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1, 2023

빛을 받기까지 나의 여정 - 1. 유란시아 서를 만나다

 첫 출발은 1994년 12월 초에 시작됐다. 신학교 학우들 가운데 한 분인 이원명씨와 함께 가을학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LA에서 수년 전에 만난 친구로부터 "우란티아(유란시아 서)라는 팜플렛을 하나 받은 적이 있는데, 범상치 않은 내용인 것 같다. 이번 겨울방학 동안 어떤 책인지 함께 검토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간략하게 소개받은 내용에 나도 귀가 솔깃하여 그자리에서 동의하고, 다음날 Barns & Noble 책방에가서 한 권을 구입했다. 아주 얇은 종이에 빽빽히 인쇄된 2천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다. 내가 먼저 읽고, 그 내용을 토대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면서, 소위 이단을 퍼뜨리는 이상한 책이 아닌지, 교묘하게 지식을 전파함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서적은 아닌지,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난해한 부분들이 많았지만, 뼈대가 될만한 내용은 빼놓지 않고 토의했다. 그리고 이렇다할 오류는 발견할 수 없었고, 호기심은 점점 깊어졌다. 이렇게 매주 만남을 계속하면서 겨울 방학을 보내던 어느날, 이원명씨가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한국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유란시아 서 한국인 모임에 관한 광고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연락하여 그 모임에 참여했다. 그 모임에는 Urantia Fellowship의 Mr. & Mrs. Clark, 그리고 이원명씨와 내가 전부였다. 네 사람의 반가운 교제가 시작됐다. 우리는 그동안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유란시아 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1995년 겨울 어느날, 나의 운명을 바꿔놓은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Mrs. Clark이었고, "유란시아 서를 한국 말로 번역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 긴 여정은 곧바로 시작됐다.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싶던 나에게 그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당시에는 한글로 번역된 책이 전혀 없었고, Foundation에서 어떤 한국 사람이 번역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정보만 갖고 있었다. Fellowship의 New York Society에서 지원받아 이미 약간 진행된 상태였는데, 나는 4부 157편부터 번역하기 시작했다. 4부를 마친 뒤에는 120편부터 156편까지 번역된 기존 파일을 받아서 수정작업을 거쳐 4부를 완성했고, 1부에서 번역된 처음 몇 편(4편 또는 5편까지)을 이어서 3부까지 번역했고, 2000년 4월 6일에 1차 번역작업을 완료했다.

당시에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개인 컴퓨터조차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내 집에 있는 데스크탑 컴퓨터와 브라운관 모니터 앞에서, 한쪽에는 유란시아 서 영어 원본을 놓고, 다른 쪽에는 영한사전을 펴놓고, 한 문장씩 번역하여 아래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컴퓨터에 입력하는 식이었다. 때로는 문장이 난해하여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할 수밖에 없었고,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들로 인하여 난감한 경우가 허다했다. Mr. Clark에게 영어 원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질문할 수 있었지만, 어떤 한글 단어로 번역해야할지 난감할 때가 많았고, 하소연할 데도 없이 매일 영어 단어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나 자신이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7월에, Fellowship 주관으로 4년마다 열리는 국제 대회가 아리조나 주 Flagstaff에서 열렸다. 두 달 전인 5월 무렵에 Mr. Clark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국제대회에서 한글 번역본 완성에 대해 발표를 해달라"는 요지였다. Mr. Clark의 도움을 받아 20분 가량의 영어 원고를 준비했다. 참가자 전원이 모이는 아침 집회 가운데 하나에서 main speaker로서 발표했다. 신통치 않은 영어발음에도 모두 경청해 줬고, 발표가 끝나자 전부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말로 감격스런 장면이었다. 이때 한국에서 참여한 장시영씨를 만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상당히 많은 미국 지식인들은 오래전부터 한국이 장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 기대하고 한국어 번역에 공을 들이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그날의 환호성으로 표현됐던 것이다. 한글 번역본 완성을 계기로 러시아어와 스패니쉬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이 진행됐고, 많은 결실이 이뤄졌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란시아 서 번역 작업은 나에게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교회 생활과 성경에서 발견한 의문점들은 유란시아 서를 만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디딤돌이었음에 틀림 없다. (계속)

