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편 유란시아에 미가엘이 증여됨 ∥ 제122편 예수의 탄생과 유아시절▶
미가엘이 증여된 때의 시대환경
121:0.1 우리 계층의 수석 우두머리와 기록 담당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으면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 형제단체 회원 열두 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감독 아래서 활동하는 나는, 한때 안드레
사도에게 배속돼있었던 2차 중도자이며,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지구상의 피조물이 관측했던 바대로, 그리고 현세에서 나의 보호 대상이었던 인간 상대자가 나중에 부분적으로 기록했던 바대로, 나사렛 예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기록된 글을 남기지 않으려고 주님께서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았으므로, 안드레 사도는 자신이 기록한 이야기가 복사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복음서 작성이 많이 지연됐다.
121:1.1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쇠퇴한 시기에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태어났을 때 유란시아는, 예전에 아담_이후 역사를 통틀어 들어본 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할 정도로, 영적 사색{思索}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상은 그전에 만연했거나 그 후로 생긴 상황 중에서 창조주 아들의 증여에 최고로 유리한 여건을 제공했다. 이 시기 직전의 몇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널리 퍼졌으며, 레반트족인 유대인은 본성에서 일부는 서양적이고 일부는 동양적이었는데, 동방과 서방 양쪽에게 새로운 어떤 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그런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활용하기에 매우 적당했다. 이런 최적의 환경은, 로마인이 지중해 지역을 정치적으로 관대하게 통치함으로써 더욱 증진됐다.
121:1.2 세계의 영향이 이렇게 전체적으로 조합된 것은 바울의 활동을 통해서 잘 나타나는데, 종교적 교양 면에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인이었던 그가, 유대인 메시야의 복음을 그리스 언어로 전파했지만, 바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다.
121:1.3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은, 서양에서 그 이전이나 이후 어느 때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삼중적 영향 아래서 통합됐고 조화를 이뤘다:
121:1.4 1. 로마의 정치적 및 사회적 체계.
121:1.5 2. 그리스인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철학도 어느 정도.
121:1.6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져나간 종교적 및 도덕적 교훈의 영향력.
121:1.7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지중해 연안 전 지역은 통합된 제국을 이뤘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양호한 상태의 도로들이 여러 주요 중심도시를 연결했다. 바다에서는 해적이 소탕됐고, 무역과 여행이 크게 이뤄지는 시대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그런 여행과 무역의 시대를 다시 맛보지 못했다.
121:1.8 그리스_로마 시대에 안으로는 평화롭고 겉으로는 번영하고 있음에도, 제국의 대다수 주민은 열악한 환경과 빈곤 속에서 고달픈 생활을 했다. 소수의 상류 계층은 부유했으나; 가난에 쪼들리고 허약한 하류 계층에는, 인류 중에서 서민들도 포함됐다. 그 당시에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중산층이 없었으며; 중산층은 로마 사회 내에 막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21:1.9 확장하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국가들 간에 벌어졌던 첫 갈등이 이 시기 직전에 종결됐는데, 결과적으로 시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을 누리고 있었고, 서방과 동방의 나라들과 상업 교역을 널리 이뤄가고 있었다.
121:2.1 유대인은 고대의 셈족속 가운데 일원이었으며, 이 셈족속에는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됐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기에는 유대인이 셈족속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에 그 지역이 무역을 위하여 통치되고 조직됐던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특별히 전략적인 지리적 위치를 우연히 점유하고 있었다.
121:2.2 옛 국가들을 연결하는 큰 대로들 가운데 다수가 팔레스틴 지역을 통과했으므로, 이 지역은 세 개의 대륙이 서로 만나는 장소, 즉 교차로가 됐다. 바빌로니아, 앗수르,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의 여행객과 상인과 군대가 연달아 팔레스틴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여러 대상{隊商} 경로가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 가운데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몇몇 우수한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 배들이 서양의 연안{沿岸} 전역으로 짐을 운반했다. 그리고 이런 대상 행렬 가운데 반 이상이, 갈릴리에서 나사렛 마을을 통과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121:2.3 팔레스틴이 유대교 문화의 본향이자 그리스도교의 탄생지였지만, 유대인은 세계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전 지역에서 무역을 하고 있었다.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도로를 건설하고 제국을 통합했으나, 흩어진 유대인은 로마 세계 전역 여기저기 퍼져있는 200개 이상의 회당과 잘_조직된 종교 공동체를 갖추고, 문화 중심지를 제공했는데, 거기서 새 하늘 나라 복음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기초를 다졌고, 나중에는 그곳으로부터 온 세계 땅 끝까지 퍼져나갔다.
1.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의 서양
121:1.1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쇠퇴한 시기에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태어났을 때 유란시아는, 예전에 아담_이후 역사를 통틀어 들어본 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할 정도로, 영적 사색{思索}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상은 그전에 만연했거나 그 후로 생긴 상황 중에서 창조주 아들의 증여에 최고로 유리한 여건을 제공했다. 이 시기 직전의 몇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널리 퍼졌으며, 레반트족인 유대인은 본성에서 일부는 서양적이고 일부는 동양적이었는데, 동방과 서방 양쪽에게 새로운 어떤 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그런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활용하기에 매우 적당했다. 이런 최적의 환경은, 로마인이 지중해 지역을 정치적으로 관대하게 통치함으로써 더욱 증진됐다.
121:1.2 세계의 영향이 이렇게 전체적으로 조합된 것은 바울의 활동을 통해서 잘 나타나는데, 종교적 교양 면에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인이었던 그가, 유대인 메시야의 복음을 그리스 언어로 전파했지만, 바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다.
121:1.3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은, 서양에서 그 이전이나 이후 어느 때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삼중적 영향 아래서 통합됐고 조화를 이뤘다:
121:1.4 1. 로마의 정치적 및 사회적 체계.
121:1.5 2. 그리스인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철학도 어느 정도.
121:1.6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져나간 종교적 및 도덕적 교훈의 영향력.
121:1.7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지중해 연안 전 지역은 통합된 제국을 이뤘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양호한 상태의 도로들이 여러 주요 중심도시를 연결했다. 바다에서는 해적이 소탕됐고, 무역과 여행이 크게 이뤄지는 시대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그런 여행과 무역의 시대를 다시 맛보지 못했다.
121:1.8 그리스_로마 시대에 안으로는 평화롭고 겉으로는 번영하고 있음에도, 제국의 대다수 주민은 열악한 환경과 빈곤 속에서 고달픈 생활을 했다. 소수의 상류 계층은 부유했으나; 가난에 쪼들리고 허약한 하류 계층에는, 인류 중에서 서민들도 포함됐다. 그 당시에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중산층이 없었으며; 중산층은 로마 사회 내에 막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21:1.9 확장하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국가들 간에 벌어졌던 첫 갈등이 이 시기 직전에 종결됐는데, 결과적으로 시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을 누리고 있었고, 서방과 동방의 나라들과 상업 교역을 널리 이뤄가고 있었다.
2. 유대 민족
121:2.1 유대인은 고대의 셈족속 가운데 일원이었으며, 이 셈족속에는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됐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기에는 유대인이 셈족속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에 그 지역이 무역을 위하여 통치되고 조직됐던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특별히 전략적인 지리적 위치를 우연히 점유하고 있었다.
