목록은 “아버지 뜻”이 아니라 “내 뜻”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결국에는 내 뜻을 향해 하나님을 끊임없이 끌어내리게 된다. 이런 사람이 두 세 명만 모여도 “누구 기도가 더 응답됐나?”를 따지게 되므로 24절처럼 결국 시기와 질투와 다툼으로 세월을 허송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이 예수의 신앙을 본받은 결과인가?
그들에 대한 예수의 기도 내용이 32절에 기록돼 있는데, 제자들의 관심사와 예수의 신앙이 너무나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혹시 예수의 그것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먼저, “기도”와 “간구”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간구 asking”는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인 반면, “기도 prayer”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소통함 즉 하나님과의 대화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앞에서 말한 “성도의 기도 목록”은 “기도”가 아니라 “간구”로 시작하고 “간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물론, 간구도 해야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의 신앙은 “간구”에 집중됐는가? 아니면 “기도”에 집중됐는가?
32절과 41절은 예수가 “기도했다”고 돼 있다. 41절의 경우 본문에서는 한 번 기도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은 세 번 기도한 것으로 돼 있다. 영적으로 3은 완전 숫자를 의미한다고 볼 때,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한 대화를 이뤘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 내용은 아래의 세 가지로 축약될 수 있겠다:
(1)“내가 지금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 뜻이군요.”
(2)“그것을 내가 하겠습니다.”
(3)“내가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들 예수는 아버지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 그리고 43절에서 보듯이 아버지가 도와주셨다. 이 내용에서, 성도의 기도 목록과 너무나 대조가 되고 또한 순서도 반대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향해 자신을 끌어올리는” 진정한 기도였고, 자신의 뜻을 자연스레 잊어버리는 “경배”의 수준까지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경배”는 무엇일까? 우리가 교회당에 가서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드리는 예배인가? 진정한 “경배”는 아버지 뜻에 나를 맞춰가면서 나를 잊는 경지에 들어갈 때 비로소 시작된다. 예수의 기도와 경배가 바로 그 수준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는 기쁨과 감격을 맛봤고, 아버지의 도우심 가운데 당당하게 십자가를 짐으로써 “다 이뤘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이 세상 성공에 머무는 간구, 또는 나를 대신한 능력자의 간구에 의존하는 태도는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누구든지 예수의 기도와 경배를 맛보고자 한다면, 각자 개인이,
첫째로, “아버지의 뜻”을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얼마나 기도하면 깨닫게 될까?
둘째로, 그 뜻의 완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얼마나 기도하면 찾을 수 있을까?
셋째로, 아버지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얼마나 기도하면 계속 진행할 수 있을까?
넷째로, 자신의 뜻을 비우고 버리고 잊는 경배 수준까지 성숙해 가야 한다. 얼마나 기도하면 그 수준을 맛보게 될까?
본문 44절은 예수가 얼마나 처절하게 기도했는지에 대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물질세계의 창조주이신 예수도 이렇게 기도하셨는데... 나는?
“기도”는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뜻 발견하여 성취해가는 통로다.
예수의 신앙과 기도를 기억하자.
경배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성숙된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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