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은 대학 입시 준비에 집중하는 한 해였다. 입시에서 제외되는 과목들은 대개 자습시간으로 대체됐다. 그 중에 하나가 미술 시간이었다. 역시 자습을 하던 마지막 미술 시간에, 최충웅 선생님이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들아, 오늘은 마지막 시간이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하겠다. 관심 없는 사람은 각자 공부해도 좋다. 내가 살면서 꼭 경험해보고 싶지만 하지 못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종교'라는 것이다. 종교가 왜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올까? 아무 의미가 없다면 사라졌을텐데, 왜 그렇지 않을까? 너희가 좋은 대학에 가서 판검사나 의사가 되고 싶겠지만, 그렇게 됐을 때 너희 인생이 어떻겠니? 판검사는 평생 범죄자와 씨름하며 살아야 되고, 의사는 아픈 사람들만 상대하겠지? 나는 너희가 대학에 가면 어느 종교든지 택해서 꼭 경험해 보기를 바란다." 나도 모르게 이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친구 김진국이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태철아, 내가 아는 선배들 중에 기독교 써클을 만든 선배가 있는데, 대학에 붙으면 우리 함께 활동해보지 않겠니?"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과 함께 기독교 써클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화여대 다락방 전도협회 후원을 받아 활동하는 써클이었다. 당시에 나는 정말로 종교를, 그렇게 선택하게 된 기독교를 믿어보고 싶었다. 사심 없이 열심히 활동했다. 2학년 때 회장으로 내정된 나는, 회장단에게 요구되는 여름 전도대회에 참여하기도 했고, 일요일에 홀로 여러 번 교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믿음보다 오히려 거부감만 깊어졌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고? 말도 안 된다!" 나는 토론 시간에도 철저히 비판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3학년과 4학년은 ROTC, 아르바이트, 고등학교 미술반 동호회 화실 운영과 전시회 등으로 바쁘게 뛰어다녔고,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철원 지역 포병대대에 배속됐다. 배속되자마자 정보참모(측지장교)에 임명됐다.
당시에 보병 사단을 지원하는 포병 포단은 28개 포병 대대로 구성돼 있었다. 전투 태세 유지를 위해 1년에 한 번씩 28개 포병 대대가 모여서 측정을 받았다. 각 포병 대대마다 5개 분과가 있었는데, 내가 맡은 '측지'도 그 중에 하나였다. 시합이 있기 전 한두달 전부터 부대 밖에서 텐트를 치고 독자적으로 훈련을 했다. 이 시합에서 어느 분과든지 1등을 하면 대대장이 승진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부대 전체가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따라서 맡은 자의 부담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합이 있기 바로 전날 밤에, 대대장님 부부가 응원차 손수 라면을 큰 드럼통에 끓여서 우리 텐트를 방문하셨다. 부담이 두 배로 커졌다. 맛있게 식사를 끝내자 대대장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김소위, 사실은 너의 팀원들 가운데 김명수 상병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오늘 받았는데, 그 병사가 빠지면 어떻게 시합을 치를 수 있겠나. 시합이 끝나는 대로 휴가를 보내줄 터이니 이 사실을 비밀로 하게." 나는 그자리에서 항명을 했다. "안 됩니다. 대대장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비밀로 하다니요. 다른 병사로 대체하더라도, 김 상병을 보내줘야 합니다." 고집을 부리자 대대장님은 크게 화를 내고 부대로 돌아가셨다. 즉시 김 상병을 불러서 부고 내용을 전하고 즉시 휴가 준비를 해서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김 상병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다가 이렇게 말했다: "보좌관님, 가지 않겠습니다. 제가 지금 가도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시합을 마치고 이틀 뒤에 가도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으니, 시합을 마치면 즉시 보내주겠다고 약속만 해주십시오. 저는 제 임무를 꼭 마치고 싶습니다." 나의 부담은 이제 100배로 커졌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1등을 해야 했다. 그동안 피땀 흘리면서 수고한 내 병사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자기 임무를 다하려고 시합에 참여하겠다는 김 상병에게 15일 포상휴가를 보내기 위해서는 1등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누가 1등을 보장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서 텐트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봤다. 밝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가요? 믿고 싶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1등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정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다음날, 1박 2일의 시합이 진행됐다. 야간 측정이 있기 전까지 하루 종일 최선을 다했고, 자체 점검 결과 실수 없이 만점을 받은 것 같았다. 이대로 나머지 시합도 만점을 받으면 1등을 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야간 측정이 시작됐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 뛰어가면서 위치를 측량하는 일인지라 사소한 실수를 해도 탈락하게 돼 있었다. 무사히 과정을 마친 후에 답안지를 제출하고 병사들이 모여서 점검했다. 아뿔사! 줄자를 재면서 핀을 꽂고, 구간마다 회수한 핀 갯수를 세어서 거리를 산출하게 돼 있는데, 핀 한 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느 구간에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두 병사가 그 작업을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김 상병이 그 중에 하나였다. 