121:2.2 옛 국가들을 연결하는 큰 대로들 가운데 다수가 팔레스틴 지역을 통과했으므로, 이 지역은 세 개의 대륙이 서로 만나는 장소, 즉 교차로가 됐다. 바빌로니아, 앗수르,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의 여행객과 상인과 군대가 연달아 팔레스틴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여러 대상{隊商} 경로가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 가운데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몇몇 우수한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 배들이 서양의 연안{沿岸} 전역으로 짐을 운반했다. 그리고 이런 대상 행렬 가운데 반 이상이, 갈릴리에서 나사렛 마을을 통과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121:2.3 팔레스틴이 유대교 문화의 본향이자 그리스도교의 탄생지였지만, 유대인은 세계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전 지역에서 무역을 하고 있었다.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도로를 건설하고 제국을 통합했으나, 흩어진 유대인은 로마 세계 전역 여기저기 퍼져있는 200개 이상의 회당과 잘_조직된 종교 공동체를 갖추고, 문화 중심지를 제공했는데, 거기서 새 하늘 나라 복음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기초를 다졌고, 나중에는 그곳으로부터 온 세계 땅 끝까지 퍼져나갔다.
121:2.5 각 유대인 회당은 비주류 이방인 신자, 즉 “헌신적인” 사람들 또는 “하나님을_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바울이 초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이 비주류 개종자에 속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도, 화려하게 장식된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안디옥의 문화와 상업과 경배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바울의 제자들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렀다.
121:2.6 유대인의 성전 경배가 예루살렘에 집중된 것은, 그들의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모든 나라의 유일한 하나님인 동시에 모든 필사자의 아버지라는, 새롭고 확장된 개념을 육성하여 세계로 내보내겠다는 약속을 만들어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이어지는 이방 국가의 지배자들과 인종적 박해자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문화 개념이 살아남아있음을 보여줬다.
121:2.7 이 시기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종주권 아래 있었음에도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누렸는데, 유다 마카비 및 그의 직속 후계자들이 이룩한, 그 당시로는 최근에 영웅적으로 나라를 구원한 업적을 기억하면서, 더 위대한 구원자, 즉 오랫동안_대망{待望}했던 메시야의 임박한 출현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에 넘쳐있었다.
121:2.8 팔레스틴, 즉 유대인 왕국이 준{準}독립 국가로서 생존한 비결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팔레스틴 대로{大路}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대상{隊商} 노선들의 서쪽 기착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로마 정부의 외교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장차 확장하려는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세력이든지, 이 지역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로마는 원치 않았다.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셀류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가 서로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팔레스틴을 분리된 독립 국가로 키워서 완충 지역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작고 힘없는 유대인 집단이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서, 북으로는 셀류시드에 대적하고, 남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항하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로마의 정책 때문이었는데, 로마는 파르티아가 세력이 부상하기 전에 이집트를 쇠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셀류시드를 점차 약화시키려고 했다. 둘러싼 더 강력한 민족들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이렇게 운 좋은 자유와 독립을 누린 것에 대해, 유대인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 덕분이라고, 즉 야훼가 직접 개입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영토에 임했을 때, 그런 인종적 자만심의 태도가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비참한 시기에도, 유대인은 자신의 지상 사명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121:2.9 로마 관리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유대지방의 지배권을 갖게 된, 이두메 사람으로서 외부인인 헤롯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 당시의 유대인은 유별나게 걱정과 의심이 많았다. 그리고 헤롯은 히브리의 예식 관례에 충실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여러 낯선 신을 섬기는 신전{神殿}을 계속 건설했다.
121:2.10 헤롯과 로마 관리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로 인해, 유대인은 온 세계를 안전하게 여행하게 됐으며,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유대인이 로마 제국의 먼 지역은 물론, 다른 여러 동맹국들에게까지 하늘 나라의 새 복음을 지니고 침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헤롯의 통치는, 히브리와 헬라 철학이 더욱 섞이는 데에도 많이 기여했다.
121:2.11 헤롯이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팔레스틴이 나중에 문명세계의 교차로가 되는 데 더욱 기여했다. 그는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유년시절과 공생애 기간에, 그리고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자기 아버지처럼 훌륭한 건축가였다. 그는 중요한 무역중심지인 세포리를 비롯하여,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도시를 개축했다.
121:2.12 갈릴리인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학자 선생들로부터 충분한 호감을 얻지 못했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보다 오히려 이방에 가까웠다.
121:3.1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이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국내에 널리 퍼진 평화와 풍요는 미가엘이 증여되기에 매우 적합했다.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 사회에는 다음과 같이 잘_구분된 다섯 계층이 있었다:
121:3.2 1. 귀족.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상위계층으로, 특권을 누리면서 통치하는 집단.
121:3.3 2. 사업자 집단. 거상{巨商}, 은행가, 무역업자--큰 규모의 수출입 업자--곧 국제 상인.
121:3.4 3. 소수의 중산 계층.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지만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도덕적 중추 역할을 했는데, 교회는 이 집단이 다양한 생산과 교역을 계속하도록 장려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층의 무역업자에 속했다.
121:3.5 4. 자유 무산 계층.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거나 없는 집단. 자유를 누린다는 자부심은 있었으나, 노예 노동자와 경쟁하도록 내몰렸기 때문에 몹시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상위 계층들은 이들을 경멸했으며, “자손을 번성시키는 목적”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121:3.6 5. 노예 계층.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으며; 자유 무산 계층 또는 무역업자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향상시키는 통로를 재빨리 개척할 만큼, 개인적으로 우수한 자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매우 열등했다.
121:3.7 우수한 사람들조차 노예가 된 것은, 로마의 군사 정복으로 인한 특색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력은 무제한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주로 낮은 계층과 이 노예들로 구성됐다.
121:3.8 우수한 노예는, 임금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벌어들인 돈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방된 노예 가운데 다수는, 국가나 교회나 상업 분야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변경된 이 노예제도를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가 쉽게 용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었다.
121:3.9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로마 제국에 널리 퍼진 사회 문제는 없었다. 다수의 서민은 자신이 우연히 태어난 그 집단에 소속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주 있고 유능한 개인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높은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회 직급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층을 의식하지 않았고, 이런 계층 구분이 불공정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억압받는 계층의 고통을 개선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경제 운동이 전혀 아니었다.
121:3.10 여자는, 팔레스틴에서 제한된 지위에 있었던 것에 비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렸지만, 가족에 대한 유대인의 헌신과 자연스런 애정은 이방인 세계의 수준을 훨씬 능가했다.
121:4.1 도덕적 관점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어느 정도 열등했으나, 더 고상한 이방인의 마음 속에는 천부적인 선함과 잠재적인 인간 애정의 풍부한 토양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서, 도덕적 성품과 영적 성취의 풍성한 수확이 가능했다. 이방 세계는 그때 네 가지 중요한 철학에 지배됐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느 정도 그리스인의 초기 플라톤주의에서 파생됐다. 이 철학 학파는 다음과 같다:
121:4.2 1. 에피쿠로스학파. 이 사고{思考} 학파는 행복 추구에 전념했다. 대부분의 에피쿠로스인은 지나친 육욕{肉慾}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 교리는, 적어도 로마인이 치명적 숙명론 틀에서 해방되도록 도왔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노력하면 신분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을 효과적으로 퇴치했다.
121:4.3 2. 스토아학파.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_숙명이 자연계 전체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의 혼이 신성하며; 물질 본성의 악한 육체 속에 혼이 갇혀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계, 즉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통해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탁월한 도덕 수준까지 상승했고, 그 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손”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를 알아내기에 실패했고, 따라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금욕주의는 철학으로 남게 됐고; 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보편적 정신의 조화에 자신의 정신을 조율시키려고 애썼지만, 자신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임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바울은, “나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만족하기를 배웠다”는 글을 썼을 때, 금욕주의에 많이 쏠려있었다.
121:4.4 3. 견유{犬儒}학파. 견유학파는 그 철학 자취가 아덴의 디오게네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교리 중에서 많은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 교훈의 잔재에서 유래됐다. 견유주의는 초기에는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더 가까웠다. 견유학파는 적어도 그들의 종교_철학을 대중적{大衆的}이 되게 했다. 그들은 들에서나 시장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검소함과 덕행을 전파했고,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런 방랑하는 견유학파 설교자들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영적으로 배고픈 민중을 준비시키기에 많이 공헌했다. 그들의 대중 설교 방식은 바울 서신의 형식과 문체를 많이 따랐다.
