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22, 2017

구원(salvation)에 관하여

구원(salvation)에 관하여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유란시아서는 성경을 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완하여 좀 더 완전케 하려고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시공우주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한, 그 속에 있는 것들 중에 완전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완전함이 불완전함 속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완전하지 않고, 유란시아서 역시 완전할 수 없다. 완전하지 않은 것 토대 위에 완전한 기준을 세우려 한다면 대단히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오류 중 하나가 구원(salvation)”이다. 성경만을 근거로 할 때, 구원은 흑백논리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못 받느냐. 구원을 받으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구원을 받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벌에 처해진다. 중간은 없다. 구원에 차별이 없다.
 
그런데 유란시아서는 이 흑백논리를 완전히 허물어버린다. 구원만이 실체이고, 구원의 반대는 소멸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원은 단 하나의 완전한 수준이 아니다. 유란시아서에서 확장된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중논리 또는 입체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은 생존과 구원을 구분해야 한다. 생존은 생존할 가치 또는 의미가 있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이뤄진다. 아주 원시적인 동물적 상태를 벗어나 인간(human being)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 의미나 가치 없이 살아가기는 오히려 힘들 것이다. 생존하는 자는 모론시아 맨션 세계에서 반드시 부활한다. 이 생존을 기존 구원개념과 일치시킨다면, 인간은 거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봐야 하지만, 구원개념만으로는 유란시아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생존이 영생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생존한 자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매우 긴 시간의 교정과 훈육이다. 동물로부터 기원된 존재로서의 흔적이 지워지기까지 정말로 상상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체계에서 성운을 거쳐 지방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가정(家庭)에 대해 알아가면서 최종적인 자유의지적 결단의 기회를 갖는다.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하늘 존재들과 시스템들이 이미 다 마련돼 있다. 예정된 기회를 다 소모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덧없이 짧은 인생에 비교하면 영생에 가깝다고 할만한, 저승에서의 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그리고 언제든 자신의 자유의지 결단으로 이 여정을 끝낼 수 있다. 그 결정은 존중받을 것이고 소멸의 과정이 준비돼 있다. 얼마나 많은 생존자가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러한 소멸을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는 유란시아서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수많은 도우미들과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교육체계로 볼 때 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소멸을 선택하지 않고 생존을 유지해가는 여정을 구원이라 해도, 여전히 대다수가 구원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존 수준 다음에는 융합(fusion) 수준이 있다. 성경에서도 이 수준은 에녹이나 엘리야 등의 승천을 통해 어렴풋이 증거되기는 했으나, 유란시아서는 이 융합에 대해 아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융합에 들어가지 않은 생존자는 언제든 소멸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루시퍼와 사탄이 그토록 대단한 존재고 그토록 오래 존재해온 존재지만, 융합 잠재력이 없기에, 그리고 미가엘의 자비를 최종적으로 뿌리쳤기에, 결국 소멸될 운명에 있음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융합에는 또한 영 융합, 아들 융합, 아버지 융합의 대표적인 세 수준이 있다. 사고 조율사(Thought Adjuster)가 내주했던 필사자는 누구나 아버지 융합 후보자가 될 수 있지만,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아버지 융합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 중에는 아들 융합을 이룰 자들이 있고, 아들 융합도 이루지 못할 자들 중에는 영 융합을 이룰 자들이 있다. 수준이 다름은 높고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 또는 역할의 차이를 의미한다. 아무튼 어느 융합이든 일단 융합이 이뤄지고 나면, 소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 세 수준의 흉합 중, 낙원을 달성하는 아버지 융합자만 구원에 해당된다고 본다면(기독교 교리에서 구원 받으면 낙원에서 영생한다고 하니...), 여전히 생존 여정에 있는 자들 및 융합을 이룬 자들 전체 숫자와 비교할 때 비교적 소수의 구원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입장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3부만을 토대로 하면 다수의 구원이 옳다. 그런데 특히 193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면 다수의 구원이 굉장히 부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앞과 뒤가 안 맞는 것인가? 미가엘의 말씀이니 예수님의 말씀이 맞고 다수의 구원을 내비치는 1~3부가 틀린 것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최종 핵심은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완전한 주권을 성취하기 위해 일곱 번째 증여의 삶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했고 다 이뤘다고 선언했듯이,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그저 생존해서 언제든 소멸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가능하면, 아니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의 영(사고 조율사)과 완전히 융합해서 예수님 자신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영광스런 존재가 되어가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제시하실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애에서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론시아 생애 및 그 이후의 영원한 생애에서도 똑같이 적용돼야만 할 말씀이다. 앞과 뒤가 다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통합된다. 앞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고 뒤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을 제시한 것 뿐이다! 영원한 시간이 흐른 뒤에 우주들의 우주 전체가 빛과 생명에 들어가고 생존자들 대다수가 결국 융합을 이루게 된다면 이런 혼돈 역시 사라질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유란시아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자세히 밝혀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보를 얼마나 많이 습득할 것인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자세로 이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유란시아서를 지식으로 습득할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실행하면서 진리의 영의 인도와 안내를 바르게 인식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만이 참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일 것이다. 유란시아서 없이도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던 것처럼...(2017.9.22ㄱㅌㅊ)

No comments:

Post a Comment