만점을 받지 않으면 무조건 탈락이니, 이미 1등은 물건너간 것이나 다름 없었고, 1등 하는 대대 외에 다른 대대들은 전부 꼴등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튿날이 밝아왔다. 전체 대대들이 모여서 둘째 날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탈락하게 됐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어깨가 축 처져서 앉아있었다. 그런데 예정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측정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측정을 주관하는 장교가 나와서 이렇게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어제 측정한 항목들이 다 잘 진행됐는데, 다만 야간 측량은 주최측에서 준비를 잘못한 관계로 전체 합산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어찌 이런일이!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무사히 둘째 날 시합도 마칠 수 있었다. 저녁이 되자 시상식이 열렸고, 전체 부대원이 모였다. 나는 너무나 부담이 되어, 행사장에 가지 않고 텐트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몇몇 병사들이 헬멧을 위로 집어던지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나의 병사들이었다. 정말로 우리가 1등을 한 것이었다! 이때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등을 해봤다. 김상병은 물론 병사들 모두 15일 포상휴가를 나갔고, 나 역시 상당히 자유로운 부대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을 생각도, 교회에 가겠다는 약속도 까많게 잊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제대했다.
미국에 있는 누님이 형제초청으로 이민 신청을 해놓았기에, 나는 막연히 언젠가 미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 기업에 취직하지 않고 KIST 전산센터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혜택이나 대우가 일반 대기업보다 훨씬 좋았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고, 1년 후에는 자가용을 구입해 타고다니기도 했다. 1983년 당시에는 차를 갖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갑자기 내 마음 속에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연구원으로서 명예가 높아지고 돈을 많이 벌어본들 과연 내가 죽을 때 내 인생을 잘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괴로웠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더 피곤했다. "오늘 하루 무슨 의미로 살아야 하나?" 괴로운 날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괴로움에 두려움이 더해졌다.
7남매 중에 막내인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너 결혼하는 것을 봐야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부담을 주시는 바람에 괴로움이 갑절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님의 전화를 받은 누님이 미국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한 처자의 이름과 주소를 주면서 무조건 편지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뻔뻔스런 나는얼굴도 본 적이 없는 처자에게 나에 대해 소개하는 편지를 썼다. 곧 답장이 왔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나는 약간 화가 나서 답장으로 보냈다: "나라고 하나님이 버린 자식이 되길 원하겠습니까? 나도 믿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보내왔다. 눈에 콩까지가 씌워졌다. 내 차 백미러에 붙여놓고 보면서 좋아했다. 몇 달 뒤 직접 한국에 나와서 나를 만났고, 시골 집에 가서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나는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했으나, 자신은 아무 결정도 할 수 없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닭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돼버렸다. 마음의 고통은 몇 배로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날, 우두커니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부활하셨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왔다. 내 주변에는 성경 자체가 없었고, 교회를 다니거나 다닐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부활하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오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그 주일에 교회를 찾아갔다. 당시에 나의 제일 큰 형님만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그 교회로 갔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중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무슨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설교를 듣고 있을 뿐인데, 눈물이 흐르다니... "내가 어떤 분위기에 젖어서 눈물을 흘렸나? 내 눈이 이상했나?" 나는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 다음 주에 다시 그 교회에 갔다. 그런데 또 눈물이 났다. 지난 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세 번째 갔을 때에는 아주 흐느끼듯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계속되던 중에, 곧 세례식이 있다는 광고를 듣게 됐고 나도 신청을 했다. 세례식 전에 문답교육을 받으라 하여,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교회로 갔다. 그러나 교회 문 앞에서 갑자기 돌아섰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다시 나의 결심이 기억나면서 교회로 돌아갔다. 이렇게 두 번 돌아서다가 세 번째 시도한 끝에 교회로 들어가 문답교육을 받고 세례를 무사히 받고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