121:4.5 4. 회의론{懷疑論}학파. 회의론은, 지식이란 그릇된 것이며 신념이나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태도였고, 널리 전파된 적이 전혀 없었다.
121:4.6 이런 철학들은 반{半}종교적이었으며; 종종 기운을 북돋우고 윤리적이고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평범한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는 제외될 수 있겠으나, 이것들은 강한 자와 현명한 자를 위한 것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한 구원의 종교가 아니었다.
121:5.1 이전의 시대들 내내, 종교는 주로 부족 또는 국가의 관심사였으며; 개인과 관련되는 문제일 경우는 드물었다. 신{神}들은 부족적이거나 국가적이었고, 개인적이지 않았다. 그런 종교 체계는, 일반 사람의 개인적인 영적 소망에는 별다른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121:5.2 예수 시대에 서양에 있던 종교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121:5.3 1. 이교{異敎} 종파들. 이것들은 헬라와 라틴의 신화와 애국심과 전통의 조합이었다.
121:5.4 2. 황제숭배.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교인은, 이렇게 사람을 국가의 상징으로서 신격화하는 것에 몹시 분개했으며, 이런 신격화는, 로마 정부가 두 종파의 교회를 혹독하게 박해하도록 직접 유도했다.
121:5.5 3. 점성술. 바벨론의 이 사이비 과학은 그리스_로마 제국 전역에서 종교로 발전했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사람들은 이 미신적인 믿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21:5.6 4. 신비 종교들. 영적으로 몹시 갈급한 세상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종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색다른 종교들은, 평범한 인간을 매혹시키고 그들에게 개인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재빨리, 그리스_로마 세계의 낮은 계층이 받아들인 믿음이 됐다. 그리고 이 종교들은, 훨씬 뛰어난 그리스도교 교훈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줬으며, 그리스도교 교훈은, 지식인에게 흥미를 자아내는 신학, 그리고 무지하기는 했지만 영적으로 갈급해있던 당시의 평민을 포함해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심오한 제안과 관련하여, 신격에 대한 웅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121:5.7 신비 종교들은 국가적 믿음의 종말을 초래했고, 그 결과로 수많은 개인 종파를 탄생시켰다. 신비교가 많이 있었지만, 모두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121:5.8 1. 약간의 신화적 전설, 일종의 신비--그것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유래됐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비교는, 미드라 신교{神敎}의 교훈으로 설명되듯이, 신{神}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됐는데, 그리스도교라는 바울의 신흥 종파와 한동안 공생{共生}하면서 서로 경쟁했다.
121:5.9 2. 신비교는 민족이나 종족에 매이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우애 있는 종파였으며, 그 결과로 종교적 협회들과 수많은 분파의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121:5.10 3. 예배에서 복잡한 입장 예식과 엄숙한 성례{聖禮}가 특징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제례와 제례식은 때로 무시무시하고 혐오스런 경우도 있었다.
121:5.11 4. 그러나 그 예식의 본질 또는 그것이 얼마나 지나칠 정도였는지에 상관없이, 이 신비교들은 신봉자에게, 구원, 즉 “악으로부터의 구출, 죽음 이후의 생존, 그리고 슬픔과 속박이 가득한 이 세상을 초월하여, 가장 행복한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감”을 똑같이 약속했다.
121:5.12 그러나 예수의 교훈을 이런 신비교와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신비교가 유행한 것은, 사람이 생존을 추구했음을 드러내는데, 개인 종교와 개개인의 의로움을 실질적으로 열망하고 목말라했음을 나타낸다. 비록 이런 갈망을 적절하게 만족시켜주기에는 실패했더라도, 이 신비교들은, 진짜 생명의 빵과 물을 이 세상에 가져온 예수께서 출현하도록, 그 길을 예비했다.
121:5.13 바울은, 사람들이 더 나은 유형의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하는 것을 활용하려고 애쓰면서, 개종이 기대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예수의 교훈을 어느 정도 변경시켰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교훈을 (그리스도교로) 절충시킨 것조차, 신비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세했다:
121:5.14 1. 바울은 도덕적인 구속{救贖}, 윤리적인 구원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삶을 지시하고 새 이상{理想}을 선포했다. 바울은 마술적인 제례와 예식적인 요술을 거부했다.
121:5.15 2.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붙잡은 종교를 출현시켰는데, 이는 슬픔, 심지어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된 뒤에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의로운 성품의 부여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121:5.16 3. 신비교들은 신화{神話}에 기초했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전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미가엘이 인류에게 증여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다.
121:5.17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성은 종교나 철학과 반드시 관련돼있지는 않았다. 팔레스틴 이외 지역의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가 도덕적 삶 역시 인도해야하는 것으로 항상 간주하지는 않았다. 유대의 종교와, 뒤를 이은 예수의 교훈, 그리고 바울이 나중에 발전시킨 그리스도교는, 한 손은 도덕 위에, 다른 한 손은 윤리 위에 놓고,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 종교가 됐다.
121:2.6 유대인의 성전 경배가 예루살렘에 집중된 것은, 그들의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모든 나라의 유일한 하나님인 동시에 모든 필사자의 아버지라는, 새롭고 확장된 개념을 육성하여 세계로 내보내겠다는 약속을 만들어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이어지는 이방 국가의 지배자들과 인종적 박해자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문화 개념이 살아남아있음을 보여줬다.
121:2.7 이 시기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종주권 아래 있었음에도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누렸는데, 유다 마카비 및 그의 직속 후계자들이 이룩한, 그 당시로는 최근에 영웅적으로 나라를 구원한 업적을 기억하면서, 더 위대한 구원자, 즉 오랫동안_대망{待望}했던 메시야의 임박한 출현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에 넘쳐있었다.
121:2.8 팔레스틴, 즉 유대인 왕국이 준{準}독립 국가로서 생존한 비결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팔레스틴 대로{大路}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대상{隊商} 노선들의 서쪽 기착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로마 정부의 외교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장차 확장하려는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세력이든지, 이 지역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로마는 원치 않았다.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셀류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가 서로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팔레스틴을 분리된 독립 국가로 키워서 완충 지역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작고 힘없는 유대인 집단이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서, 북으로는 셀류시드에 대적하고, 남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항하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로마의 정책 때문이었는데, 로마는 파르티아가 세력이 부상하기 전에 이집트를 쇠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셀류시드를 점차 약화시키려고 했다. 둘러싼 더 강력한 민족들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이렇게 운 좋은 자유와 독립을 누린 것에 대해, 유대인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 덕분이라고, 즉 야훼가 직접 개입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영토에 임했을 때, 그런 인종적 자만심의 태도가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비참한 시기에도, 유대인은 자신의 지상 사명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121:2.9 로마 관리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유대지방의 지배권을 갖게 된, 이두메 사람으로서 외부인인 헤롯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 당시의 유대인은 유별나게 걱정과 의심이 많았다. 그리고 헤롯은 히브리의 예식 관례에 충실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여러 낯선 신을 섬기는 신전{神殿}을 계속 건설했다.
121:2.10 헤롯과 로마 관리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로 인해, 유대인은 온 세계를 안전하게 여행하게 됐으며,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유대인이 로마 제국의 먼 지역은 물론, 다른 여러 동맹국들에게까지 하늘 나라의 새 복음을 지니고 침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헤롯의 통치는, 히브리와 헬라 철학이 더욱 섞이는 데에도 많이 기여했다.
121:2.11 헤롯이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팔레스틴이 나중에 문명세계의 교차로가 되는 데 더욱 기여했다. 그는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유년시절과 공생애 기간에, 그리고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자기 아버지처럼 훌륭한 건축가였다. 그는 중요한 무역중심지인 세포리를 비롯하여,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도시를 개축했다.