Tuesday, October 31, 2023

빛을 받기까지 나의 여정 - 2.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고등학교 3학년은 대학 입시 준비에 집중하는 한 해였다. 입시에서 제외되는 과목들은 대개 자습시간으로 대체됐다. 그 중에 하나가 미술 시간이었다. 역시 자습을 하던 마지막 미술 시간에, 최충웅 선생님이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들아, 오늘은 마지막 시간이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하겠다. 관심 없는 사람은 각자 공부해도 좋다. 내가 살면서 꼭 경험해보고 싶지만 하지 못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종교'라는 것이다. 종교가 왜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올까? 아무 의미가 없다면 사라졌을텐데, 왜 그렇지 않을까? 너희가 좋은 대학에 가서 판검사나 의사가 되고 싶겠지만, 그렇게 됐을 때 너희 인생이 어떻겠니? 판검사는 평생 범죄자와 씨름하며 살아야 되고, 의사는 아픈 사람들만 상대하겠지? 나는 너희가 대학에 가면 어느 종교든지 택해서 꼭 경험해 보기를 바란다." 나도 모르게 이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친구 김진국이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태철아, 내가 아는 선배들 중에 기독교 써클을 만든 선배가 있는데, 대학에 붙으면 우리 함께 활동해보지 않겠니?"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과 함께 기독교 써클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화여대 다락방 전도협회 후원을 받아 활동하는 써클이었다. 당시에 나는 정말로 종교를, 그렇게 선택하게 된 기독교를 믿어보고 싶었다. 사심 없이 열심히 활동했다. 2학년 때 회장으로 내정된 나는, 회장단에게 요구되는 여름 전도대회에 참여하기도 했고, 일요일에 홀로 여러 번 교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믿음보다 오히려 거부감만 깊어졌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고? 말도 안 된다!" 나는 토론 시간에도 철저히 비판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3학년과 4학년은 ROTC, 아르바이트, 고등학교 미술반 동호회 화실 운영과 전시회 등으로 바쁘게 뛰어다녔고,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철원 지역 포병대대에 배속됐다. 배속되자마자 정보참모(측지장교)에 임명됐다.

당시에 보병 사단을 지원하는 포병 포단은 28개 포병 대대로 구성돼 있었다. 전투 태세 유지를 위해 1년에 한 번씩 28개 포병 대대가 모여서 측정을 받았다. 각 포병 대대마다 5개 분과가 있었는데, 내가 맡은 '측지'도 그 중에 하나였다. 시합이 있기 전 한두달 전부터 부대 밖에서 텐트를 치고 독자적으로 훈련을 했다. 이 시합에서 어느 분과든지 1등을 하면 대대장이 승진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부대 전체가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따라서 맡은 자의 부담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합이 있기 바로 전날 밤에, 대대장님 부부가 응원차 손수 라면을 큰 드럼통에 끓여서 우리 텐트를 방문하셨다. 부담이 두 배로 커졌다. 맛있게 식사를 끝내자 대대장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김소위, 사실은 너의 팀원들 가운데 김명수 상병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오늘 받았는데, 그 병사가 빠지면 어떻게 시합을 치를 수 있겠나. 시합이 끝나는 대로 휴가를 보내줄 터이니 이 사실을 비밀로 하게." 나는 그자리에서 항명을 했다. "안 됩니다. 대대장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비밀로 하다니요. 다른 병사로 대체하더라도, 김 상병을 보내줘야 합니다." 고집을 부리자 대대장님은 크게 화를 내고 부대로 돌아가셨다. 즉시 김 상병을 불러서 부고 내용을 전하고 즉시 휴가 준비를 해서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김 상병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다가 이렇게 말했다: "보좌관님, 가지 않겠습니다. 제가 지금 가도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시합을 마치고 이틀 뒤에 가도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으니, 시합을 마치면 즉시 보내주겠다고 약속만 해주십시오. 저는 제 임무를 꼭 마치고 싶습니다." 나의 부담은 이제 100배로 커졌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1등을 해야 했다. 그동안 피땀 흘리면서 수고한 내 병사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자기 임무를 다하려고 시합에 참여하겠다는 김 상병에게 15일 포상휴가를 보내기 위해서는 1등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누가 1등을 보장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서 텐트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봤다. 밝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가요? 믿고 싶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1등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정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다음날, 1박 2일의 시합이 진행됐다. 야간 측정이 있기 전까지 하루 종일 최선을 다했고, 자체 점검 결과 실수 없이 만점을 받은 것 같았다. 이대로 나머지 시합도 만점을 받으면 1등을 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야간 측정이 시작됐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 뛰어가면서 위치를 측량하는 일인지라 사소한 실수를 해도 탈락하게 돼 있었다. 무사히 과정을 마친 후에 답안지를 제출하고 병사들이 모여서 점검했다. 아뿔사! 줄자를 재면서 핀을 꽂고, 구간마다 회수한 핀 갯수를 세어서 거리를 산출하게 돼 있는데, 핀 한 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느 구간에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두 병사가 그 작업을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김 상병이 그 중에 하나였다. 만점을 받지 않으면 무조건 탈락이니, 이미 1등은 물건너간 것이나 다름 없었고, 1등 하는 대대 외에 다른 대대들은 전부 꼴등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튿날이 밝아왔다. 전체 대대들이 모여서 둘째 날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탈락하게 됐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어깨가 축 처져서 앉아있었다. 그런데 예정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측정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측정을 주관하는 장교가 나와서 이렇게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어제 측정한 항목들이 다 잘 진행됐는데, 다만 야간 측량은 주최측에서 준비를 잘못한 관계로 전체 합산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어찌 이런일이!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무사히 둘째 날 시합도 마칠 수 있었다. 저녁이 되자 시상식이 열렸고, 전체 부대원이 모였다. 나는 너무나 부담이 되어, 행사장에 가지 않고 텐트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몇몇 병사들이 헬멧을 위로 집어던지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나의 병사들이었다. 정말로 우리가 1등을 한 것이었다! 이때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등을 해봤다. 김상병은 물론 병사들 모두 15일 포상휴가를 나갔고, 나 역시 상당히 자유로운 부대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을 생각도, 교회에 가겠다는 약속도 까많게 잊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제대했다.