121:2.12 갈릴리인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학자 선생들로부터 충분한 호감을 얻지 못했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보다 오히려 이방에 가까웠다.
3. 이방인 가운데서
121:3.1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이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국내에 널리 퍼진 평화와 풍요는 미가엘이 증여되기에 매우 적합했다.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 사회에는 다음과 같이 잘_구분된 다섯 계층이 있었다:
121:3.2 1. 귀족.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상위계층으로, 특권을 누리면서 통치하는 집단.
121:3.3 2. 사업자 집단. 거상{巨商}, 은행가, 무역업자--큰 규모의 수출입 업자--곧 국제 상인.
121:3.4 3. 소수의 중산 계층.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지만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도덕적 중추 역할을 했는데, 교회는 이 집단이 다양한 생산과 교역을 계속하도록 장려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층의 무역업자에 속했다.
121:3.5 4. 자유 무산 계층.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거나 없는 집단. 자유를 누린다는 자부심은 있었으나, 노예 노동자와 경쟁하도록 내몰렸기 때문에 몹시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상위 계층들은 이들을 경멸했으며, “자손을 번성시키는 목적”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121:3.6 5. 노예 계층.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으며; 자유 무산 계층 또는 무역업자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향상시키는 통로를 재빨리 개척할 만큼, 개인적으로 우수한 자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매우 열등했다.
121:3.7 우수한 사람들조차 노예가 된 것은, 로마의 군사 정복으로 인한 특색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력은 무제한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주로 낮은 계층과 이 노예들로 구성됐다.
121:3.8 우수한 노예는, 임금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벌어들인 돈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방된 노예 가운데 다수는, 국가나 교회나 상업 분야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변경된 이 노예제도를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가 쉽게 용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었다.
121:3.9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로마 제국에 널리 퍼진 사회 문제는 없었다. 다수의 서민은 자신이 우연히 태어난 그 집단에 소속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주 있고 유능한 개인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높은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회 직급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층을 의식하지 않았고, 이런 계층 구분이 불공정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억압받는 계층의 고통을 개선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경제 운동이 전혀 아니었다.
121:3.10 여자는, 팔레스틴에서 제한된 지위에 있었던 것에 비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렸지만, 가족에 대한 유대인의 헌신과 자연스런 애정은 이방인 세계의 수준을 훨씬 능가했다.
4. 이방 철학
121:4.1 도덕적 관점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어느 정도 열등했으나, 더 고상한 이방인의 마음 속에는 천부적인 선함과 잠재적인 인간 애정의 풍부한 토양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서, 도덕적 성품과 영적 성취의 풍성한 수확이 가능했다. 이방 세계는 그때 네 가지 중요한 철학에 지배됐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느 정도 그리스인의 초기 플라톤주의에서 파생됐다. 이 철학 학파는 다음과 같다:
121:4.2 1. 에피쿠로스학파. 이 사고{思考} 학파는 행복 추구에 전념했다. 대부분의 에피쿠로스인은 지나친 육욕{肉慾}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 교리는, 적어도 로마인이 치명적 숙명론 틀에서 해방되도록 도왔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노력하면 신분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을 효과적으로 퇴치했다.
121:4.3 2. 스토아학파.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_숙명이 자연계 전체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의 혼이 신성하며; 물질 본성의 악한 육체 속에 혼이 갇혀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계, 즉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통해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탁월한 도덕 수준까지 상승했고, 그 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손”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를 알아내기에 실패했고, 따라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금욕주의는 철학으로 남게 됐고; 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보편적 정신의 조화에 자신의 정신을 조율시키려고 애썼지만, 자신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임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바울은, “나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만족하기를 배웠다”는 글을 썼을 때, 금욕주의에 많이 쏠려있었다.
121:4.4 3. 견유{犬儒}학파. 견유학파는 그 철학 자취가 아덴의 디오게네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교리 중에서 많은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 교훈의 잔재에서 유래됐다. 견유주의는 초기에는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더 가까웠다. 견유학파는 적어도 그들의 종교_철학을 대중적{大衆的}이 되게 했다. 그들은 들에서나 시장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검소함과 덕행을 전파했고,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런 방랑하는 견유학파 설교자들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영적으로 배고픈 민중을 준비시키기에 많이 공헌했다. 그들의 대중 설교 방식은 바울 서신의 형식과 문체를 많이 따랐다.
121:4.5 4. 회의론{懷疑論}학파. 회의론은, 지식이란 그릇된 것이며 신념이나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태도였고, 널리 전파된 적이 전혀 없었다.
121:4.6 이런 철학들은 반{半}종교적이었으며; 종종 기운을 북돋우고 윤리적이고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평범한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는 제외될 수 있겠으나, 이것들은 강한 자와 현명한 자를 위한 것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한 구원의 종교가 아니었다.
5. 이방 종교
121:5.1 이전의 시대들 내내, 종교는 주로 부족 또는 국가의 관심사였으며; 개인과 관련되는 문제일 경우는 드물었다. 신{神}들은 부족적이거나 국가적이었고, 개인적이지 않았다. 그런 종교 체계는, 일반 사람의 개인적인 영적 소망에는 별다른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121:5.2 예수 시대에 서양에 있던 종교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121:5.3 1. 이교{異敎} 종파들. 이것들은 헬라와 라틴의 신화와 애국심과 전통의 조합이었다.
121:5.4 2. 황제숭배.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교인은, 이렇게 사람을 국가의 상징으로서 신격화하는 것에 몹시 분개했으며, 이런 신격화는, 로마 정부가 두 종파의 교회를 혹독하게 박해하도록 직접 유도했다.
121:5.5 3. 점성술. 바벨론의 이 사이비 과학은 그리스_로마 제국 전역에서 종교로 발전했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사람들은 이 미신적인 믿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21:5.6 4. 신비 종교들. 영적으로 몹시 갈급한 세상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종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색다른 종교들은, 평범한 인간을 매혹시키고 그들에게 개인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재빨리, 그리스_로마 세계의 낮은 계층이 받아들인 믿음이 됐다. 그리고 이 종교들은, 훨씬 뛰어난 그리스도교 교훈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줬으며, 그리스도교 교훈은, 지식인에게 흥미를 자아내는 신학, 그리고 무지하기는 했지만 영적으로 갈급해있던 당시의 평민을 포함해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심오한 제안과 관련하여, 신격에 대한 웅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121:5.7 신비 종교들은 국가적 믿음의 종말을 초래했고, 그 결과로 수많은 개인 종파를 탄생시켰다. 신비교가 많이 있었지만, 모두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121:5.8 1. 약간의 신화적 전설, 일종의 신비--그것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유래됐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비교는, 미드라 신교{神敎}의 교훈으로 설명되듯이, 신{神}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됐는데, 그리스도교라는 바울의 신흥 종파와 한동안 공생{共生}하면서 서로 경쟁했다.
121:5.9 2. 신비교는 민족이나 종족에 매이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우애 있는 종파였으며, 그 결과로 종교적 협회들과 수많은 분파의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121:5.10 3. 예배에서 복잡한 입장 예식과 엄숙한 성례{聖禮}가 특징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제례와 제례식은 때로 무시무시하고 혐오스런 경우도 있었다.
121:5.11 4. 그러나 그 예식의 본질 또는 그것이 얼마나 지나칠 정도였는지에 상관없이, 이 신비교들은 신봉자에게, 구원, 즉 “악으로부터의 구출, 죽음 이후의 생존, 그리고 슬픔과 속박이 가득한 이 세상을 초월하여, 가장 행복한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감”을 똑같이 약속했다.
121:5.12 그러나 예수의 교훈을 이런 신비교와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신비교가 유행한 것은, 사람이 생존을 추구했음을 드러내는데, 개인 종교와 개개인의 의로움을 실질적으로 열망하고 목말라했음을 나타낸다. 비록 이런 갈망을 적절하게 만족시켜주기에는 실패했더라도, 이 신비교들은, 진짜 생명의 빵과 물을 이 세상에 가져온 예수께서 출현하도록, 그 길을 예비했다.
121:5.13 바울은, 사람들이 더 나은 유형의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하는 것을 활용하려고 애쓰면서, 개종이 기대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예수의 교훈을 어느 정도 변경시켰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교훈을 (그리스도교로) 절충시킨 것조차, 신비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세했다:
121:5.14 1. 바울은 도덕적인 구속{救贖}, 윤리적인 구원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삶을 지시하고 새 이상{理想}을 선포했다. 바울은 마술적인 제례와 예식적인 요술을 거부했다.
121:5.15 2.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붙잡은 종교를 출현시켰는데, 이는 슬픔, 심지어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된 뒤에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의로운 성품의 부여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121:5.16 3. 신비교들은 신화{神話}에 기초했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전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미가엘이 인류에게 증여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다.
121:5.17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성은 종교나 철학과 반드시 관련돼있지는 않았다. 팔레스틴 이외 지역의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가 도덕적 삶 역시 인도해야하는 것으로 항상 간주하지는 않았다. 유대의 종교와, 뒤를 이은 예수의 교훈, 그리고 바울이 나중에 발전시킨 그리스도교는, 한 손은 도덕 위에, 다른 한 손은 윤리 위에 놓고,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 종교가 됐다.
121:5.18 예수는, 이런 불완전한 철학체계와 복잡한 종파들의 종교에 지배당함으로써 혼란 속에 있던, 그런 사람들의 세대 속으로 팔레스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 종교의 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나중에 제시했다.
121:6.1 기원전 1세기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교훈에,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어느 정도 변경돼있었다. 히브리 사상에 대한 동방 학파들과 서방 학파들의 견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이뤄지던 중에, 예루살렘과 그 외의 서양 지역 그리고 레반트는, 일반적으로 서방의 유대 관점 또는 변경된 헬라 관점을 택했다.
121:6.2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서는 세 언어가 통용됐는데: 보통사람은 아람어 방언을; 제사장과 랍비는 히브리어를; 교육받은 계층과 상류 계층 유대인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초기 히브리 성서는, 그리스파의 유대 문화 및 신학이 나중에 주류{主流}를 이루게 되는 데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사들의 기록이, 같은 언어로 곧 출현하게 됐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결정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21:6.3 헬라화된 유대인의 믿음은, 에피쿠로스학파 교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플라톤 철학과, 금욕주의자의 자아_부정 교리에 매우 실질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금욕주의에 크게 잠식당했다는 사실은, 마카비서 제4권에 잘 나타나 있으며; 플라톤 철학뿐 아니라 금욕주의 교리 역시 침투해있었음이, 솔로몬의 지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헬라화된 유대인은, 자기들이 존경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히브리 신학에 접목시키는 일에 별로 어려움이 없음을 발견하고, 그런 우화적 해석을 히브리 성서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이 문제를 맡아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단하고 비교적 모순 없는 종교적 신념과 실천으로 조화시키고 체계화시키기 전에는, 극도의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예수께서 살아서 가르치던 시기에 팔레스틴에 성행하던 것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이 합쳐진 이 후대의 가르침이었으며, 바울은 이것을, 좀 더 진보되고 계몽시키는 그리스도교라는 종파를 세우는 기초로 활용했다.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으며; 서양 세계의 윤리와 종교 사상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모세 이후로는 없었다. 윤리와 종교 교훈이라는 동시 발생적 체계 속에, 더욱 훌륭한 요소를 결합하는 일에서, 일곱 명의 탁월한 인간 선생이 있었는데; 쎄타드, 모세, 조로아스터, 노자, 부다, 필로, 및 바울이다.
121:6.5 필로의 모순점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은, 그리스의 신비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율법적인 히브리 신학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에서 발생됐는데, 이것을 인식한 바울은, 그리스도교_이전에 자신이 지녔던 기본 신학에서 이를 현명하게 제거했다. 필로는, 유대 신학 안에서 오랫동안 동면해오던 낙원 삼위일체 개념을 충분히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로 바울을 인도했다. 바울이 필로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거나, 또는 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교훈을 넘어서지 못한 것 한 가지는, 바로 속죄에 관한 교리였으며; 필로는 오직 피 흘림으로써만 용서 받는다는 교리로부터 해방되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고 조율사의 실체와 현존에 대해, 바울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좀 더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 이론, 즉 유전적 죄와 타고난 악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구출되는 것에 관한 교리는, 부분적으로 미드라 숭배에서 기원됐고,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 또는 예수의 교훈과는 거의 상관없었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 중에서 어떤 국면들은 자신이 창작한 것이었다.
121:6.6 예수의 이 세상 생애를 기록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은, 서방 민족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필로의 교훈도 동시에 따르고 있던,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21:6.7 그리스도의 시대가 임할 즈음에, 유대인에 대한 이상하게 뒤집힌 정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됐고, 전에 유대인의 근거지였던 이곳으로부터, 지독한 유대인 박해 물결이 시작되어 심지어 로마까지 확장됐으며, 거기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추방됐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운동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황제가 다스리는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제국 전역에서 빼앗았던 자유를 유대인에게 온전히 되돌려줬다.
121:6.8 광범한 전 세계 도처에서, 상업 또는 박해로 인해 스스로 흩어졌던 유대인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성전에 일제히 집중했다. 유대인 신학은, 특정한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적절한 시기에 개입함으로써, 잊어버리지 않도록 여러 번 구출됐음에도,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해왔던 그대로 유지됐다.
121:6.9 흩어져서 살던 250만이나 되는 이 유대인은, 민족적 종교 축제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방(곧 바빌로니아)의 유대인과 서방(곧 헬라)의 유대인이, 신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서로 차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경배 중심지로 여겼고, 곧 오실 메시야를 여전히 대망했다.
121:7.1 예수가 살던 무렵에, 유대인은 그들의 근원과 역사와 운명에 대해 확정된 개념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신과 이방세계 사이를 분리하는 견고한 벽을 쌓았으며; 이방인의 방식은 무엇이든지 심하게 경멸했다. 율법의 글자 자체를 숭배했고, 혈통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에 근거해서 스스로_의롭게 여기는 틀에 빠졌다. 약속된 메시야에 대해 이미 여러 선입견을 만들었으며; 이런 대부분의 기대는, 그들의 나라 및 종족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오게 될 메시야를 상상하게 했다. 당시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되고 영원히 고착된 상태였다.
121:7.2 아량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교훈과 실행은, 유대인이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오랫동안_품어온 태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대인이 키워온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는, 사람의 영적 형제관계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훼를 공유하려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런 새롭고 생소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121:7.3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제례주의와 율법주의라는 지독한 굴레를 유대인에게 씌워 놓았는데, 이것은 로마의 정치 기준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은 율법에 예속됐을 뿐만 아니라 전통의 요구에 노예처럼 속박돼있었는데, 이것들은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을 일일이 간섭하고 침범했다. 이런 세세한 행동 규칙이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으며,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전통을 무시하고, 오랫동안_받들어온 사회 운영 규칙을 감히 경멸한다고 생각되는,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을 그들이 즉시 제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직접 제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교리와 충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의 교훈을, 그들은 선의로 봐줄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줬고, 그들은 타협하려하지 않았다.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명망 있는 선생인 서기관들이 율법에 대해 말로 해석한 것이, 문자화된 율법 그 자체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때문에, 특정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을 거부하는 편으로 그 민족을 끌어들이기가 더 쉬웠다.
6. 히브리 종교
121:6.1 기원전 1세기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교훈에,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어느 정도 변경돼있었다. 히브리 사상에 대한 동방 학파들과 서방 학파들의 견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이뤄지던 중에, 예루살렘과 그 외의 서양 지역 그리고 레반트는, 일반적으로 서방의 유대 관점 또는 변경된 헬라 관점을 택했다.