미국에 있는 누님이 형제초청으로 이민 신청을 해놓았기에, 나는 막연히 언젠가 미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 기업에 취직하지 않고 KIST 전산센터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혜택이나 대우가 일반 대기업보다 훨씬 좋았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고, 1년 후에는 자가용을 구입해 타고다니기도 했다. 1983년 당시에는 차를 갖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갑자기 내 마음 속에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연구원으로서 명예가 높아지고 돈을 많이 벌어본들 과연 내가 죽을 때 내 인생을 잘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괴로웠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더 피곤했다. "오늘 하루 무슨 의미로 살아야 하나?" 괴로운 날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괴로움에 두려움이 더해졌다.

7남매 중에 막내인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너 결혼하는 것을 봐야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부담을 주시는 바람에 괴로움이 갑절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님의 전화를 받은 누님이 미국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한 처자의 이름과 주소를 주면서 무조건 편지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뻔뻔스런 나는얼굴도 본 적이 없는 처자에게 나에 대해 소개하는 편지를 썼다. 곧 답장이 왔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나는 약간 화가 나서 답장으로 보냈다: "나라고 하나님이 버린 자식이 되길 원하겠습니까? 나도 믿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보내왔다. 눈에 콩까지가 씌워졌다. 내 차 백미러에 붙여놓고 보면서 좋아했다. 몇 달 뒤 직접 한국에 나와서 나를 만났고, 시골 집에 가서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나는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했으나, 자신은 아무 결정도 할 수 없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닭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돼버렸다. 마음의 고통은 몇 배로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날, 우두커니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부활하셨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왔다. 내 주변에는 성경 자체가 없었고, 교회를 다니거나 다닐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부활하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오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그 주일에 교회를 찾아갔다. 당시에 나의 제일 큰 형님만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그 교회로 갔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중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무슨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설교를 듣고 있을 뿐인데, 눈물이 흐르다니... "내가 어떤 분위기에 젖어서 눈물을 흘렸나? 내 눈이 이상했나?" 나는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 다음 주에 다시 그 교회에 갔다. 그런데 또 눈물이 났다. 지난 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세 번째 갔을 때에는 아주 흐느끼듯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계속되던 중에, 곧 세례식이 있다는 광고를 듣게 됐고 나도 신청을 했다. 세례식 전에 문답교육을 받으라 하여,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교회로 갔다. 그러나 교회 문 앞에서 갑자기 돌아섰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다시 나의 결심이 기억나면서 교회로 돌아갔다. 이렇게 두 번 돌아서다가 세 번째 시도한 끝에 교회로 들어가 문답교육을 받고 세례를 무사히 받고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계속)

Monday, October 30, 2023

빛을 받기까지 나의 여정 - 3. 하나님의 섭리

어느날 미국에서 편지가 왔다. 나를 약혼자로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알아보니, 이 초청에 응하려면 한국에서 완전히 미국으로 이민가는 수속을 밟아야 하고, 미국에 입국한 지 3개월 내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가려는 내 마음이 워낙 확고했기에,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일이 어찌될지 모르니 퇴직하지 말고 잠시 휴직하는 것으로 해서 다녀오라는 연구원 소장님 권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정리한 후 1985년 3월에 촌놈이 처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누님 식구들과의 반가운 만남도 잠시였고, 결혼에 퇴짜맞은 나는 졸지에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너무 마음아파하면서 걱정하시는 아버님을 누님이 초청하여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불법체류자가 된 아들, 결혼도 어그러진 이 막내아들을 이역만리 미국 땅에 떼어놓고 떠나시던, 차마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며 공항에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걸어가시던 아버지, 그리고 국민학교 4학년 어린 나이의 막내아들을 서울로 유학보내고 나서 세 달 동안 밤마다 눈물을 흘리셨다는 어머니, 두 분께는 정말로 고개를 들지 못할 불효자가 돼버렸다.