121:6.2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서는 세 언어가 통용됐는데: 보통사람은 아람어 방언을; 제사장과 랍비는 히브리어를; 교육받은 계층과 상류 계층 유대인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초기 히브리 성서는, 그리스파의 유대 문화 및 신학이 나중에 주류{主流}를 이루게 되는 데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사들의 기록이, 같은 언어로 곧 출현하게 됐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결정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21:6.3 헬라화된 유대인의 믿음은, 에피쿠로스학파 교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플라톤 철학과, 금욕주의자의 자아_부정 교리에 매우 실질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금욕주의에 크게 잠식당했다는 사실은, 마카비서 제4권에 잘 나타나 있으며; 플라톤 철학뿐 아니라 금욕주의 교리 역시 침투해있었음이, 솔로몬의 지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헬라화된 유대인은, 자기들이 존경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히브리 신학에 접목시키는 일에 별로 어려움이 없음을 발견하고, 그런 우화적 해석을 히브리 성서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이 문제를 맡아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단하고 비교적 모순 없는 종교적 신념과 실천으로 조화시키고 체계화시키기 전에는, 극도의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예수께서 살아서 가르치던 시기에 팔레스틴에 성행하던 것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이 합쳐진 이 후대의 가르침이었으며, 바울은 이것을, 좀 더 진보되고 계몽시키는 그리스도교라는 종파를 세우는 기초로 활용했다.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으며; 서양 세계의 윤리와 종교 사상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모세 이후로는 없었다. 윤리와 종교 교훈이라는 동시 발생적 체계 속에, 더욱 훌륭한 요소를 결합하는 일에서, 일곱 명의 탁월한 인간 선생이 있었는데; 쎄타드, 모세, 조로아스터, 노자, 부다, 필로, 및 바울이다.
121:6.5 필로의 모순점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은, 그리스의 신비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율법적인 히브리 신학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에서 발생됐는데, 이것을 인식한 바울은, 그리스도교_이전에 자신이 지녔던 기본 신학에서 이를 현명하게 제거했다. 필로는, 유대 신학 안에서 오랫동안 동면해오던 낙원 삼위일체 개념을 충분히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로 바울을 인도했다. 바울이 필로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거나, 또는 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교훈을 넘어서지 못한 것 한 가지는, 바로 속죄에 관한 교리였으며; 필로는 오직 피 흘림으로써만 용서 받는다는 교리로부터 해방되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고 조율사의 실체와 현존에 대해, 바울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좀 더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 이론, 즉 유전적 죄와 타고난 악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구출되는 것에 관한 교리는, 부분적으로 미드라 숭배에서 기원됐고,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 또는 예수의 교훈과는 거의 상관없었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 중에서 어떤 국면들은 자신이 창작한 것이었다.
121:6.6 예수의 이 세상 생애를 기록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은, 서방 민족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필로의 교훈도 동시에 따르고 있던,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21:6.7 그리스도의 시대가 임할 즈음에, 유대인에 대한 이상하게 뒤집힌 정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됐고, 전에 유대인의 근거지였던 이곳으로부터, 지독한 유대인 박해 물결이 시작되어 심지어 로마까지 확장됐으며, 거기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추방됐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운동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황제가 다스리는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제국 전역에서 빼앗았던 자유를 유대인에게 온전히 되돌려줬다.
121:6.8 광범한 전 세계 도처에서, 상업 또는 박해로 인해 스스로 흩어졌던 유대인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성전에 일제히 집중했다. 유대인 신학은, 특정한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적절한 시기에 개입함으로써, 잊어버리지 않도록 여러 번 구출됐음에도,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해왔던 그대로 유지됐다.
121:6.9 흩어져서 살던 250만이나 되는 이 유대인은, 민족적 종교 축제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방(곧 바빌로니아)의 유대인과 서방(곧 헬라)의 유대인이, 신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서로 차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경배 중심지로 여겼고, 곧 오실 메시야를 여전히 대망했다.
7. 유대인과 이방인
121:7.1 예수가 살던 무렵에, 유대인은 그들의 근원과 역사와 운명에 대해 확정된 개념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신과 이방세계 사이를 분리하는 견고한 벽을 쌓았으며; 이방인의 방식은 무엇이든지 심하게 경멸했다. 율법의 글자 자체를 숭배했고, 혈통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에 근거해서 스스로_의롭게 여기는 틀에 빠졌다. 약속된 메시야에 대해 이미 여러 선입견을 만들었으며; 이런 대부분의 기대는, 그들의 나라 및 종족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오게 될 메시야를 상상하게 했다. 당시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되고 영원히 고착된 상태였다.
121:7.2 아량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교훈과 실행은, 유대인이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오랫동안_품어온 태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대인이 키워온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는, 사람의 영적 형제관계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훼를 공유하려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런 새롭고 생소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121:7.3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제례주의와 율법주의라는 지독한 굴레를 유대인에게 씌워 놓았는데, 이것은 로마의 정치 기준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은 율법에 예속됐을 뿐만 아니라 전통의 요구에 노예처럼 속박돼있었는데, 이것들은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을 일일이 간섭하고 침범했다. 이런 세세한 행동 규칙이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으며,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전통을 무시하고, 오랫동안_받들어온 사회 운영 규칙을 감히 경멸한다고 생각되는,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을 그들이 즉시 제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직접 제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교리와 충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의 교훈을, 그들은 선의로 봐줄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줬고, 그들은 타협하려하지 않았다.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명망 있는 선생인 서기관들이 율법에 대해 말로 해석한 것이, 문자화된 율법 그 자체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때문에, 특정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을 거부하는 편으로 그 민족을 끌어들이기가 더 쉬웠다.
121:7.5 이런 상황으로 인해, 유대인은 종교적 자유와 영적 해방이라는 새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신성한 운명을 완수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은 전통의 족쇄를 깨뜨릴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돼야 할 율법”을 이야기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 살게 될 새 영”을 말했으며, 시편 기자는 “깨끗한 마음을 속에 창조하시고 올바른 영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선한 행위와 율법에 노예가 된 유대 종교가 전통적 타성에 침체되는 희생자로서 전락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유럽인을 향하여 서쪽으로 옮겨갔다.
121:7.6 그리하여, 진보하는 신학, 즉 그리스인의 철학과 로마인의 법과 히브리인의 도덕성 그리고 예수의 교훈에 근거하여 바울이 조직적으로 만든, 인격의 존엄성과 영적 자유를 외치는 복음 등을 포함하는 교육 체계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다른 민족이 부름을 받게 됐다.
121:7.7 바울의 그리스도교 종파는, 유대교에서 출생한 흔적을 그 종파의 도덕성으로 보여줬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곧 일하시는 야훼의 섭리--로 여겼다. 영생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개념을 새 가르침에 전해준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신학과 철학 면에서, 바울의 교리는 예수의 교훈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윤리 면에서, 그는 예수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들에게서도 영감{靈感}을 받았다.
121:7.8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디옥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구체화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교훈과 혼합됐다:
121:7.9 1.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 가운데 일부를 포함하는, 유대주의로 개종한 그리스인의 철학적 논법.
121:7.6 그리하여, 진보하는 신학, 즉 그리스인의 철학과 로마인의 법과 히브리인의 도덕성 그리고 예수의 교훈에 근거하여 바울이 조직적으로 만든, 인격의 존엄성과 영적 자유를 외치는 복음 등을 포함하는 교육 체계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다른 민족이 부름을 받게 됐다.
121:7.7 바울의 그리스도교 종파는, 유대교에서 출생한 흔적을 그 종파의 도덕성으로 보여줬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곧 일하시는 야훼의 섭리--로 여겼다. 영생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개념을 새 가르침에 전해준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신학과 철학 면에서, 바울의 교리는 예수의 교훈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윤리 면에서, 그는 예수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들에게서도 영감{靈感}을 받았다.
121:7.8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디옥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구체화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교훈과 혼합됐다:
121:7.9 1.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 가운데 일부를 포함하는, 유대주의로 개종한 그리스인의 철학적 논법.
121:7.10 2. 널리 퍼져있던 신비 종파들의 매혹적인 교훈, 특히 어떤 신이 희생됨으로써 이뤄진, 구속과 속죄와 구원에 대한 미드라교의 교리.
121:7.11 3. 이미 확립된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21:7.12 예수 시대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된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세계 지리, 천문학, 건강, 및 질병 등에 대하여 아주 미숙하고 원시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었으며; 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놀라운 선언을 듣고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선령{善靈}과 악령을 소유한다는 관념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되지 않았으며, 모든 바위와 나무에도 영이 들어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마법{魔法}이 성행하던 시대였으며, 기적이 보통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누구나 믿었다.
121:8.1 우리가 받은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예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유란시아에 있는 기존의 기록을 활용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화시키려고 우리는 노력해왔다. 우리는, 분실된 사도 안드레의 기록을 읽어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고, 미가엘이 증여됐던 기간에 이 세상에 있었던 다양한 천상의 존재 무리(특히 지금 그의 인격화된 조율사)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특권도 누렸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고 칭하는 복음서를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121:8.2 이 신약 성경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기원됐다:
121:8.3 1. 마가복음. 요한 마가는 예수의 생애에 관해 (안드레의 기록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가장 간결하고 가장 담백하게 기록했다. 그는 주님을 한 사역자,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마가는 자신이 서술한 대부분의 장면들 주변에 한 소년으로서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서다. 그는 처음에는 베드로와;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과 연합했다. 마가는 베드로의 부탁으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간곡한 청에 따라서 이것을 기록했다. 마가는, 주님이 세상에서 육신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교훈을 글로 남기기를 얼마나 일관되게 거부했는지 알았으므로, 사도들 및 다른 수제자{首弟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런 기록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마가가 그 준비를 담당하기로 동의했다. 그는 베드로가 서기 67년에 죽기 전까지 간단한 기록을 많이 만들었으며, 베드로가 승인한 전체 윤곽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은 직후부터 이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서는 서기 68년 말쯤에 완성됐다. 마가는 순전히 자신과 베드로의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썼다. 이 기록은 그 후에 상당히 변경됐는데, 최초의 복음서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첫 원본이 복사되기 전에 유실{遺失}됐고,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 부분에 삽입됐다. 마가가 쓴 이 기록은, 안드레의 기록 및 마태의 기록과 결합되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묘사하려했던, 차후의 모든 성문화된 복음서의 기초가 됐다.
121:8.4 2. 마태복음. 소위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는, 유대 그리스도교인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쓴, 주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생애에서 그가 행한 대부분의 사건이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계속 애썼다. 마태의 복음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아주 존중하고 있는 듯이 서술한다.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 마태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이사도르가 이것을 기록했는데,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이 사건들에 대한 마태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십자가형 직후에 이사도르 자신이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은 것들의 도움도 받았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람어로 돼있었으며; 이사도르는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이 글을 마태의 작품이라고 공언할 때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제자들이 그렇게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121:8.6 마태의 원래 기록은, 서기 40년에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복음을 전파하러 가기 직전까지 편집되고 첨가됐다. 이것은 사적{私的}인 기록이었으며, 그 마지막 사본{寫本}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 수도원이 불탔을 때 없어졌다.
121:8.7 서기 70년에 티투스 장군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 기록들을 지니고 성을 빠져나와서 펠라로 도피했다. 펠라에서 살고 있던 71년에,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 기록들에 의거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마가의 기록 중에서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을 갖고 있었다.
121:8.8 3. 누가복음. 피시디아 안디옥의 의사였던 누가는, 바울로 인해 개종된 이방인이었고, 주님의 생애에 관하여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서기 47년에 바울을 추종하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하여 배웠다. 누가는, 바울은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사실을 수집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보관했다. 그는 주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묘사했다. 그는, 바울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여러 단편 기록을 복음서로 조직화하지 않았다. 누가는 아가야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쓸 계획이었으나, 둘째 책인 “사도행전”이 완성되기 직전인 서기 90년에 죽었다.
121:8.9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하기 위한 재료로서, 먼저 바울이 자기 체험과 관련시켜서 말했던,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료에 의존했다. 따라서 누가 복음서는, 어떤 면에서는 바울로 말미암은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정보 자료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예수의 생애 가운데 여러 사건을 목격한 많은 사람과 면담했을 뿐만 아니라,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의 마가복음 사본을 갖고 있었으며, 이사도르의 글, 그리고 서기 78년에 안디옥에서 세데스라는 한 신자가 쓴 간단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종합적이고 많이_편집된 어떤 기록의 사본도 갖고 있었다.
121:8.10 4. 요한복음.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는, 다른 기록들에서 볼 수 없는, 예수께서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근방에서 활동하신 일이 많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라고 불렸으며, 비록 요한이 쓰지는 않았지만, 자기 생각을 불어넣었다. 이것이 처음 기록된 후에, 바로 요한이 직접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편집됐다. 이 기록이 작성됐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갖고 있었고, 많은 것이 생략돼있음을 발견했으며; 따라서 그는, 서기 101년에 가이사랴에서 온, 그리스 유대인인 동료 나단을 설득해서 이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재료를 제공했고, 이미 기록된 세 권의 기록을 참고하도록 했다. 그가 직접 쓴 기록은 없었다. “요한1서”라고 알려진 서신서는 그가 직접 쓴 것이었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서 나단이 기록한 작품의 서언{序言}에 해당하는 편지였다.
121:8.11 이 저자들은 모두, 자신이 예수를 본대로, 기억나는 대로, 또는 그에 대해 들은 대로, 그리고 바울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나중에 지지함으로써, 오래 전의 이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정직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 기록들은 거의 2,000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진로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121:8.12 [감사{感謝}의 글: 나사렛 예수의 교훈을 다시 진술하고 활동을 다시 이야기하는 위탁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나는 기록된 모든 자료와 행성의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했다. 나의 주요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 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기록을 준비하는 데 있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었던 방대한 양의 정보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보만 선택했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 세계의 자료들로부터 정보를 도출하려고 했다. 그런 자료를 구할 수 없을 경우에만, 초인적인 그 기록의 도움을 받았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개념과 관념을 어떤 인간 정신이 적절하게 표현했을 때, 나는 그런 명백하게 인간적인 사고 유형에 반드시 우선순위를 뒀다. 주님의 생애와 교훈의 실제 의미와 진정한 뜻에 대한 우리 개념에 더 잘 맞을 수 있도록, 단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그럼에도 나는 서술하는 동안 내내 가능한 한 실제 인간 개념과 사고{思考} 원형에 충실했다. 인간의 정신에서 생겨난 이 개념들이, 다른 모든 인간 정신에게도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고 도움 될 수 있음이 입증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의 기록이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아 낼 수 없을 때, 내가 소속된 지상 피조물 계층인 중도자들의 기억 자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 2차 정보 자료가 부적당한 경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행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정보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
121:7.11 3. 이미 확립된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21:7.12 예수 시대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된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세계 지리, 천문학, 건강, 및 질병 등에 대하여 아주 미숙하고 원시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었으며; 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놀라운 선언을 듣고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선령{善靈}과 악령을 소유한다는 관념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되지 않았으며, 모든 바위와 나무에도 영이 들어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마법{魔法}이 성행하던 시대였으며, 기적이 보통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누구나 믿었다.