그때 겪던 마음의 고통과 불확실한 미래의 압박감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구소에서 일하던 컴퓨터 관련 일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면서 8개월 동안 누님들께 신세지다가, 그해 12월 말경에 한인 교포가 원영하는 컴퓨터 회사에 취직이 됐고,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컨설팅 업무를 익히게 왰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게 됐는데,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는 월급을 받는 직원은 될 수 없어도 월급을 주는 회사 주인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여 일하게 됐다. 몇 달간 밤낮으로 작업하여 직접 설계하고 개발한 어카운팅 프로그램으로 도매상들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시작했다.

부흥집회 등에서 은혜를 받기도 했고 교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을 냈지만 성경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새해가 될 때마다 결심을 하고 성경읽기표를 작성해 놓고 진도를 따라가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재미가 없었다. 한 페이지만 넘겨도 앞에 있는 내용이 생각나지 않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아서, 조금 읽다보면 졸음이 몰려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성경을 펼쳐놓아 보지만, 종착역이 되어 잠에서 깨면 그저 몇 줄 읽다가 잠들었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여러 성도들이 합심으로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받는 체험을 해게 됐다. 남들은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울고불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오히려 기쁨이 넘쳤고, 기도할 때 혀가 제멋대로 빠져나와 요동치는 체험도 했다. 내 정신이 이상해졌나 염려되어 홀로 화장실에 들어가 시험해 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면서 하늘을 보니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매일 보던 장면인데 완전히 달라보였다. 하나님의 창조가 경이롭게 느껴졌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성경을 펼쳤는데 재미가 있었다. 그저 이해가 됐다.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씌었을지 궁금하여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더 읽고싶은데 벌써 종착역에 와 있었다. 나의 교회생활은 이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1986년 겨울 성탄절 날 저녁, 기분전환 할 겸 맨하탄 거리를 둘러보자는 작은 누님과 매형의 제안에,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한인 상가들이 밀집돼 있는 브로드웨이 32가 건널목을 건너가게 됐다. 그런데 건널목 중간쯤 걷고 있을 때 작은 누님이 갑자기 소리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처자와 건널목 한가운데서 마주쳤던 것이다. 나는 피하고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누님이 강요하다시피 하여 근처에 있는 내 사무실로 갔고, 이렇게 그 처자와의 만남이 다시 시작됐고, 결국 이듬해 봄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 처자는 나의 아내로서 최고의 후원자가 되었다.

컨설팅 사업은 개인 컴퓨터에서 미니 컴퓨터까지 업그레이드 하면서 여러 직원과 함께 상당히 발전하기도 했으나, 나는 사업보다 교회생활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전도폭발 훈련과 제자훈련 등을 거치고, 또래 선교회 성경교사 역할을 하면서 성경에 푹 빠져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성경에 대한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짝을 맺었다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이고 사람의 딸은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날 때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렵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 잔이 옮겨질 수만 있으면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는데 인간적으로 두려워서 죽음을 피하려고 그렇게 기도했다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한 후에 죽기 싫다고 기도했다면 그것은 제자들을 우롱하는 태도가 아닌가? 등등. 기회 있을 때마다 여기 저기 물어봤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성경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성경에서 찾아보니, 다만 찾지 못했을 뿐 내가 알고 싶은 대답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의 감격과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더 알고 싶었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이 만났던 천사들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인간은 언제부터 영적인 존재가 되는가?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신학교 문을 두드렸고, 학우들 가운데 이원명 씨를 만나게 됐고, 유란시아 책에 대해 듣게 됐고, 번역하게 됐고, 내 나름대로 대답을 찾았던 것들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궁금증들에 대한 해답을 '유란시아 서'에서 발견했다. 지나온 인생에서 겪었던 마음의 고통과 육신의 고난들은 결국 '유란시아 서'를 만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여러 디딤돌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러면 나의 이 여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최근에 갑자기 기억난 것이 있다. 대학 1학년을 마칠 무렵 집으로 가려고 버스에 앉아 우두커니 학교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조형물 꼭대기에 "Veritas Lux Mea"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진리가 나를 밝혀준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 1년은 그저 허겁지겁 학점 따느라 바빴을 뿐 진리의 진짜에도 접근해보지 못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진리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내 인생을 전부 바친다해도 아깝지 않겠다." 그때 그 생각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 수많은 갈림길을 지날 때마다 나를 이끌어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인가? 아니, 국민하교 4학년 어린 나이에 "나도 서울 가서 형 누나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네가 무슨 돈으로 서울 가서 공부하겠느냐?"고 부모님이 웃으시니, 옆에 있는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저 항아리를 팔아서 가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어떤 가능성을 보신 결과인가? 아니, 만으로 다섯 살 무렵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논둑 길을 뛰어가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주거니 받거니 했던 신비롭게 느껴졌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내 속에서 역사를 시작하신 것은 아닌가?

아무튼, 나는'유란시아 서'를 만나 생명의 빛을 받았고,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