8. 이전에 기록된 문서들
121:8.1 우리가 받은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예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유란시아에 있는 기존의 기록을 활용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화시키려고 우리는 노력해왔다. 우리는, 분실된 사도 안드레의 기록을 읽어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고, 미가엘이 증여됐던 기간에 이 세상에 있었던 다양한 천상의 존재 무리(특히 지금 그의 인격화된 조율사)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특권도 누렸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고 칭하는 복음서를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121:8.2 이 신약 성경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기원됐다:
121:8.3 1. 마가복음. 요한 마가는 예수의 생애에 관해 (안드레의 기록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가장 간결하고 가장 담백하게 기록했다. 그는 주님을 한 사역자,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마가는 자신이 서술한 대부분의 장면들 주변에 한 소년으로서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서다. 그는 처음에는 베드로와;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과 연합했다. 마가는 베드로의 부탁으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간곡한 청에 따라서 이것을 기록했다. 마가는, 주님이 세상에서 육신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교훈을 글로 남기기를 얼마나 일관되게 거부했는지 알았으므로, 사도들 및 다른 수제자{首弟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런 기록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마가가 그 준비를 담당하기로 동의했다. 그는 베드로가 서기 67년에 죽기 전까지 간단한 기록을 많이 만들었으며, 베드로가 승인한 전체 윤곽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은 직후부터 이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서는 서기 68년 말쯤에 완성됐다. 마가는 순전히 자신과 베드로의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썼다. 이 기록은 그 후에 상당히 변경됐는데, 최초의 복음서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첫 원본이 복사되기 전에 유실{遺失}됐고,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 부분에 삽입됐다. 마가가 쓴 이 기록은, 안드레의 기록 및 마태의 기록과 결합되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묘사하려했던, 차후의 모든 성문화된 복음서의 기초가 됐다.
121:8.4 2. 마태복음. 소위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는, 유대 그리스도교인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쓴, 주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생애에서 그가 행한 대부분의 사건이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계속 애썼다. 마태의 복음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아주 존중하고 있는 듯이 서술한다.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 마태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이사도르가 이것을 기록했는데,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이 사건들에 대한 마태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십자가형 직후에 이사도르 자신이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은 것들의 도움도 받았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람어로 돼있었으며; 이사도르는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이 글을 마태의 작품이라고 공언할 때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제자들이 그렇게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121:8.6 마태의 원래 기록은, 서기 40년에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복음을 전파하러 가기 직전까지 편집되고 첨가됐다. 이것은 사적{私的}인 기록이었으며, 그 마지막 사본{寫本}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 수도원이 불탔을 때 없어졌다.
121:8.7 서기 70년에 티투스 장군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 기록들을 지니고 성을 빠져나와서 펠라로 도피했다. 펠라에서 살고 있던 71년에,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 기록들에 의거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마가의 기록 중에서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을 갖고 있었다.
121:8.8 3. 누가복음. 피시디아 안디옥의 의사였던 누가는, 바울로 인해 개종된 이방인이었고, 주님의 생애에 관하여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서기 47년에 바울을 추종하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하여 배웠다. 누가는, 바울은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사실을 수집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보관했다. 그는 주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묘사했다. 그는, 바울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여러 단편 기록을 복음서로 조직화하지 않았다. 누가는 아가야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쓸 계획이었으나, 둘째 책인 “사도행전”이 완성되기 직전인 서기 90년에 죽었다.
121:8.9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하기 위한 재료로서, 먼저 바울이 자기 체험과 관련시켜서 말했던,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료에 의존했다. 따라서 누가 복음서는, 어떤 면에서는 바울로 말미암은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정보 자료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예수의 생애 가운데 여러 사건을 목격한 많은 사람과 면담했을 뿐만 아니라,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의 마가복음 사본을 갖고 있었으며, 이사도르의 글, 그리고 서기 78년에 안디옥에서 세데스라는 한 신자가 쓴 간단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종합적이고 많이_편집된 어떤 기록의 사본도 갖고 있었다.
121:8.10 4. 요한복음.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는, 다른 기록들에서 볼 수 없는, 예수께서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근방에서 활동하신 일이 많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라고 불렸으며, 비록 요한이 쓰지는 않았지만, 자기 생각을 불어넣었다. 이것이 처음 기록된 후에, 바로 요한이 직접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편집됐다. 이 기록이 작성됐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갖고 있었고, 많은 것이 생략돼있음을 발견했으며; 따라서 그는, 서기 101년에 가이사랴에서 온, 그리스 유대인인 동료 나단을 설득해서 이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재료를 제공했고, 이미 기록된 세 권의 기록을 참고하도록 했다. 그가 직접 쓴 기록은 없었다. “요한1서”라고 알려진 서신서는 그가 직접 쓴 것이었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서 나단이 기록한 작품의 서언{序言}에 해당하는 편지였다.
121:8.11 이 저자들은 모두, 자신이 예수를 본대로, 기억나는 대로, 또는 그에 대해 들은 대로, 그리고 바울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나중에 지지함으로써, 오래 전의 이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정직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 기록들은 거의 2,000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진로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121:8.12 [감사{感謝}의 글: 나사렛 예수의 교훈을 다시 진술하고 활동을 다시 이야기하는 위탁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나는 기록된 모든 자료와 행성의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했다. 나의 주요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 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기록을 준비하는 데 있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었던 방대한 양의 정보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보만 선택했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 세계의 자료들로부터 정보를 도출하려고 했다. 그런 자료를 구할 수 없을 경우에만, 초인적인 그 기록의 도움을 받았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개념과 관념을 어떤 인간 정신이 적절하게 표현했을 때, 나는 그런 명백하게 인간적인 사고 유형에 반드시 우선순위를 뒀다. 주님의 생애와 교훈의 실제 의미와 진정한 뜻에 대한 우리 개념에 더 잘 맞을 수 있도록, 단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그럼에도 나는 서술하는 동안 내내 가능한 한 실제 인간 개념과 사고{思考} 원형에 충실했다. 인간의 정신에서 생겨난 이 개념들이, 다른 모든 인간 정신에게도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고 도움 될 수 있음이 입증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의 기록이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아 낼 수 없을 때, 내가 소속된 지상 피조물 계층인 중도자들의 기억 자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 2차 정보 자료가 부적당한 경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행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정보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
121:8.13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대한 기억은 별도로 하고-- 예수 시대부터 이 계시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진술하는 이 기록을 쓸 때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2천 명 이상의 인간으로부터 수집한, 예수의 교훈에 관한 주옥같은 사상과 최고의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내가 수집해온 메모들로부터, 나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이 서술문을 준비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의 개념들이 적절한 사고{思考} 원형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허용된 계시를 활용해왔다. 내가 소속된 계시 위원회는, 요구된 개념적 표현을 순수하게 인간적인 자료로부터 찾아내고자 수고하는 일에 실패했음을 내가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인간 범위 밖에 있는 어떤 정보나 표현의 자료에도 도움을 청하지 말라고 금지했다.
121:8.14 11인의 연합한 동료 중도자들의 협력과, 기록을 담당하는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려는 나의 개념에 맞도록, 그리고 직접 표현하기로 한 나의 선택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묘사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해서 활용한 그 관념들 대부분, 그리고 심지어 효과적인 표현들 가운데 일부분은, 이 일을 떠맡기 시작할 때 아직 살아있던 자들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끼어있는 그 세대들 동안 지구에 살아왔던, 여러 인종에 속한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그것들의 원천을 활용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내가 직접 이야기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역할을 했다. 나는 인간 개념과 관념을 더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예수의 생애를 묘사할 때 가장 효과적인 창작성을 제공했고, 내가 예수의 비길 데 없는 교훈을 다시 기록할 때, 가장 현저하게 도움을 주고, 가장 보편적인 어법{語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향상시켜줬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 형제단체를 대신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다시 서술하는 자세한 글에서, 이어지는 다음 장들의 기록과 개념의 모든 자료를 제공한 사람들의 은혜에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다.]
◀제120편 유란시아에 미가엘이 증여됨 ∥ 제122편 예수의 탄생과 유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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